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NTO001
* * *
“저, 저랑 커플링하겠다고요?”
“그래.”
“······”
당황한 란은 네토루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하지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으윽! 페, 페르아! 무슨 방법 없어?!
─그,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위태로운 두 소년·소녀의 목소리.
레인저의 휘몰아치는 공격을 간신히 버텨내며 쿄쿄의 성기병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고민은 사치였다. 저러다가 정말 저 두 사람이 죽게 된다면 평생 후회하겠지.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란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 네토루···. 어서, 제 조종간을 잡아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네토루가 조정간을 쥐자,
란은 그와 마력 패스가 연결되면서 낯선 마력이 자신의 자궁구에 스며드는 걸 느꼈다.
난폭하고 이질적인 마력.
당연하지만 린의 마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린과 란은 쌍둥이 자매였기에 서로가 지닌 마력의 성질은 거의 비슷했다. 덕분에 네토루의 마력처럼 이질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남자의 마력을 받아보는 건 오랜만인데.’
아무리 쌍둥이 자매라고 하지만 사실 여동생 린이 처음부터 란과 커플링 했던 건 아니었다.
원래는 린 역시 다른 소녀들처럼 여성 파일럿으로서 남성 파일럿과 커플링하던 때가 있던 것이다.
하지만 기관에서 린은 란을 위해 남성 파일럿의 위치로 전향해버렸다. 그것은 아픈 기억이었다. 그때 린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가.
당연하지만 그 동안 구축했던 여성 파일럿의 마력 신경계를 버리고, 남성 파일럿의 마력 신경계를 몸안에 새로 구축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 기억을 되새기던 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점점 하복부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네토루의 마력을 천천히 소화하며, 란이 자궁구에 있는 마력 신경계를 활성화하던 그때였다.
“다행히 예열은 충분히 되어 있는 상태네. 란, 곧바로 간다.”
“네···? 하으윽?!
네토루가 조정간을 잡아당기자 란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력 패스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윽?! “
순간 아랫배를 들쑤시고 들어오는 마력에 란의 등줄기가 휘어졌다. 저항은 불가능하다. 주도권 따위는 그가 조정간을 쥐는 순간 완전히 빼앗긴 상태니까. 애초에 린한테도 항상 주도권을 주던 란이었다.
“자, 잠시만···. 이건··· 힉!?”
그렇기에 란은 조종석 위에서 무너지려는 몸을 간신히 버텨 세웠다. 하지만 마력 패스를 통해 밀려오는 마력은 그런 그녀를 더욱 한계까지 몰아세우고 있었다.
“···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조금만 참아.”
“하읏··?! 참으라고 해도······! 꺄아앗?!”
이내 란의 입 밖으로 괴로운 신음이 새어 나오며,
네토루의 마력이 찌릉하고 그녀의 마력 신경계를 짓누르던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몸을 짓누르고 있던 건물 잔해를 치워내며 한계치까지 출력을 높인 란의 성기병이 맹렬하게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페르아와 쿄쿄를 밀어붙이고 있던 레인저의 성기병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타아아아앙─!
주변의 대기가 찢겨지는 소리와 함께 맞부딪친 창날과 검날이 쩌렁 튕겨나갔다.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음에도 레인저가 막아낸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네토루도 레인저를 단번에 끝낼 생각으로 공격한 건 아니었다.
단지 페르아와 쿄쿄를 구하기 위한 공격이었을 뿐.
─어어어?! 린 누나! 깨어난 거야?!
간신히 버티고 있던 페르아가 화색 어린 목소리로 묻자 네토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야.”
─우아앗? 네토루 형···! 왜 거기에?
“그건 나중에 묻고, 페르아. 근처에 나츠오랑 카렌이 있을 거야. 두 사람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가.”
─어? 나츠오 형도 여기 있어요?!
“그래.”
네토루는 나츠오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그는 여전히 망연한 얼굴로 제 자리에 선 채 가만히 있었다.
이곳은 성기병들이 싸우고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 계속 맨몸으로 있는 건 너무 위험했다.
─네? 그런데 제가 물러나면 네토루 형은요?
“···나는 여기서 이 녀석들을 해결하고 가야지.”
─성기병 두 기를 혼자서요?!
“걱정 마. 금방 제압하니까.
말과 동시에 네토루는 성기병의 몸체를 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섬뜩한 검날이 있었다. 린이 제압했던 레인저의 성기병이 어느새인가 정신을 차리고는 네토루에게 달려든 것이다.
