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엘프란디아
* * *
─저는···. 제13 대수림라페넬를 지키는 제3 레인저 부대의 부단장 라온 라페넬라고 합니다.
“···하이 엘프가 안에 타고 있던 건가.”
네토루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시 안까지 대범하게 침투했던 존재가 설마 하이 엘프였다니.
하이 엘프는 인간의 시점으로 볼 때 왕족에 가까운 존재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이 엘프가 정말 엘프들의 왕족은 아니었고 단지 느낌이 그럴 뿐이었다.
애초에 엘프들에게는 왕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엘프란디아.
이 국가는 엘프들의 도시 대수림들이 모여 만들어진 연합체였기 때문이었다.
프랑기아처럼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제 각자마다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대수림들이 모여 있는 국가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하이 엘프는 각 대수림마다 존재하는 세계수의 무녀를 의미했다. 아니, 정확히는 세계수에 관여할 수 있는 능력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남의 도시를 들쑤시고 다닐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혹시 괜찮으시면 콕피트에 와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인의 목소리는 상당히 힘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기병의 팔다리가 파괴당했다. 성기병과 커넥팅하는 여성 파일럿의 몸에 적지 않게 충격이 갔겠지.
“···콕피트까지 와달라고?”
─네···. 부탁드립니다···.
“······”
네토루는 침묵했다. 안 그래도 마침 기껏 살려놓은 엘프들이 성기병을 버리고 도망칠지 모르기에 콕피트를 열고 제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접근하는 건 조금 그렇다.
서로 방금까지 목숨 걸고 싸웠던 존재 아닌가. 어쩌면 저 모든 게 함정일 수도 있었다. 콕피트가 열리는 순간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네토루라도 안에 있던 파일럿들이 동시에 덤벼들면 곤란할 수가 있었다.
그런 네토루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자신을 라온 라테넬이라고 소개했던 여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금 제 파트너가 저를 죽이려고 하고 있어서···. 으윽?!
“···죽이려고 하고 있다고?”
뭔가 질 나쁜 농담이라도 들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마냥 무시하기에는 엘프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했다. 잠시 고민하던 네토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조종석에서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도 린과 란, 두 사람은 콕피트 안에서 제대로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기절한 상태였다.
짧은 전투 시간 동안 무리한 출력으로 네토루가 두 소녀를 오버히트 상태로 만들어버린 탓이었다.
“···몸에 무리가 안 갔어야 할 텐데.”
정말 상태가 안 좋다면 치료라도 해야겠지만 문제는 그걸 저 두 사람이 받아들일까.
이건 나중에 두 사람이 깨어나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콕피트 안에서 사이좋게 오버 히트 상태에 빠진 쌍둥이 자매를 보며 쓴웃음 짓던 네토루는 콕피트를 열고 외부로 나갔다.
밤의 공기가 피부를 적신다. 이 순간에도 버그의 침습을 알리는 경보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총소리나 포격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는 걸 보아, 버그들이 도시까지 도달한 건 아닌듯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상황이 급해서 음성 채널로 전해지던 리엔의 말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얼핏 들어보니 엘프들한테 392부대가 기습을 당한 듯했다.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현실감 없는 이야기다.
제 땅을 지키고 있어야 할 엘프들이 왜 프랑기아를 들쑤시고 다니는 건가.
네토루가 알고 있는 엘프들은 자신들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일이 아니면 굳이 나서지 않은 종족들이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프랑기아를 공격할 정도로 호전적인 종족은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라고 했겠지만, 이미 도시에서 레인저를 상대한 마당에 더 이상 못 믿을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네토루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면서 신중하게 구석에 누워있는 레인저의 성기병한테 향했다.
방금 전의 전투에서 네토루가 성기병의 팔다리를 철저하게 파괴해놓은 탓일까.
전투의 여파로 부서진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댄 채 쓰러져 있는 성기병의 팔다리에서는 성혈이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토루는 질척질척한 성기병의 핏물 위를 걸으며 그대로 레인저의 성기병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그렇게 몸체 위에 올라가며 콕피트를 열었을 때였다.
