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1장 - 교수입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9/341)



〈 9화 〉1장 - 교수입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시간을 되돌려, 클라우스가 한 요정 여인과 점심 식사를 끝낸  날의 늦은 오후.




‘너.’


나타샤는 자신 바로 옆에서 대놓고 자신을 원한다 말하던 인간을 떠올렸다.

인간 주제에, 그 역겹기 짝이 없는, 천하디 천한 인간 따위가 감히 요정에게, 그것도 벨라루스 가문의 일원인 자신 앞에서 그딴 망언을 내뱉다니.
아마 그 인간이 보통 남자, 보통 교수였다면 그 자리에서 주둥이를 찢어버렸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방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 대륙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


평민하면 개처럼 대우하기 바쁘다는 인간 귀족들마저 쩔쩔 매던.
자신들에 대한 우월감으로 똘똘 뭉친 마족들조차 악마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인간.
그 클라우스라는 인간이 바로 그 남자다.

비록 그 미련한 인간 귀족들이 그를 시기하여 거의 쫓아내다시피 퇴역 신청을 받아냈다고 하지만 여전히 동부와 서부의 많은 이들은 클라우스라는 남자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심지어 인간을 은근히 무시하는 기류가 강하던 요정 세계에서조차 클라우스는 전혀 다른 존재이니 반드시 자신들 쪽으로 포섭해야 한다고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리고 대륙 아카데미의 입학식이 열리던 날.
나타샤는 그 전쟁 영웅이, 이 대륙 아카데미의 교수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결심했다.


저 남자를 요정 세계로, 자신의 가문으로 끌어들여 확고한 위치를 얻자고.
그를 데려가는데 성공한다면 벨라루스는 물론이고 자신도 엄청난 이점을 얻게 될 테니까!
해서 나타샤는 다른 생도들의 눈길은 완전히 배제한 채 조국에 배신당하고 아카데미로 쫓겨난 비운의 전쟁 영웅에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이 남자를 자신의 가문으로 데려가면 자신의 입지는 그야말로 확고부동해진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내놓았다.

하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클라우스.
그 반응에 나타샤가 속으로 초조함을 애써 감추던 무렵, 그는 조건을 걸었다.


‘너를 원한다고. 나타샤 벨라루스. 네가 내 것이 되는 것. 그게 내 요구 조건인데.’

전쟁 영웅, 그놈의 전쟁 영웅만 아니었다면!
내가 그딴 치욕을 받고서도 이렇게 참을 필요가 없을 텐데!




“젠장! 빌어먹을 인간!!”


사흘을 주겠다고? 고민할 시간 정도는 주겠다고?
미친놈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인간 나부랭이 따위가 그냥 가문도 아니고 벨라루스의 일원인 자신을 조건으로 내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단순히 자신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고 멸시한 것과 다름이 없다.
요정 세계에서 혼인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여인을 사고파는 행위를 하는 인간들과는 달리 요정은 모계 사회에 근간을 두고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을 터인데 그런 도발을 한 것이다!

‘죽여 버릴까?’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씩씩거리며 당장 실행에 옮길까 고민도 했으나 곧 나타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일전에 잠시 그와 함께 전쟁에서 싸웠던 요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클라우스라는 이에 대해서 말해보라 하니 그녀는 한숨부터 쉬고는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곧 입을 다물고는 이마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기색을 팍팍 내비쳤다.

나타샤의 성화에 결국  요정은 답을 하긴 했는데, 그 내용이 퍽 으스스했다.



- 부딪치면, 반드시 후회할 그런 인간입니다. 우군이면 반드시 붙잡고, 적이면 무조건 도망치는 게 좋은, 그런 인간. -


요정들은 인간을 무시하고, 혐오하고, 우습게 여긴다.
그런 성향은 전사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헌데  요정 전사가, 클라우스라는 인간에 대해서 내린 평은 요정으로서 으레 내리던 인간에 대한 평가와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할  있었다.

‘아카데미의 총장 루스칼은 인간 왕국은 물론이고 우리 요정, 수인 짐승 새끼들, 그리고 마족 머저리들 모두가 인정한 인간이다. 그런 자가 전투 마법 강의의 교수를 허투루 뽑았을 리 없어. 무엇보다 마족들도 그를 단순히 지휘만 잘하는 사령관으로 취급하지 않았어.’


자신은 요정이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들 마냥 일단 달려드는 수인도 아니며 자신들의 오만함에 걸려 넘어지는 마족도 아니다.
그렇기에 확실한 정보도 없고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없는 마당에 모욕을 당했다고 달려드는 미련한 짓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힘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이용해서 그를 압박할 수도 있었으니까.