레인저의 공격을 피하는 순간 네토루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풍경. 그 안에서 무방비하게 틈을 내주고 있는 레인저의 성기병이 보였다.
비록 공격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상대를 기만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빈틈 투성이다.
역시 이 녀석은 뭔가 이상하다. 잘 훈련된 레인저라고 보기 어려운 어설픔 움직임.
만약 린과 싸우는 모습을 미리 보지 않았다면 함정이 아닐까 경계했겠지만, 네토루는 눈앞에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창을 찔러넣었다.
그것은 회피와 동시에 이루어진 반격이었다.
숙련된 기사라도 이 순간은 어떻게 대응할 수 없을 만큼 정련된 움직임. 네토루는 적의 콕피트에 창날을 꽂은 채 그대로 벽에 박아넣었다.
푸우우우욱!
쿠웅! 건물이 무너지고, 동시에 콕피트가 박살 난 레인저의 성기병에게서 움직임이 사라졌다.
파일럿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성기병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은 확실하다.
─우와······. 이게, 뭐야?
그 모습을 바로 근처에서 지켜보던 페르아는 작은 탄성을 흘렸다. 도와줘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네토루 형! 그러면 저는 나츠오 형이랑 카렌 누나 부대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그래. 빨리 가.”
방금 전의 싸움을 보고서 안심이 된 걸까.
나츠오와 카렌을 챙긴 페르아가 너덜너덜해진 쿄쿄의 성기병을 이끈 채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어쨌든 이제 남은 건 하나다.
네토루는 창을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떻게 도와줄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동료를 잃어버린 레인저의 성기병이 보였다.
파일럿이 바뀐 걸 눈치챈 걸까. 방금까지 일방적으로 린과 페르아를 공격했던 레인저의 성기병이 왠지 신중해진 느낌이다.
녀석은 검을 든 채 긴장감만 높이고 있었다.
“···레인저랑 대결이라니. 이런 건 생각도 못 해봤는데.”
며칠 전에 볼드로이랑 싸웠을 때 하고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서로의 목숨을 건 전투. 흔들림 없는 살기가 두 성기병 사이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차분하게 상대를 관찰하고 싶지만, 이쪽에 그럴 여유는 없다. 란의 상태를 생각하면 시간을 질질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네토루는 란의 성기병을 앞으로 움직였다.
“흐으윽?!”
커플링 파장이 맞지 않아서 그런 걸까. 란이 그 반동을 못 이겨 몸을 들썩였다. 아마 란은 지금 카렌이나 세레스보다도 더욱 거북한 감각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란. 괜찮아?”
“괘, 괜찮···. 지 않아요···.”
“······”
괴로움을 호소하는 울먹이는 목소리.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정작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란은 네토루의 마력을 흘림 없이 받아낸 채 성기병의 출력을 유지하는데 노력했다.
네토루는 그런 란에게 감사하며 망설임 없이 레인저와 격돌했다.
카아아아앙!
일순 두 성기병 사이에서 충격파가 휘몰아쳤다.
성기병이라는 거대한 질량의 부딪침이 만들어낸 격류가 주변에 있던 건물 잔해를 날려 보내고, 각자의 발끝으로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물러섬은 없다. 네토루는 한계 출력을 낮추지 않은 채 성기병을 앞으로 기울였다.
“흐윽···. 하악···!”
란의 숨이 점점 깊어진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힘 싸움은 오래 유지할 수 없다. 란이 출력을 유지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힘든 것인지 란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되려 다급해져서는 안 된다.
네토루는 차분한 눈으로 레인저를 노려보았다.
흔히 숲의 유령이라 불리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레인저는 전장의 선두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은밀한 기동성으로 적들을 교란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존재가 여기까지 와 있단 말인가.
네토루는 외부 음성을 열고서 레인저한테 물었다.
“···숲을 지키고 있어야 할 레인저들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
“이런 한밤중에 버그들의 영역을 넘어서 프랑기아를 공격할 가치가 있는 건가?”
─······
질문을 계속해도 대답은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단순히 말을 무시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아예 처음부터 말이 안 통하는 인형을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상대에게서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단지 그 순간 당징라도 상대를 물어뜯어 죽일 것만 같은 불쾌한 살기만이 흐르고 있을 뿐. 덕분에 콕피트 안에 어떤 놈이 타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아무튼, 좋다.
적이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든 붙잡아서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수밖에.
그러면 이해할 수 없는 지금 상황도 그렇고,
나츠오의 몸을 차지한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해서도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힘 싸움을 끝내고 서로 물러서기 무섭게,
카아아앙!
