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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39화 (139/148)

〈 139화 〉 NTO­001

* * *

카렌의 옆에 앉아 기대고 있던 네토루는 문득 지난 전투의 여파로 부서진 반대쪽 외벽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외벽 너머로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점점 밤이 깊어지고 있다.

시계가 없는 탓에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겠지만 계속 이렇게 부대 외부에 있으면 곤란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카렌의 방에서 무언가 소란이 있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눈치챘을 터.

부서진 문. 난장판이 된 방. 당연하지만 그 꼴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일 당장 출격날이다. 아마 지금 쯤, 리엔은 혼자 끙끙거리며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잔뜩 고민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부대로 돌아가자고 카렌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

카렌은 아까부터 네토루에게 바싹 몸을 붙인 채,

자기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훌쩍이는 중이었다. 하염없는 카렌의 울음소리가 그칠 줄 모른 채, 벌써 몇 분 동안이나계속되고 있었다.

카렌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아이였던가. 네토루가 아는 카렌은 언제나 당돌한 성격의 소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어디 톱니바퀴 하나가 빠진 것처럼 고장 난 것만 같았다. 그 안타까운 모습에 네토루는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겨우 삼켰다.

네토루는 카렌과 나츠오 사이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조심스럽게 뭔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카렌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말하기 싫다면서.

다만···. 처음 발견했을 때 속옷이 드러날 정도로 흐트러져 있던 카렌의 차림새를 생각하면···.

혹시 나츠오는 카렌을 겁탈이라도 하려 했던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카렌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여자 입장에서는 겁탈당했다고 말하는 게 쉽지가 않을 테니까.

심지어 카렌의 목에는 여전히 나츠오의 것으로 예상되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나츠오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을까.

더욱이 부대 안이다. 만약에 네토루가 때마침 카렌의 방을 찾지 않아서 설령 겁탈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위치상 다른 사람들에게 곧바로 들킬 수밖에 없다.

아니면 겁탈하고서 카렌의 입을 틀어막을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현재로서는 답을 알 수가 없다.

네토루는 시선을 돌려 나츠오를 바라봤다. 현재 나츠오는 기절한 상태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단단한 걸로 움직이지 못하게 팔다리를 묶어두고 싶지만, 딱히 쓸만한 게 없었다.

일단 옷으로 묶어볼까 했지만, 나츠오에게 맞은 부위에서 올라오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쭙잖게 손과 다리를 묶어봤자 금방 괴력으로 끊어버릴 것이다.

“네토루···.”

그러다가 문득 옆에서 훌쩍이던 카렌이 네토루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이름을 불렀다. 어느새인가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계속 울고 있던 탓인지 눈이 마주친 카렌의 검은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리 없는 무언의 요구.

“아···. 미안.”

눈빛에서 느껴지는 카렌의 요청에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리고 있던 손을 다시 뻗었다.

네토루의 손은 곧 카렌의 머리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응···. 그렇게 계속 쓰다듬어줘···.”

그렇게 머리를 매만져주자 카렌은 다시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처음에는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카렌은 그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상태였다.

“···그런데 카렌. 이거 언제까지 해줘야 해?”

“···내가 만족할 때까지.”

낯간지러운 부탁이다. 하지만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소녀가 부탁하니, 네토루로서는 어떻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커플링 파트너를 떠나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평범하게 어린 소녀를 챙겨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뭐 어떻게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으려나.

그렇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적막한 밤. 드디어 훌쩍이던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한 카렌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토루도 누군가한테 배신당해본 적 있어?”

“배신···?”

“응···.”

“······”

배신이라···. 네토루는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별로 반가운 단어는 아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네토루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당한 적은 없는데, 반대로 해본 적은 있지.”

“······뭐?”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을까. 카렌이 고개를 들더니 놀란 눈으로 네토루를 쳐다보았다.

계속 울고 있던 탓인지 토끼처럼 붉어진 눈동자가 혼란스럽다는 듯이 여러 차례 끔벅였다.

어쩌면 카렌이 원했던 대답은 이게 아니었을 것이다. 방금 그녀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했으니까 말이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 들은 적 있지? 내가 제1독립기동부대에 있었다는 이야기.”

“응···. 알지···.”

“나는 제1독립기동부대의 마지막 임무에서 부대원들을 배신했어.”

“···부대원들을 배신했다고?”

