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46화 (146/148)

〈 146화 〉 엘프란디아

* * *

다행히 목숨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다시 일어나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기에 네토루는 라온의 남편 ­ 카르곤을 임시방편으로 포박해두었다.

그 후에 라온은 근처에 쓰러져 있던 다른 레인저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혹시라도 자신처럼 깨어난 엘프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역시 모두 죽었군요.”

라온은 파괴된 성기병의 콕피트 안을 살펴보고서는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다른 레인저들이 살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확인해본 콕피트 내부의 상태는 처참했다.

전투 중에 네토루가 망설이지 않고 일격에 콕피트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성기병을 멈추는 제일 간단한 방법은 결국 파일럿을 죽이는 것이었다.

“미안하군. 만약 버그한테 조종당하는 걸 알았다면 제압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을 텐데.”

“···아니요. 죄송해하실 거 없습니다. 당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네토루의 사과에 라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사를 봐줄 수 없는 긴박한 전투였다. 애초에 네토루 혼자서 성기병 2기를 상대해야 하지 않았는가. 그런 상황에서 제 동료들을 죽였다고 원망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라온은 콕피트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동료들의 눈을 감겨주며 말했다.

“오히려 죽은 제 동료들은 당신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덕분에 대수림에 있을 동족들의 목에 칼날을 겨누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실제로 라온은 네토루를 원망하기는커녕 반대로 감사하고 있다. 덕분에 버그들에게 조종당하던 동료들이 해방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라온 본인이었어도 네토루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라온은 흐릿한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그것은 깊은 심해 아래에 처박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괴롭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

그 흐릿한 기억들을 떠올려보던 라온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원래 레인저라는 것은 숲을 지키기 위한 존재였다.

하지만 조종당하는 동안 라온은 이 손으로 직접 수많은 동족들을 죽였다. 비록 그것이 버그들에게 조종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참담한 심정을 조용히 흘려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라온의 뒷모습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네토루가 넌지시 물었다.

“···버그들한테 조종당하고 있는게 무슨 의미인지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알려 줄 수 있겠어? 혹시 세뇌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세뇌···. 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멉니다.”

입술을 짓씹으며 감정을 정리하던 라온이 말했다.

“저희를 조종하고 있던 건 기생충입니다.”

“기생충이라고?”

라온의 말에 네토루는 미간을 좁혔다. 생각지 못한 정체였다. 설마 버그들한테 그런 것도 있던 것인가. 그러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조종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동안 기생충이 너희들의 몸을 빼앗고 있었다는 소리야?”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맞습니다.”

"그러면 혹시 그게 지금 당신의 몸에도 있는 건가?"

"예."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아랫배를 쓸어 만져보았다.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이 안에는 분명 그것이 있을 터.

불쾌하다.

이 몸 안에 있는 그 끔찍한 벌레를 생각하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정작 지금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아직 몸 안에 있다는 건 분명했다.

“아마···. 지금은 버그가 기절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커넥팅 중이던 성기병의 팔다리가 부서지면서 그 반동이 찾아올 때, 제 마력 신경계에 자리 잡고 있던 버그에게도 충격이 간 거겠죠.”

마력 신경계라니···. 꽤나 난처한 곳에 있다. 덕분에 네토루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비록 지금은 제가 이렇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 다시 기생충이 제 몸을 조종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라온은 그러한 미래가 두려운 듯 제팔을 껴안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허리 부근까지 흘러내려온 긴 녹색 머리카락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마침 그때쯤. 네토루의 연락을 받고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차량 한 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부대에서 하는게 좋겠어. 내가 사령관님한테 말은 해놨으니까 아마, 험한 취급은 받지 않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네토루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도 전부 설명할 생각이었다. 대수림을 위해서라도 프랑기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

라온과 그녀의 남편 카르곤, 린과 란을 차량에 태우고 네토루는 부대로 복귀했다.

원래 그는 복귀하자마자 리엔에게 곧바로 오늘 일을 보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리엔에게 뭔가 제대로 말을 하기도 전에 의무실부터 가야만 했다.

일단 치료부터 받고 오라던가. 아무래도 리엔은 부러진 왼팔이 상당히 불편했나 보다.

덕분에 네토루가 부대에 복귀하고 의무실에서 치료부터 받고 있을 때였다.

“내가 못살아···. 이게, 뭐에요 대체···.”

소식을 듣고 다급히 달려온 세레스가 네토루를 보며 울상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세레스의 모습에 네토루는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세레스···. 정작 다친 건 나인데, 왜 네가 울려고 하는 거야?”

“울긴 누가 울어요! 이건 그냥···.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아까부터 저만 바보 처럼 상황을 모르니까···. 당신이 돌아오는 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

아무래도 걱정이 많았나보다. 괜히 세레스만 따돌린 듯한 기분이 들어서 미안해질 정도였다.

“밤 중에 도대체 뭔 일이 있던 거죠? 목에 섬뜩한 손자국이 남아 있는 카렌도 그렇고···. 당신 팔은 왜 그런 거예요? 어디 맞고 다닐 사람도 아니면서···.”

그새 카렌의 상태도 보고 온 것인가. 다행히 큰 부상은 없지만, 카렌 역시 근처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목덜미에 남아 있는 손자국을 가리기 위해 붕대라도 감고 있겠지.

