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1장 - 교수입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 스킬, ‘죽음 끝의 깨달음’ 으로 인해 회귀할 대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
마침내 맞이한 죽음. 이것으로 29번째 죽음이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상쾌했다, 심지어 후련하기까지 했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미 28회차에서 부터 마왕을 공략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29회차까지 와서 또 죽음을 맞이한 것은, 단순히 그녀를 손에 넣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꽉 쥐고서 감히 벗어날 생각조차 못 하도록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기 위해 갖가지 경우의 수를 시험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주 사소한 것까지 속속들이 전부 파악했다.’
고귀하신 마왕님이 사실은 낮이밤져라는 것부터 성감대 하나, 하나까지 전부 알아냈다.
그녀가 어떤 타입의 상대방을 좋아하고, 또 어떤 놈을 싫어하며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씻을 때에는 어디부터 씻으며 자신도 모르게 보이는 아주 사소한 습관까지.
이번 회차만큼은 반드시 성공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를 끝마쳤다.
“1차 대륙 전쟁이 벌어진 직후, 부모 친척 없이 전장에 투입된 평민 병사.”
- …확인 결과 기본 단위가 십만을 넘습니다. -
“상관없어. 그 중 아무나 지정한다.”
어차피 스킬 ‘변환’ 덕분에 용모고 체형이고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이미 마왕이 어떤 스타일의 이성을 좋아하는지조차 전부 알고 있었기에 그에 맞춰서 모든 걸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였다.
- 요청한 대로 진행합니다. 회귀를 시작합니다. -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의 시체, 반투명하게 보이던 세상이 점점 흐릿해져 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지극히 평범했던 평민 병사의 몸으로 회귀한다.
그 후 여태까지 쌓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전쟁 영웅이 되고, 그 후 밀려나서 아주 자연스레 마왕을 만나러 가면 된다.
다른 매력적인 여인들도 많은데 왜 하필 마왕, 그녀냐고?
‘어차피 마족이 무조건 이기는 엔딩이야. 그러면 줄을 잘 서야지. 마왕 뒤에 서서 은밀하게 조종하는 놈이 인간이라. 웃기잖아? 그리고 아무리 따먹어도 질리지가 않았거든. 그 여자.’
반복된 죽음, 그만큼 반복되는 회귀,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
그 모든 게 겹치니 정신머리가 조금 이상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미소를 지으면서 점차 선명해지는 빛으로 나아갔다.
이 세상에서 나갈 수 없다면 최선을 다 해서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왕 살아가야 할 거, 대륙 최강이자 최고인 여자가 내 것이면 더 좋고.
* * * * * * * * * *
탁, 탁탁-.
칠판 위에 ‘전투 마법 강의’ 라고 큼지막하게 적어둔 클라우스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이름은 그 옆에 적을까, 아니면 밑에다가 적을까.
그도 아니면 아예 적지 말고 여기에서 마무리를 지을까.
잠시 동안 고민하며 턱을 쓰다듬는데 강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달칵-.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던 생도들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기색을 띤 채 안으로 들어왔다.
원래는 쉬는 시간에 먼저 들어와서 자리에 앉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클라우스가 너무 진중한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고 있으니 어느 누구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 했던 모양.
아마도 보다 못 한 인간 생도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클라우스는 강의 신청을 하는 첫날부터 생도 하나 없는 빈 강의실을 마주할 뻔 했다.
한 명이 자리에 앉아서는 클라우스를 응시하자 그제야 밖에 있던 생도들도 강의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하나 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클라우스는 역시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녀가 내 강의에 들어오는 건 이 다음부터였지. 원래는 자신의 숙부가 짜준 강의대로 움직여야 했음에도 호기심을 느끼고 몰래 강의를 바꿨으니까.’
허나 그녀가 없다고 해서 설렁설렁 할 수는 없다.
동부 전체를 아우르는 마족들, 그 정점에 서는 여인.
그렇기에 어디 한 군데 허투루 하는 것이 없는 상대가 바로 마왕이다.
여기서 못난 평을 받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제 명줄 깎아먹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다들 들어왔다면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생도가 문 좀 닫아주세요. 자, 제 강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생도 여러분. 제 강의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전투 마법을 가르치는 걸 주로 하며….”
