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1장 - 교수입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5/341)



〈 5화 〉1장 - 교수입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뭐, 일단 나타샤 생도의 이야기는  알았습니다. 벨라루스 가문의 뜻도  알았고요.”



달그락, 달그락-.


풀떼기만 가득인 샐러드는 치워 버리고 일단 케이크부터 끝장낸다.
다음으로 꼬챙이에 꿰어져 잘 구워진 새고기를 한 입에 뜯어내 씹어본다.
적당히 익혀 육즙이 가득 배인 것이 아주 맛이 좋았다.

“그런데, 정말 그게 다입니까?”
“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이래 뵈어도 대륙 전쟁에서 서부 연합을 구원한 영웅으로 불리는 몸입니다. 우리 가문으로 와라, 그러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 뭐 그런 모호한 말은 아무 곳이나  할 수 있는 법입니다.”
“….”
“조금 더 상세하게,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나타샤 생도.”



고기를 씹어 삼킨 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요정의 푸른 눈을 응시한다.
무척이나 아름답다, 당장이라도 이 풀밭 위에 자빠트리고 저 풍만한 엉덩이를 들어 올려서 아직 순결을 잃지 않았을 여인의 몸을 탐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요정 여자로 만족할  있는 상황도 아니다.
지금 클라우스가 노리고 있는  동부와 서부를 통틀어 최고라 할 수 있는 여자였다.


“따로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나요?”
“있다고 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그것으로 전쟁 영웅을 우리 가문으로 들여올 수만 있다면요.”

그래도 생각은 해보고 말해야지, 이 여자야.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서 말을 꺼낼지 어떻게 알고.
클라우스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은  몸을 살짝 기울였다.

“너.”
“…네?”
“너를 원한다고. 나타샤 벨라루스. 네가 내 것이 되는 것. 그게  요구 조건인데.”
“….”




순간 나타샤의 얼굴에 불쾌감이  가득 차오른다.
지금 농담 하냐는, 장난 하냐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클라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이게 농담으로 보이냐는, 장난으로 느껴지냐는 반문이었다.



“진심인가요?”
“그래.”
“…하아.”

한숨을 쉬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나타샤,
그러더니 매서운 눈길로 클라우스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을 잇는다.



“전쟁 영웅이라고 해서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는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군요. 저열하기 짝이 없어.”
“왜 저열하다는 거지? 요정들은 마치 성욕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알기로 요정이나 인간이나 결국  똑같다고 하는데.”
“최소한 우리 요정들은 예의라는 것을 지킬 줄 안답니다.”
“예의를 아는 그 요정이 나를 끌어들이는데 그 따위 모호한 제안이나 하고 있나?”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 이미 그런 제안은 수도 없이 받았다.
당장 1차 대륙 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그렇게나 많이도 당한 마족 측에서조차 투항한다면 절대 당신을 버리는 일 없이 아주 귀하게 대접하겠다고 은밀히 뜻을 전해왔을 정도였다.

단순히 ‘전쟁 영웅’ 이어서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아니다.
전투 마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가 바로 클라우스, 본인이기에 원하는 것이지.

그런 인적 자원을 아무런 확실한 대가도 없이 냉큼 채가겠다니, 그것이 예의라고 할  있겠는가?

“나를 불러들여서 단물만  빨아먹고 나중에 버릴 가능성은 매우 높아.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보험은 필요한 법이지.”
“그게 저라는 말인가요?”
“굳이 따지자면.”
“…가문의 다른 여인들도 있는데.”
“네가 마음에 들거든.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꽤나 탐이 나고.”
“더럽네요.”
“남자가 여자한테 성욕을 가지는 게 더럽나?”
“전쟁 영웅이라기에 조금은 다를 줄 알았어요. 우리 요정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당신이니까. 참된 군인이라고, 믿을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렇게 듣고 배우며 자랐죠.”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었다니 그거  영광이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안타깝게도 자신은 그런 참된 군인이나 믿을  있는 인간이 아닌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연기. 눈앞의 나타샤와 같은 쟁쟁한 여자들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일 뿐이다.
그 최종 목표는 당연히 우리의 마왕님이고 말이다.



“전쟁 영웅이면 여자도, 권력도, 명예도 탐내지 않고 아무 보상이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희생하는 것인가? 이미 희생이라면 아주 넘치고 차도록 치렀는데.  강요하는 건가?”


클라우스의 말에 나타샤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그의 말과 함께 흘러나온 진득한 살기는 그렇다 쳐도 넘치고 나도록 치렀다는 그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가 잘 알고 있어서였다.

