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1장 - 교수입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
이제야 겨우 석양이 지고 있는, 어둠이 깔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때.
클라우스는 한 시간이 넘도록 나타샤를 가르치다가, 정확히는 그녀를 가지고 놀다가 여인이 완전히 지쳐서는 침대 위에서 잠이 들자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튼 고귀한 척 하면서 빈틈 많은 것도 여전하군.’
인간 남자를 바로 앞에 두고 잠이 들다니, 아마 다른 요정 여인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맹수 앞에서 자신을 잡아먹어달라고 비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일어나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타샤는 어차피 자신은 저 남자의 것이고 저 남자는 또한 자신의 것이니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마음을 놓은 듯 했다.
‘확 그냥 여기서 먹어버려?’
안 될 것도 없다, 열병은 아직도 적용 중이고 원래부터 자신은 나타샤를 취할 생각이었다.
당장 곤히 잠든 여인의 옷을 다 찢어버리고 딱 알맞게 영근 아름다운 육체를 탐하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잠시 나타샤를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저 여자를 연인으로 대할 생각은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적이라던가 아니면 증오와 적의를 머금은 채 강제로 따르게 만드는 사이로 나아갈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자존심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색욕에 대한 이끌림으로 나타샤를 정복한다.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여 벨라루스 가문과의 접점도 확실하게 만들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나타샤와 그 가문의 힘을 빌린다.
그게 클라우스가 생각하고 있는 나타샤의 이용 방식이었고 대하는 길이었다.
시작부터 강간 비슷한 방식을 생각했다면 귀찮게 스킬도 걸지 않았고 이렇게 찾아와서 강의니 유혹이니 떠들고 옷 하나 벗기지도 않은 채 애만 잔뜩 태우고 끝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또 물이 많은 여자라 고생 좀 했군.’
율리아도, 세실리도, 그리고 다른 여인들도 애액을 잔뜩 내뿜기는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민감한 몸, 그리고 조금만 자극해도 푹 젖어버리는 이는 단연코 나타샤.
지금도 팬티가 완전히 젖어서는 색이 변했을 정도였다.
한 시간 동안 한 것이라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팬티 아래의 음순과 질구 주변을 만져준 것뿐이었는데 마치 손가락을 거칠게 균열을 쑤신 것 같은 반응.
“으응….”
남자의 손에 의해 절정을 처음 맞이해 본 요정 여인은 그렇게 앙앙거리다가 잠들었다.
가르쳐달라고 요구해놓고 얼마 버티지도 못 하고 지쳐서 잠이 들다니, 도대체 이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나타샤였다.
‘뭐, 내가 가르칠 것도 솔직히 몇 없기는 하지만.’
주변의 모든 기척과 마력을 살핀 후 조용히 나타샤의 방을 나섰다.
한동안은 이곳 아카데미의 교수로 살아야 하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생도랑 놀아났다는 교수 소리 들으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는 귀족 생도들.
전쟁통이었다면 자신과는 감히 눈도 못 마주쳤을 것들이 전쟁 끝나고 살만 해지니 어떻게든 땅에 떨어진 귀족들의 권위를 되찾고 평민들의 기세를 눌러놓고자 아주 막나가는 중이었다.
당장 자신 외에 평민의 몸으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이 몸담았던 왕국은 물론이요 유일한 희망이라고 볼 수 있었던 제국에서조차 귀족들을 이용하여 그 평민들의 힘을 죽이는 데에 온 신경을 다 썼을 정도였다.
율리아만 아니었다면 이 좆같은 평민 짓도 때려치웠을 것이다.
귀족이든 왕족이든 황족이든 다 골라서 회귀가 가능했던 클라우스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말 그대로 개돼지 취급을 하는 평민으로 회귀한 이유는 단 하나.
귀족으로 앞에 서면 율리아가 본능적으로 경계를 하기 때문이었다.
‘더해서 평민이라는 것으로 인해 버림 받은 전쟁 영웅 놀이하기도 딱 좋았지. 율리아가 거기에 넘어가서 인간임에도 마왕가로 들어오는 걸 허락했으니까 말이야.’
평민이 아니었다면 왕국이 자신을 놓아주었겠는가?
당연히 뼈가 다 삭을 때까지 이용해먹으려고 했을 게 뻔하다.
“….”
막 교수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선 클라우스.
그러다가 말고 발걸음을 멈춘 채 입을 연다.
“분명 그때 경고했습니다. 생도로서 무례한 짓을 한다면 마왕이든 뭐든 개의치 않겠다고.”
“….”