“···빨리 말해줘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에요? 혹시 이번에 붙잡힌 엘프들 때문에 팔이 그렇게 된 거예요?”

네토루가 아무런 말이 없자 세레스가 압박하듯 앞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얼굴이 가깝다. 그녀의 숨결이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피곤한 탓일까. 이 와중에도 은은하면서 달콤한 세레스의 냄새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네토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엘프들 때문이 아니야.”

네토루는 왼팔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값비싼 포션을 아끼지 않고 들이부은 덕분인지 제법 상태가 좋아졌지만, 욱신거림마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비정상적이었던 나츠오의 힘. 그리고 붉은 안광과 그의 몸을 차지하던 정체 모를 인격. 아마 그 모든 것들이 라온이 말한 기생충 때문이겠지.

그러면 나츠오의 변화에 대해서 납득이 된다.

“···그러면 뭐 때문인데요?”

“그건 나중에 상황이 정리되면 설명해줄게. 아직은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닐 게 아니라서.”

치료가 끝나자 네토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카렌도 치료가 끝났을 테니, 그녀를 데리고 리엔에게 갈 생각이었다. 리엔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사령관인만큼 리엔은 나츠오의 상태를 알 필요가 있었다.

#

제39구역에 배치되고서 많은 것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세상에···. 설마 버그들이 아닌 엘프들한테 이렇게 당하게 될 줄이야.

뒤늦게 상황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관측을 피해 국경 지대를 넘은 엘프란디아 레인저들이 뒤통수를 때리고 있는 중이었다.

버그들과 야간에 전투를 하던 파일럿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난데없는 기습이었다.

─왜 이 놈들이 여기에 있는 건데?! 페르젠 사령관은 몰랐던 건가!

─누, 누가! 시간 좀 벌어봐···!

─빌어먹을! 이 녀석들 레인저들이야! 사령관들의 관측에 안 걸린다고!

─뭐?! 그러면... 으아악!?

“······”

비명과 함께 끊긴 단말마를 들으며 리엔은 이를 악물었다.

현재 리엔이 듣고 있는 건 392부대의 음성 채널이었다. 그리고 한밤중에 다급하게 지원 요청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392부대의 음성 채널에서 더 이상 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늦었나 보군.

“······”

구원 요청을 받고서 다급히 현장에 도착한 베를레앙 경의 말에 리엔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쪽에서도 레인저들이 발견된 모양인데···. 그건 어떻게 되었나? 그 나츠오라는 친구는 되찾았나?

“···아니요. 결국, 놓쳤습니다.”

─그런가···.”

한 시간 전만에도 잠자리에 들려던 리엔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잠기운 따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등줄기가 섬뜩해서 허리가 뻣뻣해질 지경이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리엔이 도시 외곽으로 침투 중이던 정체 모를 성기병들을 관측할 수 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네토루, 카렌, 나츠오를 찾던 도중에 관측망에 우연히 걸려든 것이다.

다만 문제는 버그들의 공세를 막기 위해 기사들을 비롯해 다른 부대원들이 이미 도시 밖을 나가고 있었다는 점인데,

때마침 출격이 늦었던 린과 란이나, 페르아와 쿄쿄가 있어서 만정이지···. 만약 그걸 제때 막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그들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392부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자네의 부대원을 찾는 걸 도와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상당한 숫자의 버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게 확인됐네. 아마 392부대가 전멸하고 생긴 공백을 노리는 거겠지.

“···그렇습니까.”

버그들이 이렇게 날뛰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아무리 베를레앙이라도 나츠오를 납치한 성기병을 쫓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관측을 피할 수 있는 레인저였다.

─아. 그리고 보니 방금 엘프 두 명을 사로잡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정말인가?

“예···. 현재 레인저 2명을 확보한 상태입니다. 한 명은 의식이 없는 상태지만, 다른 한 명은 다행히 협조적이더군요. 이번 일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데로 곧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전투가 끝나고 유의미한 정보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겠네. 아무래도 오늘은 밤새 버그들과 싸워야 할 것만 같군.

베를레앙과의 통신은 그걸로 끝이었다. 방금 막 전투에 진입한 것인지, 통신이 끊기기 직전에 버그들의 시끄러운 포격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아···.”

혼란스러운 밤이다. 다시 한번 한숨을 쉬던 리엔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라온 라페텔이라고 소개했던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녹색 머리카락. 슈트를 입고 있는 탓인지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가운데,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아까부터 라온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아마 이쪽의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다행히 사람 자체는 온순한 편인지 미안해 하는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저걸 보니 프랑기아 측에 협조하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리엔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라온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네토루와 카렌이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니 먼저 가볍게 말문을 터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게다가 나츠오가 기생충에 감염된 것 같다는 네토루의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도 궁금하던 찰나였다.

“저는 리엔 프러스트라고 합니다. 저희한테 협력해주신다고···.

털썩.

헌데, 리엔이 입을 열기 무섭게 돌연 방금까지 멀쩡했던 라온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 상황을 인식하는게 늦은 리엔의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였다.

“이런···. 큰일났군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시퍼렇게 지린 얼굴로 라온은 자신의 아랫배를 꾹 누르더니 분한듯 입술을 깨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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