다시 서로를 향해 땅을 박찬 두 성기병의 창날과 검날이 적의 몸체를 노리며 쉴 새 없이 미끄러진다.
서로 다른 형태의 병장기를 지닌 두 성기병은 몰아치는 대기를 가르며 상대방의 콕피트를 노렸다.
성기병을 제압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안에 타고 있는 파일럿을 죽이는 것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좋다. 누구 하나 먼저 죽이는 쪽이 승리였다
노리는 것은 심장. 하나하나가 전부 치명적이기 짝이 없는 궤적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뒤엉켰고, 그때마다 서로의 위치가 몇 차례나 반복하여 바뀌었다.
네토루는 뱀처럼 콕피트를 노리는 레인저의 검날을 하나둘씩 막아내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예상대로 성기병의 전체적인 능력치는 역시 저쪽이 위다.
하지만 상관없다. 네토루는 아무리 상대가 레인저라고 해서 자신이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슬슬 레인저의 몸놀림이 눈에 익기 시작한 탓일까.
네토루는 레인저의 화려한 움직임 속에서 그동안 보지 못하고 있던 빈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인저의 화려한 움직임은 일종의 변장이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한 허세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네토루는 그러한 자신의 감을 믿고서,
창대로 공격을 틀어내고는 그대로 우직하게 안쪽으로 파고들며 레인저한테 어깨를 들이박았다.
─────!
설마 이렇게 무식하게 덤벼들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그 충격을 못 이긴 레인저가 흐트러진 자세로 뒷걸음쳤고,
네토루는 그 순간을 노려 어깻죽지째 상대방의 오른팔을 베어냈다. 그러자 레인저가 남은 왼손으로 무기를 쥐었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반격을 하기도 채 전에 상대의 왼팔을 잘라내고, 그대로 이어서 두 다리를 작살낸다. 네토루는 질풍처럼 창을 휘두르며 상대를 난도질했다.
끼이이익! 쿵!
끝내 팔다리가 모두 잘려나간 레인저의 성기병이 그대로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네토루는 굳이 콕피트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정보를 토해낼 파일럿은 확보해야 하니까.
그렇게 상대방의 성기병을 기동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며 전투가 마무리되자,
네토루는 쥐고 있던 란의 조정간을 손에서 놓았다.
“이, 이제···. 무리···. 하읏···.”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던 란이 조종석 위에서 턱 하고 쓰러졌다.
···역시 오버 히트인가.
당연하지만 성기병과 커넥팅을 유지하던 란이 조종석에서 쓰러지자, 네토루가 타고 있는 성기병 역시 기동불능 상태에 빠졌다. 동력이 끊긴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주변의 적은 전부 처리한 상태.
그 사실에 안도하던 찰나였다.
─네, 네토루 형! 큰 일 났어요!
음성 채널로 페르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렌과 나츠오를 데리고 부대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까.
“무슨 일이야.”
─나츠오 형이 엘프란디아 성기병한테 납치 당했어요!
“······”
납치라···. 어쩌면 구조에 가깝다고 봐야지 않을까.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페르아한테는 납치로밖에 안 보일 터.
“카렌은?”
─네? 카, 카렌 누나는 다행히 괜찮은데···! 으윽! 나츠오 형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거야!
쫓는 중인 걸까. 페르아의 목소리가 격하다.
─어어? 자, 잠시만···! 그 녀석 지금 네토루 형한테 가고 있는데요?
“···하.”
혹시 이쪽이 기동불능 상태가 된 걸 눈치채고 마지막 일격이라도 하려고 오는 걸까.
실제로 맵을 보니 붉은 점으로 표시된 성기병 하나가 매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 정도면 이제 곧 눈에도 보이게 될 터.
네토루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란이 오버히트로 쓰러진 지금 성기병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란의 성기병을 버리고 도망쳐야 하나?
그렇게 몇 초 안 남은 찰나의 선택지에서 고민하던 그때였다.
네토루의 턱밑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언니 대신 커플링해줄까?”
순간 란이 깨어났나 싶었지만, 고개를 내려보니 전투 내내 조종석에서 네토루의 품에 안겨 있던 린의 목소리였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모르겠지만.
린과 눈이 마주친 네토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가능해?”
“그야 커플링 정도는 가능한데···.”
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끝을 흐리며 쓰윽 시선을 피했다.
“···다만 출력이 절반 정도밖에 안 돼. 여성 파일럿 쪽의 내 마력 신경계는 미완성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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