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장 - 교수입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클라우스 교수님. 당신은 이 아카데미 안에서는 교수님일지 모르나 바깥의 모든 이들은 당신을 그렇게 보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도….”
“전쟁 영웅. 동부 마족의 군세를 막아내고 모든 공세를 분쇄하여 전쟁의 판도 자체를 바꿔버린 인간. 그럼에도 그 인간들에게 버림 받아서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는 남자.”
“….”
“뭐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겁니까?”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내어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말했다.
“불쾌하실 수도 있어요. 이해해요,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만큼 당신은 대륙 전쟁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요정도 수인도 마족도 인정하는 위대한 영웅이니까요.”
“아첨이라면 그만해요. 이 퇴역 군인 낯이 상당히 뜨거워지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받아들여질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그쯤 해둬요.”
“….”
“이유가 그거입니까?”
클라우스의 질문에 율리아가 예? 하고 반사적으로 되묻는다.
이유가 그것이냐니, 그의 질문이 품고 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 그녀가 막 생각을 하려는 찰나 다시금 그 질문이 흘러나온다.
“내 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 말입니다. 창칼을 들고 피를 흘리며 치르는 전쟁은 끝났으나 모든 의미로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야 하니까. 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고, 그 명분을 가져올 수 있는 최고의 카드 중 하나는 헌신적으로 싸워 지켜낸 전쟁 영웅이겠죠.”
“그건….”
“인간들이 가장 무시한다는 평민으로서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았음에도 제 왕국을 지킨 남자.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 내쫓기듯 조국을 등진 남자. 그런 자가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자신의 거처를 정하고서 요정이든 수인이든 마족이든 한 곳을 선택한다. 그 대단하던 전쟁 영웅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정도라면 그곳은 분명 대단한 곳이리라. 뭐 이런 식으로.”
인간도, 요정도, 수인도, 그리고 마족도 전부 다 혼란에 빠져있다.
전쟁에서 승리했든 패배했든 가리지 않고 그 처참했던 전쟁의 여파로 지배 세력의 근간부터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아래를 진정시키지 못 한다면 결국 흔들리다가 바람 한 줄기에 통째로 뽑히게 된다.
그 땅을 다지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대단함을 알릴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예로 들자면, 전쟁 영웅으로 불리던 이가 인간을 제외한 어느 쪽 세력의 자들을 높게 평가하고 그 아래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
그 대단하다는 전쟁 영웅이 따를 정도면 이제는 믿을 수 있지 않겠냐고 외칠 수 있다.
심지어 단순하게는 민심을 다독이는 것부터 멀리 봐서는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서 확고한 이점을 가지는 것이니 그 효율은 가치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걸 우리의 인간 왕국과 제국 새끼들은 권위주의에 찌들어서 차낸 거지.’
제 병사들이 잘난 줄 알아서 버틴 줄 안다. 원래부터 남부군이 강해서 이긴 줄 안다.
클라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남부가 어떻게 쓸려나갔고 그가 돌아오자마자 어떻게 그걸 막아냈는지 다 알면서도 그를 내쫓는 결정을 내렸다.
솔직히 남부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클라우스가 다른 생각을 품었다거나 격렬히 반대했다면 없던 일로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아주 쿨하게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사령관 직을 내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군의 모든 자리를 포기하고 왕국을 나섰다.
이유?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어차피 인간은 가라앉는 배, 지금은 떠있는다 해도 언젠가는 무조건 가라앉는다.
거기에서 배 살려보겠다고 아등바등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미련 없이 갈아타고 미련 없이 버린다, 물론 건질 녀석 몇 놈 건져서.
‘잘난 귀족 새끼들 다 뒈지라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클라우스는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이게 네가 걱정하는 그 이유이지 않냐고 말이다.
“…다 알고 계시는군요.”
“아무렴 내가 설마 전쟁만 아는 미련한 놈일까요.”
“그런데도 거부가 아니라 보류하셨다고요. 그 말은 즉, 요정 측의 거래를 수락하고 그들 밑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거네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어쩔 수 없는 일이요?”