네토루의 말에 카렌은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말해야 하는데 도대체 뭘 말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던 그 순간 카렌의 뇌리를 스치는 건 전에 베를레앙이 했던 말이었다. 네토루는 제1독립기동부대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하던가.

······유일한 생존자.

당연하지만 가벼운 명칭은 아니다. 부대가 전멸했는데 혼자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지막 임무에서 부대원들을 배신했다니···. 당연하지만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생각들만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혹시 위험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을 배신한 걸까?

그래서 혼자 살아남은 건가? 그래서······.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가운데.

한참동안 네토루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렌은 결연한 얼굴을 했다. 카렌은 네토루에 대해 알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 녀석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렌이 아는 네토루는 절대 남을 등치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다.

“···네토루. 네가 뭘 했는지 알려줘.”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데?”

“···그래도, 알려줘.”

카렌이 옷자락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자신한테 알려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이것도 제법 오래된 이야기다. 네토루는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이걸 누군가한테 말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카렌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졌다.

네토루가 아는 카렌이라면 누군가한테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 * *

어느새인가 해가 지고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제1독립기동부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소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벽 위에 선 채 부대원들은 멍하니 지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노을 지고 있는 저편으로 부디 누군가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끝내 나타나는 이들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저 멀리 전투의 여파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뿐.

검은 재가 연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간다.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불길이 만들어내는 빛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시간과 함께 불길은 점점 제 몸집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저 안에 돌아오지 못한 부대원들이 있다.

“대장···. 이제 포기해. 아무리 봐도 3, 4소대는 전멸한 거 같으니까. 애초에 연락도 안 되잖아?"

“······알아. 하지만 혹시라는 건 모르니까. ”

제1독립기동부대의 임무는 둥지 안에 숨어 있는 여왕을 죽이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쉬운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은 극악의 임무. 호응해주는 부대 역시 마땅치 않아 악조건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끝내 여왕은 죽었다.

제1독립기동부대는 버그들의 방어선을 뚫고서 둥지 안에 침투하는데 성공했고, 사령관의 도움 없이도 여왕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그 결과 부대의 피해는 막심했다. 부대원들 중에서 절반이 넘게 죽은 것이다. 하나같이 모두 실력이 대단한 베테랑 파일럿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번 임무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임무는 성공했지만, 그중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몇 년간 동고동락했던 부대원들이 상당수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합류하는데 성공한 다른 소대들 역시 상태는 좋지 않았다.

소대장은 죽고, 소대 안에서 제일 어렸던 커플만이 간신히 복귀한 소대도 있을 정도였다.

······자세한 말은 하지 않지만.

아마 소대원 중에서 제일 어렸기에 살아남은 거겠지. 그쪽 소대의 소대장과 소대원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다.

네토루는 피곤한 정신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지나 싶더니만 갑자기 목덜미 부근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네토루는 자신이 조종하던 성기병을 바라보았다.

콕피트를 지키던 갑옷의 측면부가 부서진 채 내부가 훤히 보이고 있었다. 포탄에 맞은 탓이었다.

운이 정말 좋았다. 잘못하면 조종석에서 그대로 폭사할 뻔했다.

누가 봐도 네토루가 조종하던 성기병은 현재 기동불능 상태였다. 콕피트 뿐만이 아니다. 성기병의 왼팔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찢겨진 채 성혈이 흐르고 있었고, 다리는 반쯤 부러져서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왔다.

사람으로 치면 팔다리가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그나마 어떻게든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기적이다.

아마···. 지금부터는 다른 사람의 성기병에 얻어 탄 채 같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저런걸 끌고 갔다가는 괜히 움직이는데 방해만 될 게 뻔했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기는. 이제 신성제국의 국경을 넘어가야지. 어차피 여기는 이제 가망이 없어.”

“정말 괜찮겠어? 다시 못 올 수도 있어.”

“그러면 이 나라랑 같이 죽기라도 하게? 그럴 바에 우리끼리라도 탈출하는 게 나아. 그나마 희망이 있을 만한 곳에서 싸우는 게 낫지 않겠어?”

“희망이라···.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일까? 정말 그거 믿어도 되는 거야?”

“몰라···. 그렇지만 믿어봐야지······.”

말끝을 흐리던 대장이 중얼거렸다.

──그놈의 용사라는 걸 말이야.

그리고 그때였다.

"대장. 할 말이 있어."

아까부터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네토루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대장이 뒤를 돌아보자,

네토루는 그녀의 얼굴을 또렷이 응시한 채 말했다.

"나는 못 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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