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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2장 - 가지고 싶다면 싸워라 (23/341)



〈 23화 〉2장 - 가지고 싶다면 싸워라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낄낄거리며  몸을 더듬던 인간들.
욕정에 찌든 그 얼굴로 다가오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율리아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분노에 몸서리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손짓, 얼굴, 표정, 그 모든 것에 숙부의 모습들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어머니를 해치고 아버지이자 마왕이기도 했던 분을 끝내 죽게 만든 그 원흉.
복수하고 싶어도  방법이 보이지 않는 최악의  말이다.


‘제발, 제발.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놈들의 손이  몸에 닿고 기분 나쁜 축축한 혀가 느껴질 때마다 그녀는 모든  저주했다.
자신을 두고 전부 떠나간 부모님을, 신하의 의를 저버린 자들을, 그리고 마왕의 자리에 앉아서 그저 약하기만  먹잇감이 되고 있는 자신을.


죽을까? 그냥 이대로 죽어버릴까? 살아도  게 아닌 몸이 될 터인데.
이제부터는 세상 가장 치욕스러운 여인으로 살아가야 할 터인데.
살아서 뭣하겠는가. 차라리 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니, 아니야. 살자. 살아서…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전부, 전부 다 죽여 버리자.’



마음속을 가득 채우던 공포, 두려움, 체념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분노가 대신한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폭발하는 화산처럼, 흘러내리는 용암처럼 뜨겁고 폭발적인 원초적인 감정이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 새겨졌다.


그래, 마음껏 탐해라. 마음껏 즐겨라. 언젠가 전부 목을 자르고 사지를 뽑아주마.
심장을 꺼내 씹어 먹고 코와 귀를 잘라 장신구를 만들고 몸에서 피란 피를 전부 빼내서….


뎅그렁-.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없지만, 뭔가 묵직한 것이 바닥을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되었다.
다른 생각이 들자 율리아의 안을 점거하던 불꽃과 용암이 점차 사그라든다.

그리고 율리아는, 자신이 그리 낯설지 않은 방의 소파 위에 앉아있음을 깨달았다.

‘여, 여기는….’



확실하다. 이곳은, 며칠 전 자신이 몰래 들어왔던 클라우스 교수의 방이었다.
분명히 기억한다, 클라우스 몰래 교수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잠깐이나마  안을 구경했던 율리아니까 말이다.

분명 자신은 제 방에 있었는데,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 귀족 생도들에게 난폭하게 범해지기 직전의 상황에 쳐해있었는데, 어찌하여 자신은 이곳에….

“아, 젠장. 잉크 다 버렸군.”

옆쪽에서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분명 클라우스의 것이다. 확실히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

율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바닥에 떨어진 잉크병을 주워들며 쯧, 하고 침음을 내뱉으며 투덜거리는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클라우스… 교수님?”
“이것도 다 돈인데 딱 한 번 쓰고 아깝게… 아, 일어났습니까. 율리아 생도?”
“제가, 제가 왜 여기에… 교수님 방에 와있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던 여인은 뭔가 묘한 감각에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원래 입고 있던 생도복은 어디 갔는지,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새하얀 서츠  장이 전부.
속옷도 없이 그저 그 셔츠 한 장에 하의는 짧은 팬츠가 전부였다.



“….”



두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하던 율리아는, 곧 모든 것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수님인가요?”
“그 옷 말인가요? 미안합니다, 율리아 생도.  벗은 채로 둘 수는 없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입혀두긴 했는데 절대 몸은 안 건드렸습니다. 그, 성적인 의미로 말이에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저를 구해주신 거요. 저를 강제로 범하려던 그 인간들 손에서.”
“…아직 마력 구속은  풀어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내 방으로 데리고 왔어요.”


역시 저 남자가 자신을 구해주었구나. 율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직도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감각이 온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손으로 더듬고 입술로 보듬고 혀로 핥고 빨며 남김없이 자신을 먹어치우려던 그 괴물들.
그 생각이 들자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참해.’




어떻게든 끌어들이려던 남자의 손에 역으로 도움을 받았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인 도움을.
클라우스에게 빚을 진 것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에게 고스란히  보여준 셈이 되었다.