“너희에게 필요한 건 전쟁 영웅 클라우스겠지. 하지만  전쟁 영웅을 불러낼 수 있는 건 인간 클라우스 뿐이다. 전쟁 영웅을 원하거든 먼저 인간으로서 나를 만족시키도록 해. 차라리 이게 나을 텐데? 속마음을 알 수 없게 숨기는 상대는 오히려 더 골치 아프지 않나? 이렇게 속마음을 다 드러내놓고 달라는 거 주면 고민해보겠다고 말하는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타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쟁 영웅이라기에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다른 인간들과 다른  없었다.


그래서 기대가  식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정인 자신이 인간의 말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대답은?”
“….”


당연히 거부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거부하고  것이다.

 여자는 매번 클라우스가 가랑이를 벌리고 보지를 쑤셔주지 않는 이상 남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으로 무장하고 있던 여인이었으니까.
솔직히 나타샤를 제 것으로 만들  있었던 것도 스킬의 영향이 컸다.


‘뭐 어때, 어차피 적당히 먹고 적당히 쑤실 구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건 재수 없는 말만 골라 하는 요정들의 잘난 세상 따위가 아니다.’


자신이 무슨 지랄을 하든 결과는 항상 똑같다, 마족의 승리. 그리고 연합의 패배.
이걸 바꿀 수는 없다. 이 세상을 창조한 이가 정해놓은 결말답게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클라우스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마족을 이길 수 없다면,  마족을 이끄는 마왕을 먹어서 내가 뒤에 서면 그만 아닌가.




‘모든 것이 그저 마왕에게 닿기 위한 계단이고 허들일 뿐.’



그런 이유로 여유만만한 클라우스와는 달리 나타샤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 중이었다.

전쟁 영웅이  아카데미에 교수로 온다는 소식이 알려진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소문이 난 건 그만큼 ‘클라우스’ 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엄청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당장 다른 가문들은 물론이고 수인들에 심지어 마족까지 그를 노리고 있다 했어. 저 남자를 손에 넣는 자가 향후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거야. 멍청한 인간들이 그 잘난 귀족 놀음에 빠져 저런 실력자를 제 손으로 내보낸 바로 이때가 절호의 기회. 하지만….’



자신을 원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전혀 숨기지 않은, 눈동자에서 번들거리던 욕망의 눈길을 나타샤는 분명히 느꼈다.


전쟁 영웅이라기에, 연합을 구원한 인간이라고 알려져 있기에 다른 인간들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그들과 똑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문의 이익과 자신의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타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민할 시간은 조금 주도록 하겠습니다, 나타샤 생도. 사흘 후에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됩니다. 당신은  강의에 신청을 했다 하니 첫 정식 강의가 끝나는 순간까지가 내가 줄 수 있는 여유입니다.  이상 시간을 끈다면,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치잇….”



차라리 이 자리에서 빨리 결정하라고 닦달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클라우스는 자그마치 사흘씩이나 끙끙대라는 결론을 나타샤에게 안겨주었다.
왜 그가 굳이 그런  고민의 시간을 주었느냐,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스킬, ‘열병’ 이 발동되었습니다. -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길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




‘사흘이면 딱 적당하지. 요정 여자 하나가 무르익는 시간으로는.’

고민에 고민을 했으나 결국 결론은 하나.
역시 이번 회차에서도, 나타샤 벨라루스에 대한 부분은 일단 먹은 다음 생각하기로 했다.



 * *  * * *  * * * *



정식으로 아카데미에서 강의가 시작되는 건 사흘 후 부터다.

지금은 종족이 다른 생도끼리 얼굴을 트는 시간, 그리고 교수들이 자신의 뛰어남과 자신의 강의를 미래의 지배 계층인 아카데미 생도들에게 확실하네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교수들은 강의 소개 시간이 끝난 이후에도 여러 생도들의 초대를 거절치 않고 그들과 티타임을 가지며 친분을 쌓았다.


아카데미 안에서야 교수와 생도 사이지, 밖에 나가면 눈도 제대로 마주치기 힘든 이들이 널렸으니 아마 이 아카데미에 지원한 교수들 중 반 이상은 그런 목적을 위해 들어왔으리라.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런 교수들처럼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애당초 1차 대륙 전쟁의 전쟁 영웅이 남의 관심 갈구하는 것부터 모양이 심히 빠진다.
무엇보다 남이 찾아오면 찾아오지, 자신이 찾아가는 건 절대 사절하고 싶었다.
아쉬운 건 상대요, 아쉽지 않은 건 자신 쪽이니까 말이다.



‘그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카데미도 결국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설정을 해두었을까.’