“실컷 고생하고 실컷 희생했으니 이제는 조금 살아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살아본다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는 눈치의 율리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또래의 마족들은 클라우스라는 인간에 대해서 그냥 기계적으로 전투를 치르며 앞을 가로막는 마족은 다 죽이는 그런 괴물로 처음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대륙 전쟁의 생환자들로부터 비록 인간이고 적이나 너무나도 훌륭한 상대였다는 말을 들으며 두려움에 이어서 호기심도 같이 느끼게 된다.
마족들을 그렇게나 거칠게 몰아붙이던 최악의 적, 그런데 막상 동족들은 그런 인간을 저주하기는커녕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있으니 호기심을 넘어 동경을 품게 될 것이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인간, 마족으로 태어났어야 했던 남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런 남자가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하니 당황스럽겠지. 전쟁 영웅이니 남부의 악마이니 하는 칭호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느낌을 주니까 말이야.’
명성과 능력으로서 시선을 끌고, 그 안에 사실은 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마왕이 호기심을 품고서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게 만든다.
이게 전부 그녀를 끌어들이기 위한 독인 줄도 모르고 다가오다가 그대로 붙잡혀서는 몸이고 마음이고 권력이고 다 내어주게 되는 것이 바로 직전 회차의 내용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한 번쯤은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또한 어쩔 수 없는 남자입니다. 여인이 유혹한다면 절로 침음을 내뱉게 되지요. 그리고 나는 군인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경멸하고 내쫓는 자들이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고 밀어주는 사람의 밑에서 충성을 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클라우스 교수님.”
“이게 내 대답입니다. 왜 그들의 제안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을 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자 이유.”
후르륵-.
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법으로 다시 데운 후 마저 마신다.
그러면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율리아의 모습을 몰래 살핀다.
역시 이전의 회차에서 봤던 대로 우리의 마왕님은 꽤나 충격을 먹었다는 모습이다.
그저 대단하다고만 여겼던, 종이 한 장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빈틈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전쟁 영웅, 남부의 악마 클라우스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클라우스 교수님.”
한동안 말이 없던 마왕은 그렇게 입술을 떼며 침묵을 깨트린다.
그리고는 여태까지의 모든 고생을 한 방에 풀어주는, 아주 뿌듯한 말을 내뱉는다.
“이런 말씀을 드린다면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만.”
“말해봐요, 율리아 생도.”
“혹 교수님이 쉬고자 하는 둥지는 대륙 서쪽에만 있는 것입니까?”
“흐음?”
“그게 아니라면, 동쪽으로도 오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율리아 입장에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질문이다.
마족과 전쟁을 치르며 아끼던 이들을 참 많이도 잃은 생환병에게 그 원수나 다름없는 자들 곁으로 들어올 생각이 있냐는, 도발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고.
마왕으로서 전쟁에서 동족들을 죽이고 마족들에게서 승리를 빼앗은 자를 죽이기는커녕 곁으로 두겠다하니 다른 마족들 입장에서는 분노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을 율리아는 했지. 아직까지 흑화하지 않은 상태이니까.’
바로 이 질문을 듣기 위해서 그 개고생을 하며 전쟁 영웅이 된 것이다.
평민으로서 온갖 무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제 자리 하나 지키지 못 한 멍청한 놈이 된 것이다.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다만 확실한 증명과 동정, 그리고 자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도록.
“지금 나보고 마족 밑으로 들어가라, 이겁니까?”
“혹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사실 고민 안 해본 건 아닙니다.”
번쩍-.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가 고개를 든다.
두 눈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연신 터져나오고 있음을 확인한 클라우스는 속으로 웃으면서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인간들보다 더 많이 나를 인정했던 이들이 바로 마족들이니까. 은근히 자신들한테 오라는 말도 많이 들었고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서.”
“그게 뭐죠?”
“반기는 이도 많겠지만 그만큼이나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도 많답니다. 내 손에 죽은 놈들, 내 남부군에 의해 전사한 녀석들, 나와의 싸움으로 인해 남부 지역에 대한 공격이 좌절되면서 완전히 주저앉아야 했던 실세들까지. 솔직히 아카데미에서 마족 암살자 하나 정도는 만나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아직은 없더군요.”
아아, 하고 탄식을 내뱉는 율리아.
확실히 클라우스를 동경하거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마족도 많지만 그만큼 그를 적대시하고 날카로운 눈길로 보는 이들도 만만치 않게 많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클라우스가 율리아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마족이 최종 우승자가 되는 대륙의 미래 정세.
