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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44화 (144/148)

〈 144화 〉 엘프란디아

* * *

“···그런데 너 괜찮은 거야? 아무리 봐도 왼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솔직히 말해서 괜찮지는 않다. 부러진 팔로 조정간을 잡는게 쉬울리가 없다.

하지만 네토루는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니까, 어서 커넥팅 해. 지금 적이 오고 있으니까.”

“으읏···. 잠시만 기다려! 성기병이랑 커넥팅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란 말이야!”

네토루는 조종석 위에서 뒤뚱거리는 린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방금까지 란이 엎드려 있던 곳. 그곳에는 지금 린이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쌍둥이는 성기병도 공유가 가능한 건가?’

몸은 거의 같으니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쌍둥이 파일럿의 특별함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인지라 신기한 풍경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린도 한 때 여성 파일럿의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는 듯했다. 처음부터 란과 커플링했던 건 아닌 것이다.

“오오! 좋아, 됐다!”

이윽고 조종석에 자세를 잡던 린이 활짝 웃자, 곧 그녀의 팔다리를 속박하는 마법진과 함께 성기병의 커넥팅이 진행되었다.

마법진이 새겨지며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한 린의 조정간을 지켜보던 네토루는 맵을 확인했다.

그러자 점점 매섭게 거리를 좁혀오는 엘프란디아 성기병이 보였다.

마치 이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그 움직임이 상당히 다급해 보인다.

네토루는 그런 상대를 보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시간만 어떻게든 끌어봐야 하나.’

린의 말에 따르면 기관에서 훈련생 시절에 구축한 마력 신경계가 전부인 듯했다. 일단 직접 확인해봐야겠지만 한계 출력은 상당히 낮을 터.

그러니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보다는 최대한 버티는 쪽으로 가는 것이 좋겠지. 그나마 페르아가 곧바로 달려와 주고 있으니 조금만 버티면 된다.

“누렁이! 커넥팅 끝났어!”

“그래.”

네토루는 린의 조정간을 쥐며 마력패스를 만들었다.

“흐에? 뭐, 뭐야! 이거···. 흐으윽?!”

그러자 조종석에 있던 린은 몸을 비틀었다. 마력 패스를 통해 들어오는 네토루의 마력 때문이었다. 아랫배 깊숙이 삽입되며 내부를 긁어내는 듯한 이질감.

게다가 네토루의 마력이 제멋대로 린의 미완성된 마력 신경계를 하나둘씩 점거하고 있었다.

언니는 이런 걸 견디고 있던 건가. 이러니 싸움이 끝나자마자 오버히트가 되어버리지.

순식간에 네토루의 마력으로 색칠되듯 몸 내부가 가득 채워지는 감각이 괴롭던 린이 울상 지으며 말했다.

“자, 잠시만···. 사, 살살해! 나, 이런 거 무리···”

“미안. 조금만 참아.”

“으에엣?!”

사과와 함께 네토루가 린의 조정간을 잡아당겼다. 마침 저편에서 레인저의 성기병이 나타나고 있었다.

#

그렇게 오랜 삶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지난 시간 동안 그려온 짤막한 삶의 궤적만으로도 괴물은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계획이라는 건 없다는 걸.

언제나 세상 모든 것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렇다. 어느하나 제대로 들어맞아 떨어지는 게 없었다.

원래라면 이렇게 일이 꼬일 리가 없었을 터.

괴물은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하고.

원래 괴물은 나츠오를 통해 카렌이라는 소녀의 몸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나츠오가 카렌을 강간하는 순간 그녀의 몸에 기생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건 단순히 나츠오의 바램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카렌의 몸을 이용해 NTL­001한테 접근하는 게 목표였을 뿐.

그것이 원래 괴물이 세우고 있던 계획의 골자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나츠오가 카렌을 강간하기도 전에 NTL­001한테 저지당했다. 심지어 이쪽의 존재를 되려 들키고 상황만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다.

생각 이상으로 엘프란디아에 있던 군단에서 신속하게 움직여줬으니까. 실제로 끌려가기 전에 꼭두각시가 된 엘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았는가.

인간의 몸으로는 성기병한테 대항할 수 없다.

그렇기에 레인저의 성기병이 도착했을 때 괴물은 진정한 의미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기병한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니.

하지만 설마 NTL­001이 의식을 잃은 파일럿을 대신하여 성기병을 타고 싸울 줄이야.

그건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나츠오의 몸에 기생하며 정보를 획득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현장에서 곧바로 스와핑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괴물은 NTL­001이 더욱 욕심이 났다.

어떻게든 저 몸을 차지하고 싶다. NTL­001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능력이 너무나도 탐이 났다.\

누구와도 커플링이 가능한 능력은 분명 연구할 가치가 있을 터.

그런데 그때였다.

─군단으로부터 새로운 명령 확인.

─우선순위 변경.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정보가 전달되었다. 나츠오의 몸을 빼앗고 있던 괴물은 미간을 좁혔다.

본래 괴물의 요청에 따라 NTL­001 확보를 우선순위로 협력하던 군단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우선순위가 갑자기 바뀐 것이다.

바뀐 내용은 간단했다. NTL­001한테 제압당해 아직 살아 있는 엘프들을 우선으로 사살할 것.

아무래도 군단은 엘프들이 살아서 인간들에게 붙잡히는 걸 꺼리는 듯했다. 게다가 이번에 NTL­001이 저지한 엘프들 중에는 엘프란디아의 고위급 간부였던 존재도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심지어 ‘사고’가 남아 있는 엘프다. 그게 인간의 손에 넘어가면 이쪽의 계획을 들킬 수가 있었다.

······곤란하군.