사실 마왕이라는, 자신이라는 이 여인은 이렇게나 비참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마왕이란 자가 고작 인간 귀족 생도들에게 범해지는 그런 우스운 장면을 말이다.


‘이제 틀렸어. 방법이 없어.’



상황이 이러한데 과연 누가 마왕에게 충성하려고 하겠는가.
이미 다 기울어서 저무는 해, 결코 다시는 떠오를 수 없는, 바닥끝까지 추락한 권위.
이런 여인인데 과연 저 남자가 무엇을 보고 자신의 제안을 다시금 생각하겠는가.




“…그 인간들은, 어찌 되었나요.”
“내 선에서 가장 합당한 벌을 주었습니다. 아마 다시는 ‘남자 구실’을 못 할 겁니다.”
“…교수님이 난처해지실 수도 있는데요.”
“걱정 마요. 아마 내일이 되면 이런 이야기가 인간 귀족들을 아주 치욕스럽게 만들 테니.”
“…?”
“생도들이 서로의 구멍에 박으려고 하다가 싸움이 나서 서로의 중요 부위를 물어뜯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그게 가능하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자세히 조사를 하면 결코 그리 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텐데, 도대체 누가 그 결론을 믿겠냐는 그런 뜻이었다.



“믿을 겁니다. 인간 측은 제 생도들이 고자가 되었다는 치욕을 빨리 덮고 싶을 테니까. 무엇보다 권세 높은 가문도 아니고 그저 그런 가문의 놈들이니 더더욱 빨리 묻어버릴 겁니다. 아카데미 측은 그렇지 않아도 인간 귀족 생도들이  거슬리던 참에 이번 사건을 통해 그들의 기세를 눌러줄 수 있으니 옳다구나 할 테고요.”
“그런….”
“진짜 문제는 그 고자 새끼들이 아닙니다. 율리아 아그네사, 동부 마족들의 왕인 당신의 몸에 감히 마력 구속을 해둔 놈이 누구인가. 그것이 문제죠.”

가만히 생각에 잠긴 율리아는 아마도 제 방에서 자신을 기절시켰던 정체불명의 상대가 아마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숙부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몰래 몸을 단련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기습을 성공시킬 작자라면 그런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숙부가 붙인 그림자  하나겠지.’


그들의 존재야 율리아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떼어내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잠시 정도는 떼어낼 수도 있었으나 그리 하면 몇 배로 경계가 더 심해졌기에 일부러 알아도 모르는  당해주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이번 일을 야기했다면, 자신을 공격하고 마력을 구속하여 아무 것도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도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두었다면 이제는  안전하지 않았다.


‘이제 어쩌지. 정말 숙부가, 아니 그 남자가 이번 일의 배후에 있다면 이제는  안전한 곳이 없다는 소리야. 아카데미에서까지 일을 벌일 정도면, 마왕성은 최악일 테고.’



다시금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바로 앞에 있으니 감사하다는 뜻을 전해야 함에도, 율리아는 그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치욕스러움과 비참함으로 인해 잘게 몸을 떨어야만 했다.



“보아하니 곤란한 일에 빠진 것 같은데요. 율리아 생도. 아니, 율리아 아그네사 마왕.”
“….”
“이번 일은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이요, 만일 마족이 관여되었다면 명백한 반역죄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염려하는 명분에서는 완전히 먹고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데…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는 건 명분이라는 최고의 무기를 쥐었음에도 그걸 휘두를 이가 없다는 건가요?”



율리아는 딱히 숨길 마음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동부의 군주라는 마왕이 일개 인간들한테 험한 일을 당할 뻔 했는데 그 여인을 구해주고 챙겨준 이가 마족이 아니라 한 때 그 마족과 혈전을 벌이던 이다.


여기서 무슨 자존심을 더 챙기겠는가, 무슨 말을 더  수 있겠는가.




“클라우스 사령관님. 아니… 클라우스 교수님.”
“네, 율리아 생도.”
“그 전투 있었잖아요. 저희 마족의 정예군 3만을 상대로 했던 메라 대전. 동부도, 서부도 모두가 남부군의 패배를 점치던 그 말도 안 되는 싸움 말이에요.”
“내가 지휘관으로 복귀하자마자 있었던 전투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건지요.”
“어땠나요? 그 전투를 앞두고.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세상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 수많은 마족의 군대를 바라보며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었나요.”