“나오세요. 난 술래잡기에 관심 없습니다, 율리아 생도.”
그렇게 말하며 클라우스가 아무도 없던 복도 한 곳을 바라본다.
도대체 뭐하나 싶던 그 순간, 다른 복도로 이어지던 코너에서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아신 거죠?”
“생도가 내 뒤를 은밀하게 따르던 그 시점부터.”
“…진작부터 아셨다는 말씀이 되는데 왜 이제 와서.”
“혹시 길이 같나 싶어서 그냥 뒀는데 교수실 부근까지 이어지더라고요.”
율리아는 그 말에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 발짝을 떼었다.
마치 밤하늘을 연상시키듯 짙은 남보라에 검은색이 섞인 머리.
찰랑거리는 붉은 와인, 내지는 피, 혹은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작가 혹은 창조주 공인 세계관 최고의 미녀 중 하나답게 절로 눈이 부신 외모까지.
자신이 상상하하며 묘사했던 글귀 그 이상으로 율리아라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완벽했다.
“자, 저번에는 내 강의를 듣고 싶다고 해서 교수실에 몰래 잠입하는 무례까지 저지르면서 찾아왔었고. 이번에는 뭘까요? 도대체 뭐기에 우리의 마왕님은 인간의 뒤를 자꾸 몰래 뒤따르는 건지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
서부 연합의 명백한 적, 자신을 수 십 번도 넘게 죽인 원수들, 그게 바로 마족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클라우스 입장에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이들이기도 했다.
이성적이고, 권위주의가 심하지도 않고 신분이나 출신, 종족보다 능력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과거에서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그래서 강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다.
전쟁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전쟁 영웅 배척하고, 참전 용사들 내쫓고.
같이 연합해서 싸우던 인간, 요정, 수인들이 서로의 등에 칼 꽂을 준비만 하고 있다.
저들이 말하는 마족들이 대한 비하 발언들, 야만적이니 잔혹하다느니 비이성적이다느니 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거듭된 회귀 속에서 무슨 지랄을 해도 서부 연합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런 병신 종족들의 삽질에 이미 진저리가 나버린 클라우스는 미련 없이 그들을 버리기로 했다.
그딴 머저리들 상대하느라 정말 말 그대로 온 몸의 뼈가 다 삭을 정도로 고생할 바에 약속된 승리자인 마왕의 그늘에 숨어들기로 결정을 내렸다.
“혹시나 침묵으로서 넘어갈 생각은 말아요, 율리아 생도.”
“…원래는 오늘 있었던 그 장면. 세실리 생도의 전투 마법을 그냥 막아낸 수준도 아니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파훼해낼 수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자 했습니다.”
“성질이 급하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곧 있을 첫 강의 시간에 알려준다고 했는데.”
“마족들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참지 못 하는 종족이니까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이해합니다. 오죽하면 그 치열한 전쟁 와중에 그쪽 사령관 중 하나가 나와의 개인 면담을 가지고서 한다는 말이 차가 좋냐 커피가 좋냐, 이런 질문을 했을 정도니까.”
농담 같지? 그런데 농담이 아니라는 게 더 웃기다.
실제로 그 치열하던 격전의 와중에 뜬금없이 부하 몇 데리고 찾아와서는 차가 더 좋냐 아니면 커피가 더 좋냐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얼마나 황당하던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사적으로 커피, 라고 하니 그 마족 사령관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거봐, 내 말이 맞다니까!’ 라고 주먹까지 쥐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그냥 목을 쳐버릴까 했는데 너무 아이처럼 좋아해서 놔줬지.’
그런데 그 마족 사령관이 나중에 마왕가로 들어가서 율리아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치우고 마왕가를 손에 쥘 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줬다.
자신은 그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보내준 것이 이렇게 스노우볼이 될 줄이야.
당연히 이번 회차에서도 자신을 찾아온 마족에게 답을 일러주고 살려서 보내주었다.
“그런데 클라우스 교수님. 조금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해도 될 런지요?”
“무례하다고 생각되면 하지 않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
“뭐, 마족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무엇인가요? 그 무례할 수도 있다는 질문.”
클라우스의 물음에 율리아는 잠시 그가 지나쳐 온 길을 흘끗 돌아본다.
그리고 할 말을 정리하는 듯 입술을 살짝 떼었다가 천천히 말을 늘어놓았다.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걸어오신 곳을 대충 예측해보니 생도들 기숙사에서 오신 것 같은데요. 교수님이 왜 갑자기 생도들의 방이 있는 건물에서 여기까지 오신 것인지.”