‘가문에 요청해서 그를 성가시게 할 약점을 좀 찾아봐야겠어.’




결국 그도 인간이니 빈틈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멍청한 인간들조차 클라우스라는 전쟁 영웅의 틈을 찾아 후비고 쑤셔서 결국 그가 떨어져 나가게 만들지 않았던가.

반드시 그를 요정 세계로 불러오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타샤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며 서서히 타오를 준비에 들어간 불길은 전혀 눈치 채지  한 채로.



‘…뭐, 뭐야.’



결국 그 불길은 밤사이에 발화하여 나타샤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요정의 감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새벽녘부터 눈을 뜨고는 자꾸만 가슴 한 켠이 화끈거리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뭔가가 꿈틀거리며 자신을 간지럽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감기인가? 왜 이렇게 몸이 뜨거운 것 같지?’


아마 나타샤가 클라우스와 비견될 정도의 마법 실력을 가졌다면 자신 안의 마력이 잘게 요동치며 그녀를 흔들고 있음을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는 마법보다는 검술에 소질이 더 많은 여인이었다.
당연히  몸의 변화를 전혀 인지하지  했고, 그 상태로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아카데미 안에서  바탕 난리가 났을 때에도.
클라우스가 인간 귀족 교수 하나를 박살내고 마족 세계의 내로라하는 가문 중 하나인 레블랑 가문의 막내딸이 아주 처참히 패배하던 순간에도.
다른 생도들과는 달리 나타샤는 그날 하루 종일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낑낑거리며 미세하게 타오르는 불길과 싸우는 중이었다.




‘뭐야, 도대체 뭐야. 뭐야, 뭐냐고!’

설마 클라우스가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건 아니겠냐는 가능성은 꿈에도 하지  했다.
요정으로서 인간에 대해 품고 있는 우월 의식, 거기에 벨라루스의 일원인 자신이 설마 그까짓 인간에게 당했겠냐는 자만심이 그 가능성을 진작 흐트러트렸다.
그냥 잠깐 몸살이 난 것이라고, 감기에 걸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해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고 했다.
 고귀한 벨라루스 가문의 요정이 고작 감기에 쩔쩔 매는 모습을 보이면 인간 머저리들, 수인 들짐승들, 그리고 마족 쓰레기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일에 집중하는 것.
그게 나타샤가 생각하는 요정들의 고귀함이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클라우스가 집어넣은 스킬 ‘열병’ 은 지끈거리는 두통이나 쉴새 없이 흐르느 콧물, 그리고 고통을 수반하는 감기 따위가 결코 아니었다.


“흐윽, 흐으윽….”

 힘겹게 참을  있을 만큼만 몸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상태로 유지가 된다.
덕분에 나타샤는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누워서 낑낑거리면서 몸이 낫기를 바랐다.
정 못 버티겠으면 양호실에 가면 되는 데도 그녀는 요정 특유의 자존심과 고집을 부려 혼자서 이겨내 보겠다고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증상에 낑낑거린지 또 하루가 지났다.

자고 일어나니 조금은 괜찮아진 것도 같았지만 나았다고는   없었다.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미열, 차라리 몸이 아프다면 이렇게 고집을 부리지도 않겠는데 아프지는 않고 다만 표현하기 모호한 뭔가가 꿈틀거리는  전부였으니 나타샤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짜증나….’




같이 산책이나 나가지 않겠냐는 다른 요정 생도들의 제안을 물리치고 혼자 누워있던 나타샤.
그러다가 간신히 일어나서 몸을 좀 식히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누군가가 그녀 방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똑똑-.

“…죄송하지만 오늘은 물러가 주시겠어요?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요.”


까득, 덜컥!-

‘어?’


분명 문을 잠가둔 상태였는데 문고리가 그대로 돌아가면서 문이 열린다.
힘으로  것이라면 문고리가 떨어져 나갔을 텐데 그건  아니고, 마치 처음부터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는 듯 아주 부드럽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놀랍게도 요정 생도가 아니었다.


“다, 당신?”
“어제부터 묘하게 나타샤 생도가 보이지 않아서, 그리고 요정 생도들이 말하기를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정말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군요.”
“무슨 소리를… 아니, 그 전에. 나가세요. 지금 이게 뭐하는 거죠? 아무리 교수라고 해도 생도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경우는 없어요. 심지어 인간이 어떻게 요정의 영역에 함부로! 당장 나가세요. 순순히 응하지 않는다면  때는….”
“그 때는 뭐요. 날 해치기라도  겁니까?”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나타샤는 갑자기 가슴 한 켠이 별안간 확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뜨거움에 ‘헉’ 소리가 절로 나오고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같았다.