강의를 맡은 교수로서 자신의 강의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질서정연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가장 민감해 할 부분, 바로 시험에 대해서 운을 떼었다.
“시험은 중간에 한 번, 그리고 학기 말에 한 번. 필기 없이 일체 실기로 대신할 것입니다.”
필기가 없다는 말에 서부 연합 측의 생도들, 특히 인간 생도들이 한숨을 내뱉었다.
반대로 동부에서 온 마족 생도들은 오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상대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이상하게 목숨을 거는 마족이었기에 그런 자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간 생도들이 적지 않은 부담을 받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어. 나도 필기는 영 젬병이라서.’
시작부터 몸으로 부딪쳐 이 수라장을 돌파했던 자신이다.
필기를 얕보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말이나 글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뭔가가 있다.
지금 이 전투 마법이라는 것이 그 중 하나라고 클라우스는 생각했다.
백날 말하고 설명하고, 그걸 글로 적고 외워서 마스터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부딪치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서 들이받고 그러다가 또 된통 당해보고.
전투 마법은 ‘마법’ 이 아니라 ‘전투’ 가 중점으로 조성된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딱 하나, 내가 살고 적이 죽으면 된다.
그걸 얻는 가장 쉽고 빠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은 몸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번쩍-.
인간 생도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딱 봐도 귀족들의 특권 의식이 덕지덕지 붙은 청년이었는데 무슨 말을 하려고 손을 들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비록 전투 마법 강의이긴 하나 결국 마법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마법에서 필기시험을 치르지 않는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과연 필기시험을 치르지 않아서 가지는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궁금증일까, 아니면 귀족으로서 평민에게 가지는 일종의 우월주의에서 나오는 단순한 태클질 일까.
클라우스는 한 열에 아홉은 후자가 아닐까 생각하며 일단은 미소를 지은 채 그에 답했다.
“혹 제 방식에 불만이 있다면, 강의실에서 나가면 됩니다.”
“….”
클라우스의 말에 귀족 생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제 딴에는 시작부터 다른 생도들에게 괜찮은 인상을 남겨두려고 했던 모양인데 교수가 그걸 원천봉쇄하고 무안함까지 안겨주니 그럴 만도 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에 의문을 품는다면, 제 언행에 불쾌함을 느끼신다면 이 강의를 듣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전투 마법 강의는 어디까지나 전투에서 사용될 마법을 가르치는 것이지, 마법을 두고 토론을 벌이거나 수식을 연구하는 강의가 아니니까요.”
그 말에 생도들 사이에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이곳 대륙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생도들은 보통 생도들이 아니다.
기본이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며 심지어 왕족이나 황족도 있다.
제아무리 교수들이라고 해도 향후 대륙의 모든 것을 손에 쥘 자들을 상대로 저런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좋을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클라우스의 바로 그 다음 말에 강의실은 일대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군요. 왜 제가 가르치는 ‘전투 마법’ 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라 지극히 객관적인 의견으로서 여기 있는 생도 누구보다도 전투 마법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대륙 전쟁에서 위기에 빠진 서부 연합을 구한 이가 누구인가.
그 무시무시한 동부의 마족들조차 악마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남자는 또 누구인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두는 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전쟁에 한 번도 참전한 적 없는 애송이들도, 특권 의식에 찌든 쓰레기들도 전부 다.
“본격적인 강의는 사흘 후부터입니다. 제 강의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이며 전투 마법 강의를 수강하실 생도는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종족을 적어주시면 되겠습니다. 혹 더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질문해도 좋습니다. 물론, 무례한 의도의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대놓고 인간 측의 귀족 생도를 저격하는 발언이었다.
덕분에 또 한 번 얼굴이 붉게 물드는 생도였으나 어찌 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은 생도이고 상대방은 교수라서,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참은 게 아니다.
‘주제 파악은 하는 거지.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놈이 마족들한테 악마라 불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래서 그 고생을 해가면서 1차 대륙 전쟁에서 전쟁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만 대도 인간이고 요정이고 수인이고 마족이고 함부로 하지 못 하니까.