“흐음. 마치 직접 봤다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어디까지나 예측이에요.”
“예측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확신하듯 말하는 투나 짓고 있는 표정이나. 모두가 ‘나는 확신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느낌이군요, 율리아 생도.”
“….”
“그 마족 사령관이 범 아가리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음에도 왜 내가 살려 보냈는지 아나요? 예의가 바른 이여서 그랬습니다. 마족이지만, 적이지만 예의를 지켰기에 나도 그에 맞는 대우를 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율리아 생도는 참 예의가 없군요. 몰래 뒤를 따른 것도 모자라서 의심을 하고 지레짐작을 하고 교수를 몰아붙이다니.”
클라우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율리아가 반사적으로 그게 아니라! 라고 말을 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 말 그대로, 자신은 클라우스가 정말 생도들의 기숙사에서 나왔는지조차 보지 못 했다.
그런데도 마치 그게 진짜였다는 듯 생각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짜증이 났다.
왜 짜증이 났냐고? 클라우스 교수가 나온 곳은 ‘요정’ 생도들이 머무는 곳이었으니까.
아카데미는 대륙의 평화를 위한 장인데 요정들은 제대로 된 시작도 전부터 전쟁 영웅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미친 짓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경솔했어.’
마왕이라고 하나 왕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을 만큼 초라한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을 대신해서 뒤에서 왕 노릇을 하려고 드는 숙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왕가의 비참한 현실은 그녀를 옥죄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몇 없는 마왕가의 이들이 전해주는 소식에 의하면 그 숙부가 요정들과 무슨 일을 은밀하게 벌이려고 하는 것 같다던데 그 타이밍에 전쟁 영웅 클라우스가 요정들과 접촉을 한다?
바로 온갖 불길한 그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려질 만 했다.
확실한 것이 없음에도 그 긴장으로 인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눈앞의 저 남자, 클라우스는 동부의 모든 마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던 상대다.
인간임에도 그 어떤 종족도 감히 무시하지 못 하던 남자.
참으로 웃긴 게 있다면 그를 유일하게 무시하는 이들은 그 덕분에 살아남은 인간들, 그 중에서도 귀족이라고 하는 머리통이 텅 비어버린 것들이었다.
‘과거의 전쟁 영웅에게 부탁할 것이 많은 나인데 이렇게 날을 세우다니.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 아직도 한참 멀었어, 율리아.’
입술을 깨물며 율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왕의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려두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혹 불쾌하셨다면….”
“아뇨. 그렇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예?”
“율리아 생도의 예측은 모두 사실이니까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율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는 멍하니 제 앞의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내가 방금 걸어온 곳은 생도들의 기숙사 방향이 맞습니다. 그것도 요정 생도들이 머무는 곳이죠. 훌륭하네요. 처음부터 나를 미행한 게 아니고 도중에 붙었음에도 대충이나마 답에 접근하다니.”
어제 보았던, 그리고 아까 전 보았던 그 잔잔한 모습 그대로의 남자.
하지만 율리아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인간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위험하고 또 대단하게 느껴졌다.
왕의 감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여인의 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지금 자신을 놀리기 위한 목적으로 말하고 있음이 아니라는 것.
클라우스 교수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부, 전부 사실이라고요.”
“네. 사실입니다. 요정 측에서 나와 은밀하게 접촉하려고 했죠.”
“…교수가 친히 생도의 방까지 찾아갔다면 아무 은밀한 만남이 있었겠군요.”
“그렇다고 해둘까요?”
“요정들이 교수님께, 사령관에게 제안을 했습니까? 그 귀쟁이들 세계로 들어오라고?”
“말조심 하세요. 귀쟁이라니. 요정 생도들이 들으면 큰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결투를 청해도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클라우스가 누구인가, 그 누구보다 대륙 전쟁의 참혹함을 두 눈 가득 담은 남자다.
그렇기에 그 역시 평화가 가장 필요한 순간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율리아는 그래서 클라우스가 이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동부와 서부, 연합과 마족 간의 갈등을 멈추고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같이 생각하고 또 고민하기 위해서,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걸 방해하는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서.
그런 이유를 품고 왔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었다.
헌데 당신이 그걸 정면에서 부정하는 자들의 농간에 넘어갈 리가 없잖아.
당신은 고귀한 인간이야, 대단한 남자야. 그런 유혹 따위 내쳤을 거야. 그렇지? 그렇겠지?
“요정 세계로 와라, 그 질문에 내가 뭐라고 대답을 했을 것 같습니까?”
하지만 클라우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율리아는 불안감이 확 치솟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