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엘프란디아
* * *
그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툭하고 갑자기 어깨에 무게가 실렸다. 뭔가 싶어 보니 어느새인가 카렌이 네토루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곤히 잠든 카렌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근처에 있던 세레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카렌이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그러게.”
“제가 없는 사이에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애가 울다 들어오던데.”
“···그냥. 카렌한테 내가 나츠오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어.”
“아···.”
네토루의 대답에 세레스는 탄성을 흘렸다. 밖에서 둘이 그런 약속을 했던 것인가.
방금 전에 네토루가 나츠오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해주었기에, 세레스 역시 지금은 기생충에 대한 존재 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아직까지 다른 부대원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상황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탓에 혼란만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상황이 안정되면 다른 부대원들에게도 나츠오의 상태에 대해 알릴 것이다.
“나츠오가 버그한테 조종당하고 있었다니···. 저는 생각도 못했네요.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마 데스 웜이 프라시온을 공격할 때 당한 거겠지. 버그들이 나츠오와 접촉할 수 있던 건 그때밖에 없었을 테니까.”
“···오래 안 됐겠군요.”
근처에 있으면서도 나츠오가 버그한테 기생당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카렌이나 네토루도 마찬가지일 터. 알고 있었으면 나츠오를 가만히 놔두었을리가 없다.
“그런데 나츠오는 자신이 버그한테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던 걸까요? 주변에 도움이라도 요청했으면 좋았을 텐데···.”
“글쎄···. 버그한테 사고 유도라도 당한 게 아닐까.”
“사고 유도요?”
“기생충이라면 제일 먼저 숙주의 사고부터 조종하려고 들 테니까.”
굳이 버그뿐만 아니라 자연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숙주를 물가로 움직이게 만들거나, 기존에 하지 않던 행동을 인위적으로 시키는 것. 숙주의 몸에 기생을 시작하는 순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숙주의 행동을 조종하는 것이다.
라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 식으로 엘프들도 많이 당한 모양이다. 실제로 ‘레인저’들이 단체로 버그들에게 생포된 이유가 갑작스러운 동료의 배신 때문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하나둘씩 기생충에게 사고를 유도당하다가 끝내 제대로 된 사고도 할 수 없도록 몸을 완전히 빼앗기는 것이다. 라온이나 그녀의 남편이 인형처럼 영혼 없는 눈동자가 된 것은 그래서겠지.
“그런데 과연 우리가 나츠오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애초에 그 기생충이라는 걸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그렇다고 마냥 손 놓을 수는 없잖아.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시도는 모두 해봐야지. 마침 이쪽에는 버그에게 조종당하는 엘프가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네토루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 있던 카렌을 끌어안아, 근처에 남아 있던 병실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카렌을 달래던 네토루는 현재 라온과 그녀의 남편이 있는 병실에 돌아온 상태였다.
라온에게 시도해볼 게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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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이 말하길. 기생충은 자신의 마력 신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녀의 마력 신경계에 접속하면 기생충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 엘프의 마력 신경계를 당신이 직접 확인해보겠다고요?”
“그래. 잘하면 기생충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네토루는 잠들어 있는 라온의 곁에 섰다. 현재 그녀는 부대에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슈트를 입은 채 잠들어 있다.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와 자연의 색을 그대로 새겨넣은 듯한 아름다운 녹빛 머리카락. 잘 보면 확실히 ‘인간’ 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풍취가 완전히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게 신기했던 네토루는 라온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해보았다.
사실 네토루도 엘프를 직접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전에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그때는 모두가 성기병을 타고 있던 모습뿐.
“너무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잠들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계속 얼굴을 쳐다보고는 있는 네토루가 불편했던 걸까. 옆에 있던 세레스가 눈을 샐쭉이 뜬 채 그리 투덜거렸다.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의 말에 피식 웃고는 말했다.
“···세레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 유부녀야.”
“······유부녀요?”
“그래. 옆에 있는 남자 엘프가 남편이지.”
“···남편.”
네토루의 말에 세레스의 눈이 라온의 옆 침대에 있는 카르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꼬리를 당겼다.
“흐응···. 그래요? 유부녀라면···.”
····안심해도 괜찮겠죠.
“뭐?”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뭐라고 말했냐고 네토루가 쳐다보자 세레스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쓰윽 피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더니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세레스. 나 좀 도와줘야 할 거 같은데.”
“어떤 걸요?”
“일단 슈트부터 벗겨야 할 거 같거든. 이걸 입고 있는 상태로는 마력 신경계에 접근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저를 불러왔던 거군요?”
“뭐···. 그렇지. 내가 직접 벗길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죠. 어쨌든, 그러면 당신은 잠시 뒤 돌아보고 있어요. 준비되면 말할게요.”
네토루가 세레스의 말대로 뒤를 돌아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라온의 슈트를 벗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 신경계 각인만 드러나면 되는 거죠?”
