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엘프란디아
* * *
#
“이런···. 큰일 났군요······.”
식은땀을 흘리던 라온은 자신의 아랫배를 꾹 누르며 분한듯 입술을 깨물었다. 느껴진다. 방금까지 가만히 있던 것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몸 안쪽의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는 듯한 불쾌감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라온은 어떻게든 최대한 기생충의 움직임을 억제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저항은 힘들었다.
이미 몸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던 괴물이다. 오히려 라온의 저항을 비웃듯 괴물의 맥동이 강해지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제 몸 안에 있던 기생충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네?”
리엔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라온을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제39구역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탓에 제대로 이야기 들을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현재 엘프들이 기생충한테 조종당하고 있다는 이야기 정도는 리엔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 그러면···. 다시 기생충한테 조종당하게 되는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점점 안색이 안 좋게 변해 가는데 가운데,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라온은 고개를 들며 리엔에게 말했다.
“···리엔 사령관님. 죄송하지만 지금이라도 저를 제압해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압···이요?”
“네···. 아무거나 좋으니 마법으로 저를······!”
라온의 다급한 목소리에 리엔은 입술을 깨물며 고민해야만 했다. 제압이라고 해도···. 도대체 어떤 마법을 사용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리엔이 마법사라고 해서 대인 마법 같은 걸 두루 익힌 건 아니었다. 사령관이라는 건 결국 파일럿들을 보조하기 위한 존재였으니까.
그렇다 보니 리엔의 모든 마법 능력은 관측에 집약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공격 마법 같은 걸 아예 익히지 않은 건 아니다. 적어도 자기보호 수단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다만 문제는 리엔이 다룰 수 있는 공격 마법들은 모두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닌 죽이기 위한 살상용 마법이라는 점이었다.
섣불리 공격 마법을 사용하면 라온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면 곤란하다. 그녀는 엘프란디아의 사정을 알려줄 중요한 협력자니까.
그렇기에 찰나의 고민 속에서 리엔은 소극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 마법이 아닌 기초적인 수준의 원소 마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판단을 끝낸 리엔은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서 주변의 공기가 모여들며 뭉쳐 들기 시작했고, 리엔은 압축된 공기를 그대로 라온에게 쏘아 보냈다.
────!
이윽고 마법에 맞은 라온의 몸이 튕겨날아가더니, 벽에 등을 부딪치며 축 늘어졌다. 그것은 누가 봐도 의식을 잃은 모습이었다.
기절한 듯한 라온의 모습에 리엔은 안도했다.
“후우···. 이거면 됐겠죠······. 어?”
하지만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리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어느새인가 고개를 든 라온이 리엔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온의 눈동자에는 온기가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미건조한 눈동자. 그 눈을 보고서 리엔은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라온의 껍데기를 쓴 무언가다.
기생충한테 조종당한다는 게 저런 소리였나.
그 의미를 리엔이 제대로 깨닫던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라온은 몸을 벌떡 세우며 땅을 박찼다.
그 순간 건조한 눈동자에는 오로지 날카로운 살의만이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한 시선에 리엔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다른 부대원들이 알면 한심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리엔은 지금까지 누군가랑 몸으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리엔의 육체 능력은 어린 애들 수준일 정도로 형편없었다.
항상 아이기스 안에서 버그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입장상 육체를 수련할 시간도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으윽?!”
그렇게 리엔이 라온을 피해 다급히 뒷걸음칠 때였다. 너무 다급했던 탓에 리엔은 몇 걸음 못가서 다리가 꼬여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리엔을 노리고 라온은 인정사정없이 달려들었다.
“흐윽?!”
최악이다.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이를 악물면서도, 리엔은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리고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오는 아픔은 없었다. 대신 털썩하고 무언가가 힘없이 쓰러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 소리의 정체 뭔가 싶던 리엔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리엔에게 덤벼들던 라온을 기절시킨 채, 천천히 바닥에 눕히고 있는 네토루의 모습이 보였다.