지금 이 여인은 그야말로 한계에까지 몰렸다.
기어코 숙부가 움직여서 자신을 끔찍한 곳에까지 몰아세웠고 하마터면 정말 그리  뻔 했다.

허나 그런 자신을 도와줄 이는 어디에도 없다, 한 줌 남은 충성파는 어떻게든 마왕성을 유지하기 위해 동부에서 움직이지 못 하고 있다.
호위라고  만한 이도 없다,  만한 실력을 지닌 자들은 숙부가 모조리 빼갔으니까.


명분을 쥐면 뭐하는가, 그걸 쥐고 휘두를 힘이 없는데.
당장 동부의 여러 가문들은 실권 하나 없는 자신보다 이름만 마왕이 아니지, 거의 마왕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제 숙부를 따를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다.

세상 어느 누가 봐도 이건 무조건 지는 싸움이다.
물러설 수 없음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 싸워야 하는 것임을 율리아도 안다.
하지만 싸운다고 해서, 저항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기는  아니지 않은가.


전력 차이라는 게 있고 가능성이라는 게 있고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지금 상황이  그러했다, 메라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서부 연합과 똑같은 상황이라 할  있었다.



그래서 율리아는 클라우스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았냐고, 도대체 어떻게 이긴 것이냐고.



‘하늘이 도왔다고? 천운이었다고? 아니, 아니지. 다른 녀석들 앞에서는 그렇게 겸손을 좀 보여주었지만 사실은 하늘이고 뭐고 그딴  없었거든.’



왜 두렵겠는가? 자신이 바로 그 판을 다  장본인인데.
연기를 하는 주연이며 시나리오를 짜는 작가이고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감독인데 말이다.

“무조건 이기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네?”
“내가 왔다. 내가 지휘한다. 내가 적들을 상대한다. 그러니까, 무조건 이긴다. 걱정할 거 하나 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무슨 그런 말을….”
“농담처럼 들립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전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닌데.”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멍하니 제 앞으로 다가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미련한 자의 용기가 아니다.


 자존심 강한 요정들이, 제 잘난 맛에 사는 수인들이, 평민을 짐승처럼 보는 인간 귀족들이.
심지어 자신들 마족조차 인정한 남자, 경외하며 또한 동경하던 이가 하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교수나 하고 있지만, 지금 다시 그 전투를 치른다고 해도, 다시금 그와 비슷한 상황 앞에 놓인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리 말한 남자는 깍지를 끼고는 이제 당신 차례라는 표정으로 율리아를 쳐다본다.
나는 답을 했다, 이제 남은 건 당신이 결정하는  뿐이지 않은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당신이 저를 도와줄 수도 있다, 라는 말로 들어도 되는 건가요?”
“원한다면, 그리 되겠지요.”
“당장 힘겨운 싸움에, 아무 힘없는 왕을 모시는 군인이 될 터인데?”
“뭐, 그거야 그 고용주가 내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어떤 믿음을 새겨줄지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던 율리아는,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상 누구보다도 당당한 여인이 되어서 다시금 자신을 찾아오라고.


처음에는 강력한 힘, 권력, 믿을  있는 사람을 가진 이가 되었을 때 다시금 자신을 설득해보라는 뜻으로서 클라우스의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을 보는 순간.
율리아는 그게 자신의 오해였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것들을 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클라우스 교수님.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당장은 약속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그래 보이죠.”
“…하지만, 언젠가 나의 일이 끝난다면 그 때는 원하는 모든 것을 드리죠.”
“듣기 좋은 말들이군요.”
“듣기만 좋은 말이 아닐 거예요. 왜냐하면.”



턱-.


여인의 손이 클라우스의 멱살을 쥔다.
그리고는 반드시 이 싸움에서 이기겠다는 욕망을, 그리고 이 남자를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소유욕을 남김없이 불태우며 선언하듯 말을 잇는다.



“약속의 증표로, 나를 줄게. 클라우스.”

만개하듯 시야에 가득해지는 여인을 바라보며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역시 우리 마왕님이야. 아주 화끈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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