이렇게 되면 괴물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애초에 엘프들이 제39구역을 넘은 것은 단순히 괴물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39구역을 지키고 있는 부대를 교란시키는 것.

이것이 엘프들이 제39구역을 침투한 진짜 이유였다.

그런데도 엘프들이 굳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도시 안쪽까지 침투한 것은 순전히 괴물의 지원 요청 때문이었다. 그러니 괴물이 제 욕심 때문에 여기서 우선순위를 바꿔 달라고 하는 건 무리였다.

이윽고 나츠오를 태우고 성기병을 움직이던 엘프가 목표 지점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곳에는 NTL­001과 싸웠던 레인저의 성기병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창을 쥐고 있는 성기병 하나가 뒤로 물러선 채 이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지 NTL­001은 서서히 뒤를 벌린 채 시간을 끌려는 모양새다.

오히려 잘 됐다. 이쪽의 우선순위는 바뀌었으니까.

구출한 괴물을 태우고 움직이던 엘프의 성기병은 NTL­001이 아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동료의 성기병을 향해 맹렬하게 달렸다.

저 안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엘프가 있다.

이대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김에 콕피트 안에 살아 있는 엘프를 죽이고 갈 생각인 것이다.

같은 동족이지만 그 판단에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다.

어차피 콕피트 안에서 성기병을 조종하는 엘프들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군단의 명령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군단의 의지에 따라 망설임 없이 검을 들어 올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동료의 콕피트를 부수려던 그때였다.

───푸우욱!

돌연 어둠을 꿰뚫는 한 줄기의 파공음이 있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콕피트를 파괴하려던 찰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엘프의 검날이 튕겨 나갔다.

#

레인저의 성기병이 달려오자 네토루는 긴장했다.

이긴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페르아가 따라잡을 때까지 네토루는 어떻게든 시간만 벌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듯 적은 예상치 못한 판단을 보여주었다.

믿기 어렵게도 레인저의 목표는 네토루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적은 무기를 쥐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동료의 성기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순간 동료를 구할 생각인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히려 반대로 동료를 죽일 생각인 것이다.

‘···죽여서라도 입을 막을 생각인 건가?’

애써 제압한 것을 저대로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네토루는 일단 움직이고 보았다.

“흐엑?!”

그 갑작스러운 기동에 린이 화들짝 놀랬다. 분명 방금까지 네토루는 방어만 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다른 여성 파일럿들처럼 그가 원하는 대로 출력을 높여주는 건 린에게 무리였다.

“잠시만···. 이건 말이 다르잖······!”

“미안···. 린, 조금만 참아!”

“꺄아앗?!”

안 그래도 미완성인 마력 신경계다. 자신의 한계 출력을 넘어선 움직임에 린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확장된 마력 패스를 통해 네토루의 마력이 몸 깊숙이 들쑤시고 들어온다.

그 난폭함은 훈련생마냥 미숙한 마력 신경계를 지닌 린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폭력과도 같았다.

“누, 누렁이···. 너! 가, 가만히 안 둘 거야···! 이거, 반드시 따질······! 흐윽?!”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린은 눈을 질끈 감으며 네토루의 마력을 흘림 없이 몸 안에 받아냈다.

그의 마력을 마력 신경계로 소화하고 성기병의 동력으로 이끌어낸다. 오랜만에 해보는 작업인지라 서툴렀지만 린은 어떻게든 해내 보았다.

이윽고 그렇게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각 속에서.

두 성기병이 격돌하며 몇 차례 시끄러운 금속음이 울려 퍼지더니,

“하아···. 하아···. 뭐야? 쟤네 왜 같은 편을···?”

얼마 지나지 않아 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토루가 왜 이렇게 다급했나 싶었는데 그제야 린도 적이 자기 동료를 죽이려고 한 걸 깨달은 것이다.

네토루는 쓰러져 있는 레인저의 성기병을 지키듯 상대방의 앞을 가로막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죽여서 입을 막을 생각인 거 같아.”

“뭐···? 같은 동료인데?”

“뭔가 중요한 정보라도 있는 거겠지.”

네토루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대치 중인 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료의 콕피트를 파괴하려는 듯한 살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때였다.

─네토루 형!

뒤를 쫓아오던 페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네토루와 대치 중이던 레인저의 성기병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네토루는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그냥 도망칠 생각인가?”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저 녀석이 데리고 있는 나츠오를 어떻게든 데려와야만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발목이라도 붙잡기 위해 린의 조정간을 당기던 그때였다.

“······!”

네토루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성기병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그 이유는 명확했다. 린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하윽···. 미안해···. 나 정말 무리니까···.”

“린···.”

끝내 린도 란처럼 조종석에서 오버히트로 쓰러져 버렸다. 애초에 성기병을 기동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던 소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끝내 쌍둥이 자매를 전부 무리시킨 것에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네토루는 분한듯 이를 악문 채 멀어지는 적을 노려보았다.

오랜만이다. 이런 무력감은.

차라리 적이 같은 편을 죽이려던 걸 내버려두고 철저하게 시간을 끄는 쪽으로 판단을 했다면,

나츠오를 되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내가 너무 오만하고 욕심을 부린 탓이다.

빌어먹을···.

뒤늦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던 네토루는 천천히 조종석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그때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가 어딘가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엘프란디아 레인저의 성기병이었다.

의식이···. 있는 것인가?

놀란 네토루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너는 누구지?”

─저는···. 제13 대수림­라페넬를 지키는 제3레인저 부대의 부단장 라온 라페넬라고 합니다.

“······”

여인의 대답에 네토루의 눈동자가 커졌다.

라페넬···?

네토루가 알기로 대수림의 명칭을 성으로 쓸 수 있는 건, 오로지 하이 엘프들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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