“사령관님. 괜찮습니까?”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상대방을 걱정하는 따스함. 멍하니 그 목소리를 듣던 리엔은 눈을 꿈벅였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건지 네토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령관님?”
“아···. 예? 아···. 저는 괜, 괜찮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엔이 어색하게 웃고는 엉덩에 묻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토루. 그런데 라온 씨가···.”
“···아무래도 몸 안에 있는 버그가 깨어난 모양이군요”
네토루는 착잡한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일단 의무실로 데리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
의식을 잃은 라온은 수면 마법이 부여된 상태로 병실로 옮겨졌다. 마침 라온의 남편인 카르곤 또한 병실의 침대 하나를 차지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부대에 복귀했을 때 아스나의 도움을 얻어 수면 마법으로 재웠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성이 있는 존재에게는 수면 마법이 잘 통하지 않지만, 버그한테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인지 두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황이 해결되면 다시 확인하러 오겠습니다. 아직 제가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라서요.”
리엔은 라온이 잠든 걸 보고는 다시 아이기스로 돌아갔다. 여전히 제39구역에서는 버그들과 치열한 전투가 진행 중이다. 그녀의 말대로 사령관이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었다.
물론 도시 안에 있는 리엔이 저 멀리 있는 제39구역의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건 사실상 거의 없다.
하지만 방금 처럼 레인저들이 언제 다시 침투할지 모르기에 계속 관측을 유지해야만 했다. 레인저들의 특성상 사령관의 관측 영역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침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실제로 393부대원들은 현재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도시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다. 레인저가 관측되면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가 만약 정말 전투가 일어나면 네토루 역시 당장 출격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네토루. 그러니까 나츠오도 지금 라온 씨처럼 버그한테 조종당하고 있다는 소리지?”
의무실에서 같이 라온을 지켜보던 카렌이 말문을 연 것은 네토루에게 기생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원래는 상황이 정리되면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아이기스 안에서 버그에게 조종당하는 라온이 리엔을 공격하는 모습을 카렌도 같이 보았기에 어쩔 수 없이 설명해주었다.
“아마, 그럴 거야. 나츠오를 데리고 레인저도 똑같이 버그에게 조종당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래?”
역시 충격이 큰 걸까. 카렌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입술을 꽉 다문 채, 우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나츠오를 데리고 간 레인저를 놓친 상황이었다.
어쩌면 지금쯤이면 버그들과 합류했을지도 모른다.
“···네토루. 나츠오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까?”
“글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만약 계속 버그한테 조종당하면 어떻게 해? 라온 씨도 제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조종당했잖아.”
“그건···.”
네토루가 말끝을 흐리자 카렌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설마 나츠오랑 싸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나츠오가 오늘 나타난 엘프들처럼 갑자기 성기병을 타고 적으로 나타나면···.”
“······”
“나···. 그거 정말···. 싫은데···. 그것만큼은···.”
울음기 섞인 카렌의 목소리에 네토루는 침묵했다.
나츠오를 데리고 간 버그들은 과연 그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할까. 그러한 의문 속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카렌이 문으로 향하자 네토루가 물었다.
“카렌. 어디 가는 거야?”
“그냥···.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렇게 카렌이 병실에서 사라지자, 네토루는 고개를 돌려 병석에 있는 라온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부대에 오면서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여자였다. 언제 자신이 변할지 알 수 없다면서 말이다.
그녀는 계속 제 몸 안에 있는 기생충을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라온은 부대에 복귀하는 동안 네토루에게 엘프란디아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다시 버그한테 조종당할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라온에게 들은 이야기로 판단해볼 때.
아마 나츠오 하고는 정말 성기병을 타고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문제는 그 이후다.
나츠오를 쓰러뜨리고, 그 이후에 그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가능한 것인가?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기생충을 죽일 방법인가.”