차라리 어디 이세계물 마냥 생도끼리 혹은 교수와 생도가 연애하는 그런 핑크빛 가득한 아카데미 생활을  내용으로 쓸걸 그랬다.
그리 했다면 이 아카데미에 있는 A급 이상의 여성 생도들은 전부 제 것이 되었을 텐데.

단순히 기분을 돋아주는 약을 제조할  있는 연금술부터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야 하고 딱 한 명에게만 적용되긴 하지만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최면술까지.

29번의 아주 좆같은 죽음을 거치면서도 쓸 만한 스킬은 기어코 죄다 모아둔 클라우스였다.




달칵-.


 교수실의 방문을 열려고 하던 클라우스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몸을 안정시키고, 마력을 흐트러트린다.
하마터면 상대방의 기척을 눈치 챘다는 모습을 그대로 보일 뻔 했다.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숨어든 쥐새끼, 아니 아주 소중한 보물이 혹 알아차릴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품에 안고 있던 책들을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 햇빛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었다.

“그렇게 말도 없이 숨어서 기다리다가 큰일 납니다.”


흠칫-.


아직은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고사하고 아마추어 수준에도 들지 못 한다.
나중에 가서는 그 어떤 이도 저 여자의 앞길을 막을 수 없을 테지만, 전부 목이 잘릴 테지만.
최소한 지금만큼은 그저 능력  있는 마족 여인일 뿐이었다.



“딱히 적의나 이쪽에 대한 살해 의도가 느껴지지 않아 마법을 취소했습니다. 이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겠죠? 마족 생도. 방금 당신은 크게 다칠 뻔  겁니다.”
“….”
“교수인 내게  말이 있으면 내 앞에서 직접 말하면 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입니다. 한번만 더 이렇게 숨어들면 그 때는 교수의 권한으로 불이익을 주겠습니다.”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한 후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직후 며칠 후에 있을 강의를 위한 자료를 살피듯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책과 종이 뭉치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제 일에 집중했다.

“….”

덕분에 난감해진 것은 몰래 교수실에 숨어들었던 마족 생도.


몰래 숨어든 것을 들켰다, 잠행이 발각되었으면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는 게 옳다.
허나 이대로 물러나자니 이런 위험한 짓을 벌이면서까지 강행한 이유를 달성하지 못 했다.

원래 자신의 계획은 이렇게 숨어든 자신을 교수가 이쪽의 정체를 묻고 그러면 자연스레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정작  교수는 ‘한  봐줄 테니 얼른 나가라.’ 라는 말을 끝으로 자신에게서 관심을 꺼버렸다.

정말 자신에게 살의를 품은 마족일 수도 있는데.
그가 수도 없이 죽인 적국의 인물이 다른 곳도 아니고 제 방에 숨어들었는데.
적의를 풍기기는커녕 경계조차 하지 않는다.



“…남부의 악마.”

결국 마족 생도는 자신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 입을 열어 자신의 정체를 보였다.
물론 클라우스는 진작부터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큰 의미는 없는 짓이었다.



“그 호칭은 마족들도 너무 오글거린다 하여 부르지 않던데.”
“당신은 여전히 그렇게 불립니다. 우리 젊고 어린 마족들 사이에서 말이에요.”
“영광입니다, 라고 답해야 할까요? 아니면 사과라도 해야 할까요.”
“….”
“분명 못  척  테니 조용히 나가라고 했을 텐데 이해를  한 건지, 아니면 말을  듣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교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정당한 이유에서 나오는 정당한 명령이라면 더더욱요. 여기는 내 방입니다. 생도, 당장 나가세요.”



우웅-.


이번에는 말로 끝내지 않겠다, 라는 듯 클라우스의 옆에 마력이 생성되었다.
이대로 손 한 번만 까딱이면 바로 상대방에게 날아들어 치명상을 가할 것이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투 마법 강의의 클라우스 교수님.”


하지만 마족 생도는 꿋꿋하게 제 말을 꺼내놓았다.
다른 자가 그따위 오만한 행보를 보였다면 그 즉시 바로 마력을 쏘아 보냈을 테지만 클라우스는 이번만큼은 그리하지 않았다.

눈앞의 생도, 저 마족 여자는 자신이 원하던 그 여인, 최고의 여자였으니까.

“이름이 무엇입니까, 생도?”

거칠게 쫓아내는 대신 부드럽게 이름을 묻는다.
마족 여인은 아주 미미한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율리아 아그네사.”




율리아, 율리아 아그네사.


그녀의 정체는 후일 2차 대륙 전쟁에서 서부 연합을 박살내고 대륙을 통일하는 동부 마족들의 군주, 마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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