‘도, 도대체 나 왜 이러는….’

인간의 앞인데,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그 종족 앞인데, 심지어 남자 앞임에도.
나타샤는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그만 옆으로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만약 클라우스가 나서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면 정말 꼴사납게 자리에 넘어졌으리라.

“나타샤 생도? 나타샤 생도?”
“제, 제가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가주면 좋겠….”
“당신 몸이 아프든 말든 관심 없습니다. 난 대답을 들으려고 온 거니까요.”
“…네?”
“이틀 전에 내가 역으로 내민 제안. 제대로 생각해 봤습니까? 이제 딱 하루 남았는데.”
“다, 당신. 지금 그걸 물어보려고 찾아온 건가요?”
“당연하죠. 당신 같이 아름다운 요정이 내 여자가 되는 일인데 하루하루 기다리는 게 인간한테는, 남자한테는 그야말로 고문이거든.”




무슨 이런 미친 인간이 다 있어,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입을 열어보니 나오는 소리는 그런 날 선 말이 아니었다.

“하으응….”


뭐야, 뭐야.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지? 이, 이 상스러운 신음은 뭔데?!

화들짝 놀란 나타샤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이게 아니라고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늘어진  몸은 거부감을 보이는 여인이 아니라 다만 남자의 품에 안겨 귀엽게 앙탈을 부리는 모습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서있는게 힘들어 보이는데, 일단 침대로 가서 앉을까?”
“아, 안 돼… 안 돼요. 아, 안 되는데….”


화끈거리는 가슴, 간질거리는 배, 그리고 자꾸만 오므려지는 허벅지.
분명 머리로는 이게 아니다 라고 외치고 있는데 몸이 전혀 따라주지를 않는다.
심지어 언제까지고 멀쩡하리라 믿었던 자신의 이성마저도 점점 흐릿해진다.



“내 제안.”
“아, 아으으….”
“네가 내 여자가 된다. 그러면 벨라루스 가문으로 들어가는 부분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새, 생각이 아니라 겨, 결정….”
“아니지, 아니야. 네가 약속만 하고 언제든 날 걷어찰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네 몸과 마음이 전부 내 것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벨라루스로 간다고 확정하는 것도 보류해야지.”
“어, 억지. 말도 안 되는 억지… 나, 나를 바보로 보는 거….”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
인간 앞에서, 남자 앞에서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달뜬 신음이 흘러나온다.
제 몸에 분명 이상이 있음을 자각한 나타샤는 간신히 유지되던 이성으로  판단을 내렸다.



“다, 당신이구나.”
“뭐가?”
“내, 내게 이런 짓을 한 거.”
“이러 짓이라니. 내가 나타샤 생도한테 무슨 나쁜 일이라도 저질렀나?”
“당신, 당신이지? 나, 나를 이상하게 만든 거. 당신, 당신이지?!”
“아니? 나 아닌데?”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젓는 클라우스.


나타샤는 그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이 꼴로 만들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우스 교수, 이 인간이 확실하다!

‘이 빌어먹을 인간 자식! 역겨운 남자 새끼! 정신 차려, 나타샤. 움직여, 움직여! 당장 움직여서 이 인간 남자를, 당장, 당장, 당장! 그냥 확 그냥…!’


확 그냥, 안기고 싶다.
확 그냥 안겨서, 입을 맞추고 싶다.



‘어어?’



몸은 이미 머리의 제어를 벗어났고, 이성은 본능에 완전히 밀려났다.
클라우스에 대한 적의도, 경계심도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거기에 남는  열기로 가득한 욕망.


당장 안기고 싶어, 확 그냥 입을 맞추고 싶어, 나보고 제 것이 되라는  남자의 말에 따라서, 그의 것이 되고 싶어, 그렇게 하고 싶어.



‘무, 무슨 바보 같은….’

남자의 손길이 제 얼굴을 부드러이 쓰다듬는다.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어디 감히 자신을 만지냐며 으르렁거리고 위협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완전히 힘이 빠진 몸은 그냥  만져달라는 듯 저항의 의지조차 완전히 상실한 채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
“아, 아으….”
“내 제안에 대한 대답. 듣고 싶은데. 말해 줘, 나타샤.”
“나는… 나, 나는….”

싫어. 꺼져. 당연히 거절이야.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녀의 입술은, 그리고 본능은 그런 이성을 완전히 결박했다.
나타샤가 대답조차 하지 못 한 채로 다만 낑낑거리고 있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나타샤 생도.”
“네, 네. 클라우스 교수님.”
“다리 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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