귀족이든 왕족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눈치를 한 번은 살펴야 하니까 말이다.
‘물론 특권 의식에 찌든 머저리 사상을 기어코 못 버려서 2차 대륙 전쟁에서 폭망하긴 하지.’
이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도 약빨이 다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간은 망각의 종족이라고 했고 또한 볼일 급할 때와 볼일 다 보고 난 후의 모습이 다른 게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도 평민 출신의 군부 세력은 계속해서 숙청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에는 자신처럼 그래도 명예롭게 퇴역한 것이 아니라 여러 죄목으로 잡혀 들어가서 모진 고초를 겪거나 심하게는 죽는 경우도 있었다.
클라우스 본인도 너무 나대다가 결국 감옥에서 죽은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한 여성 생도가 조심스레 손을 든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 청록색 눈동자, 화려하게 잘 빠진 몸, 눈에 확 띠는 외모, 뾰족한 귀.
상대방이 요정임을 확인한 클라우스는 ‘혹시?’ 하는 마음에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곧 그 요정 생도가 자신이 아는 그녀임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질문이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부분이긴 합니다만 또 모두가 궁금해 할 수도 있는 부분이라서요. 대륙 전쟁의 말기에 일어난 메라 대전에서 어떻게 승리를 확신하셨던 겁니까?”
“강의와 관련이 있는 질문이면 참 좋았을 텐데요.”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마왕만큼은 아니어도 여성 요정 생도, 나타샤 벨라루스도 나름 괜찮은 트로피였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 반드시 득이 되었던 상대였으니 이번 생에서도 적당한 친분은 이득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타샤 벨라루스입니다.”
“좋아요, 나타샤. 그렇다면 메라 대전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해보세요.”
“대륙 전쟁 말기 가장 중요했던 남부 방어선이 돌파 당하고 마족들이 승리를 굳히기 직전 1천 여 명의 병력으로 메라 지역에서 3만이 넘는 마족들을 저지한 전투입니다. 대승을 넘어 기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죠.”
메라 대전의 설명에 인간들을 주축으로 하여 요정, 수인 생도들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륙 전쟁에서 유명한 전투를 꼽으라면 무조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전투.
의외인 것은 마족 생도들의 반응이었는데, 메라 대전에서 패배한 그들이기에 매우 불쾌하게 여겨야 하는 그들조차 묘하게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머지않아 곧 밝혀졌다.
“당시 군을 지휘하여 그런 기적적인 승리를 이끄신 분은, 제 앞에 계시는 클라우스 교수님이셨죠.”
그 기적적인 승리를 연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저들은 모르겠지.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 미소가 생도들에게는 전쟁 영웅이 그 당시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지금도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마법 활용의 압도적인 우위, 지형의 유리함, 마족들의 방심까지. 하지만 지휘관의 역량 차이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지휘관들은 후퇴를 했을 테니까요. 도대체 클라우스 교수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으셨기에 메라 대전에서 승리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29번쯤 죽으면 이제 죽는 거에 무감각해져서?
거기에 이미 몇 번이고 겪은 일이기에 그림이 척척 그려져서?
이게 아마 가장 진실에 근접한 대답일 테지만 이걸 믿는 이는 단 한 명도 없겠지.
“글쎄요.”
어쩌면 서부 연합 출신의 생도들은 은근히 마족들의 부족함을 이야기하는 답을 듣고 싶어 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생도들 사이에 동부와 서부, 마족과 연합을 두고 조용히 대립하는 그림까지 조금씩 그려지고 있었다.
그런 때에 전쟁 영웅인 자신이 서부 연합의 대단함을 언급하고 동부 마족들의 치욕적인 패배를 언급하며 정신 승리라도 좀 하고 싶은 것일까?
‘미안하지만.’
자신은 이미 연합 측에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하늘이 도왔을 뿐입니다.”
연합의 승리를 인정하되 마족들을 자극하지 않는 선의 대답.
그걸 끝으로 클라우스는 오늘은 이만 마치겠다는 말로 생도들을 일으켜 세웠다.
테이블 위에 종이를 올려둔 그는 강의를 들을 생도들은 이 종이에 이름을 적으면 된다고 재차 말한 후 먼저 강의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