“응.”
“음. 알겠어요.”
부스럭부스럭···. 무언가 이불자락을 끌어올리는 소리 따위가 들려오더니 세레스가 말했다.
“됐어요. 이제 등 돌려도 돼요.”
“······”
돌아섰던 몸을 돌리자 슈트가 벗겨진 상체를 이불로 가린 채, 아랫배에 있는 마력 신경계만 드러내고 있는 라온의 모습이 보였다. 골반 아래쪽으로는 벗겨지다 만 슈트가 그대로 있었다.
“이거면 되는 거죠? 혹시 더 벗겨야 하나요?”
“아니, 이거면 충분해.”
어차피 마력 신경계만 드러나면 그만이다. 네토루는 노출된 라온의 마력 신경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따스한 온기와 함께 매끄러운 피부결이 손가락 끝에서 선명히 느껴졌다.
아무리 라온한테 남편이 있다고 하지만 겉으로만 보면 20대 후반 정도의 젊은 여인처럼 보인다. 엘프들은 유독 잘 늙지 않은 편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보다 엄청나게 오래 사는 건 아니지만, 종족 특성상 늙는 게 크게 티가 안 난다.
그러면 라온의 실제 나이는 몇 살인 걸까. 아마 대략 30대 후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러한 생각을 가지며 라온의 마력 신경계에 손을 얹고 네토루가 의식을 집중할 때였다. 옆에서 세레스가 중얼거렸다.
“···마력 각인 말고 이상한데 만지면 안 돼요? 옆에서 제가 지켜볼 거니까.”
“···세레스. 날 어떻게 보는 거야. 내가 자는 사람을 희롱할 정도로 막 나간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믿고 있어요. 그냥 혹시 모르니까···.”
세레스도 방금 자신의 태도가 이상했다는 걸 아는 건지 고개를 살짝 틀고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런 세레스의 반응에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날 케레네와 같이 잠자리를 가진 이후로 세레스의 행동거지가 하나둘씩 바뀐 느낌이 적지 않게 있었다. 혹시 둘 사이에 뭔가 있던 걸까.
···아무튼, 네토루는 눈을 감고서 라온의 하복부에 올려놓은 손을 통해 라온의 마력 신경계에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듯 천천히 마력이 뻗어 나간다. 이윽고 네토루는 라온의 몸 안에 있던 마력 신경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당연하지만 엘프족의 마력 신경계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역시 종족이 달라서 그런 것일까. 네토루가 알던 기존의 설계들하고는 구조가 너무 다르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새로운 마력 신경계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들을 한 차원 더 끌어올려준 귀한 지식들이었다. 더욱이 평범한 파일럿도 아니고, 레인저의 마력 신경계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라온의 마력신경계를 하나도 빠짐없이 머리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분명 카렌이나 세레스의 마력 신경계를 개발할 때 큰 도움이 될 터. 특히 카렌의 경우에는 레인저 특유의 은밀 기동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헌데, 그러던 중이었다.
─────!
“······이건.”
라온의 마력 신경계를 더듬어 올라가던 네토루가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정체 모를 오싹함이 등줄기를 가로지르더니, 사아악. 하고 벌레들의 울음소리 같은 게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만약 이게 처음이었다면 그저 환청이었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네토루는 이걸 이미 경험해본 적이 있다. 그건 분명 예전에 병실에 있던 나츠오의 몸을 확인하고 회복을 도와주려고 했을 때였다.
“······”
그걸 깨닫자 네토루의 얼굴이 굳었다.
역시 그때부터 이미 나츠오의 몸 안에 버그가 있던 건가. 분명 기회는 있었는데 네토루는 그걸 꺠닫지 못하고 놓치고 만 걸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강한 분함을 느끼면서도 네토루는 방금 느낀 버그의 기척을 찾아 라온의 마력 신경계를 세밀하게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방금 그건 우연이었다는 것처럼 그가 숨어 있는 버그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그 이유가 뭘까 싶던 네토루는 곧 답을 내렸다.
라온의 마력 신경계를 더듬고 올라가는 네토루의 마력을 피해 계속 버그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라온의 마력신경계에 좀 더 긴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렇게 외부에서 접근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아무래도 이걸로는 안 되겠는 걸. 라온하고 마력 패스를 만들어야겠어.”
“마력 패스요?”
“응.”
네토루는 라온을 향해 조심스레 몸을 굽힌 채 고개를 움직였다. 방향은 라온의 입술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세레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네토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네? 자, 잠시만요···. 지금 그래서 저 엘프랑 입이라도 맞추겠다는 건가요···?”
“···그래야 할 거 같은데.”
네토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스는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한 채, 쥐고 있던 네토루의 옷자락을 강하게 잡아당기고는 말했다.
“카, 카르곤···. 씨라고 했던가요? 일단 혹시 모르니까, 그 사람도 한 번 확인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