네토루는 의식이 없는 라온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라온이 말하길. 기생충은 자신의 마력 신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제정신을 차릴 수 있던 것도 성기병이 파괴되며 찾아온 반동 때문이라고 했으니···.
그러면 마력 신경계를 확인해보면······.
“······”
한 번 시험해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전에 네토루는 잠시 한숨을 푹 쉬며 등을 돌렸다.
병실에서 나간 카렌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밖에서 또 하염없이 울고 있겠지.
···네토루는 이번 일로 카렌이 우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았다.
#
밤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뜨거워진 눈시울은 식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발코니에 나와 있던 카렌은 멍하니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나츠오가 기생충에 감염된 것 같다라.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의 말은 어딘가 현실감 없게 느껴지고 있었다. 총과 포탄을 쏘아대는 버그들에게 사람의 몸을 빼앗는 능력까지 있던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네토루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카렌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비정상적인 나츠오의 모습을 말이다.
게다가···. 그때 나츠오의 몸을 빼앗고 있던 정체 모를 괴물이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이거, 너무 빨리 들켰군. 역시 소꿉친구라는 건가? 생각보다 눈치가 좋아.
그것은 분명 나츠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하는 어투와 태도는 결코 나츠오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나츠오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불쾌한 무언가.
카렌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던 건 그래서였다. 아무리 겉모습이 나츠오라도 그 내용물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면 의문이다.
─카렌···.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참아···. 분명 괜찮을 거니까? 응?
과연 그때 방에서 내 옷을 강제로 벗기고 있던 건 나츠오의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버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걸까.
─···그러니까 더 포기할 수가 없잖아. 어떻게 너를 다른 남자한테 주겠어.
삐뚤어진 감정. 삐뚤어진 생각.
“······”
카렌은 손을 뻗어 자신의 목덜미에 감겨 있는 붕대를 매만지며, 자신의 목을 조르던 나츠오의 얼굴과 눈빛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카렌은 방안에서 보았던 나츠오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서 기억이 안 나기보다는···. 그냥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분명 카렌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남자아이한테 말이다.
그 일을 다시 회상하자니 몸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떨렸다. 숨이 막히며 팔다리가 저릿해진다. 머리와 몸이 방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이윽고 시야가 어지럽혀지며 카렌의 숨소리마저도 흐트러지던 그때였다.
탁.
“······!”
카렌은 별안간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붙잡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싶어 보니 빛이 바랜듯한 금색 머리카락 사내···. 네토루였다.
“···네토루?”
그런데 카렌이 그의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이었다.
꼬옥···.
“아앗? 자, 잠시만···.”
카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네토루가 카렌을 자기 품 안에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가, 갑자기···. 뭐야··· .이게?”
“카렌.”
네토루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하던 카렌의 머리 위에 턱을 올리며 속삭였다.
“···걱정 마. 나츠오는 내가 어떻게든 구해줄게.”
“······”
그것은 한없이 진지하고 결연한 목소리.
덕분에 그의 품속에서 바둥거리던 카렌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멈추었다.
대신 카렌은 그의 옷자락을 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걱정 말라니···. 항상 네토루는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그는 카렌에게 걱정 말라고 했다.
하지만 카렌은 알고 있다. 네토루는 말을 가볍게 꺼내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지금 그가 어떤 각오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말이다.
지금 이렇게 따라와서 품에 안아주고 있는 것도 계속 울고 있는 내가 걱정되기 때문이겠지. 괜스레 그 사실이 카렌을 더욱 흐느끼게 만들었다.
“걱정 말라니···. 정말, 믿어도 돼?”
“물론.”
네토루의 대답에 카렌은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다. 이렇게 내가 울보였던가.
벌써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을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한 사람 앞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네토루의 품속이 안심되고, 편안해서 오히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정지한 듯한 풍경 속에서.
카렌은 네토루의 품속에서 중얼거렸다.
“···응. 믿을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