안의 풍경에 네토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싶었는데 아무래도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다.
“으으윽! 어서,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실제로 네토루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엘프족 여인은 조종석 위에서 커플링 파트너로 예상되는 남성에게 목이 졸리고 있던 것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여인을 저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네토루는 여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남성을 곧바로 치워냈다.
“하악···. 하악···.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네토루의 도움을 받아 제 몸을 짓누르며 목을 조르던 파트너가 나가떨어지자, 여인은 부족한 숨을 몰아쉬며 네토루의 등 뒤로 왔다. 질식 직전까지 갔던 탓인지 여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네토루는 여인을 자신의 등뒤에 숨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파트너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거지?”
“버그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제 파트너는 버그한테 조종당하고 있거든요.”
“버그 조종당하고 있다고?”
버그들한테 그런 힘이 있는 건가? 순간 그러한 의문이 들었지만 네토루는 콕피트 구석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엘프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네.”
“네? 꺄아앗?!”
왼팔이 부러진 상태로 레인저와 비좁은 콕피트 안에서 싸울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오른팔로 여인의 가냘픈 허리를 껴안고는 그대로 콕피트 안에서 뛰쳐나와 땅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무사히 바닥에 착지하고 고개를 들자 콕피트 안에서 얼굴을 내미는 남자 엘프가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자연스레 부딪혔다.
“······”
“······.”
무미건조한 눈동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죽은 동태 같은 눈이 네토루를 응시한다. 그러한 엘프의 시선에 네토루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녀석 지금 살아있는 게 맞는 건가?
순간 그러한 의문이 들 정도로 엘프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네토루의 눈에 비친 엘프는 뿌리가 전부 잘려나간 오래된 고목을 연상케 했다.
침묵 속에서 기묘한 대치가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아까부터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엘프 역시 콕피트 밖으로 나와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땅에 발이 닿기 무섭게 곧바로 땅을 박차며 네토루에게 달려들었다.
마침 언제 덤벼들까 기다리고 있던 네토루였다.
게다가 상대는 레인저였기에 네토루는 몸을 긴장시켰다. 안 그래도 왼팔이 부러진 상황. 조금만 실수했다가는 이쪽이 당할 수 있다.
이윽고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며 주먹이 오갈 때였다. 네토루는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예상치 못하게도 엘프의 공격이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뭔가 자기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미숙한 아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몇 번 엘프의 공격을 피하며 간을 보던 네토루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엘프의 옆구리에 발을 박아넣었다.
쓰으으윽!
네토루에게 걷어차인 엘프가 허공에 붕 떠오른 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등이 바닥에 처박히고 몇 미터를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엘프는 미끄러지던 몸이 멈추기 무섭게 곧바로 손으로 바닥을 짚더니,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남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한 풍경이었다.
심지어 걷어차이는 순간에도 엘프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생명체로서 필요한 자극들이 완전히 결여된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래, 마치 조종당하는 인형 같다. 보이지 않는 실 따위에 팔다리가 조종당하고 있는···. 무언가.
“······”
이윽고 엘프가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으로 네토루를 응시하며 다시 땅을 박차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덕분에 네토루는 방금 전에 여인이 했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건 버그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엘프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
네토루는 끊임없이 덤벼드는 엘프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복부에 무릎을 꽂아놓고, 가슴팍에 주먹을 박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때려도 피를 토해내면서도 계속 달려드는 엘프 때문에 네토루도 점차 곤란해지던 그때였다.
아까부터 그 모습을 뒤에서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지켜보던 여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만요! 그 사람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비록 지금은 버그한테 조종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제 남편입니다!”
“···남편이라고?”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여인의 간절한 외침에 엘프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던 네토루는 흠칫했다. 설마 단순한 커플링 파트너를 떠나 부부관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제는 한계였던 걸까.
털썩.
아무리 쓰러져도 몇 번이나 다시 일어서며 네토루에게 덤벼들던 엘프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