그 세상에서 다른 종족은 되어도 마족으로는 회귀가 불가능하니 그 마족들의 최고 권력자인 마왕 뒤에 숨어서 지내는 편이 좋다는 걸 깨우친 클라우스였다.
“뭐, 그래도 동부로 가는 것도 생각은 해봤습니다. 다만, 딱히 적당한 제안을 받지 못 해서 괜히 찾아갔다가 목만 날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망설이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아카데미 교수직을 일단 맡은 것이군요.”
“말했다시피 내 인생을 좀 살고 싶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니까요.”
달칵-.
깨끗하게 잔을 비운 클라우스가 일부러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는다.
그것으로 분위기를 한 번 환기시킨 후 그는 알게 모르게 율리아에게 보여주던 부드러운 분위기를 거둔 후 원래의 그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입을 열었다.
“이상이 교수의 일에 관심을 보이던 생도에게 답해줄 수 있는 최대치였습니다. 원래는 말해줄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율리아 생도의 끈기에 한 번은 넘어가 준 것이고 다른 생도들은 찾아오지도 않는 상황에서 오늘 있었던 세실리 생도의 마법 파훼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고 한 부분이 기특해서 이야기를 해준 것입니다.”
“….”
“이 이상 너무 관심을 가지지 말길 바래요, 율리아 생도.”
저번보다는 훨씬 더 유해졌다고 볼 수 있는 축객령.
그 말에 율리아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답을 요구했고, 클라우스는 그 과한 요구에 생각지도 않게 성실히 답을 해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게 생겼어.’
요정이 먼저 선을 넘었다, 평화의 장이라는 아카데미에서 먼저 도발했다.
마족들이라고 클라우스가 원수라고만 생각해서 침묵하고 있는 줄 아는가?
최소한의 정도라는 게 있어서 침묵했던 것뿐인데 강의가 시작도 하지 않은 시점에서 요정 여인과의 연을 허락하겠다는 조건까지 내걸 줄이야.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라고 하니까….’
욕심이 난다.
머저리 인간들은 내쳐버린 저 남자, 가히 보석 중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저 인간을 반드시 자신이 가지고 싶다는 그런 욕망이 타오르듯 이글거린다.
‘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눈에 다 비친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던 순간이다.
비록 지금은 흑화하기 전의 율리아라고 하나 어찌 되었든 ‘마왕’ 은 마왕이다.
독점욕 심하고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 인재에 대한 욕심은 넘쳐나며 무조건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는 그런 마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클라우스라는 전쟁 영웅은 허수아비 마왕의 얼마 되지 않는 수하들을 전부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위력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라고, 율리아가 생각하고 있다는 걸 클라우스는 스킬과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클라우스 교수님.”
“질문은 더 받지 않겠다고,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율리아 생도.”
“질문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괜찮은가요?”
“…해보세요.”
“저는 질문이 아닌 거래를,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요.”
“거래라. 대충 무슨 내용일지 얼추 감이 잡히는데요. 내 생각이 맞습니까?”
“아마도 그럴 거예요”
요정 말고 마족 쪽으로 혹시 넘어올 생각은 없냐.
어차피 요정도 결국 당신을 이용만 해먹던 서부 연합의 일원이지 않느냐.
차라리 당신의 진가를 잘 알고 있는 동부로 넘어온다면 비록 적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추종자 세력까지 생겨나서 나름 괜찮게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가 클라우스를 설득하는 데에 율리아가 내놓을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이유는 그렇다고 치자.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거래라고 했다, 제안이라고 했다.
자신을 동부로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당연히 그쪽도 뭔가 내놓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는 마왕 율리아 아그네사는 숙부로 인해 가진 실권도, 재물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동부 존체를 아우르는 마왕이 요정의 벨라루스 가문보다도 못 하다.
그게 현재 율리아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고, 클라우스와 같은 거물을 끌어들일 만한 대가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나를 가지고 싶다, 이거군요. 마왕.”
“네. 정확해요.”
“그렇다면 나를 가지기 위해서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잠시 침묵하던 율리아는 약간의 망설임을 보이다가 입을 연다.
한 종족의 군주, 대륙 절반의 지배자.
그런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말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게 된다.
“도도하기만 하고 능력은 없는 요정 따위 말고.”
“….”
“저는 어떤가요? 남부의 악마, 클라우스 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