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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36화 (136/148)

〈 136화 〉 NTO ­ 001

* * *

“······”

나츠오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찾아온 지 벌써 10분. 그동안 나츠오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카렌은 그런 나츠오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윽고 나츠오는 바닥을 향해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카렌을 쳐다보았다.

“···카렌. 이번 임무는 오래 걸리겠지?”

“응···. 아마 그럴 거야.”

드넓은 엘프란디아를 조사하고 다니는 일이었다.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짧은 기간 안에 끝날 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결국, 또 헤어져야 하는 건가.”

나츠오가 씁쓸한 미소를 짓자 카렌은 역시 표정이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카렌이 먼저 퇴원했던 탓에 병원에도 혼자 남겨졌던 나츠오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렇게 또 떨어지게 된다.

“그래도 다음 임무 때는 분명 같이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몸조리 잘해둬.”

“···같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카렌의 말에 나츠오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어딘가 한탄스럽다는 듯이, 화가 난다는 듯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그런 감정을 담아 나츠오는 카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네가 복귀할 때쯤이면 우리 둘 사이의 커플링 파장은 더욱 틀어져 있을 텐데? 어쩌면 다음번에는 커플링조차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건.”

카렌은 나츠오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저 말이 진실이 될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렇게 카렌이 부정을 못 하자 나츠오는 더욱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째서···. 네가 네토루의 커플링 파트너가 되어야 하는 거야? 그것도 세컨드라는 위치에서.”

“···나츠오.”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됐잖아. 왜 하필···.”

이건 저번에도 이미 한 번 했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나츠오가 이렇게 이야기를 끄집어낸 건···.

“···나츠오. 혹시 네토루를 원망하는 거야?”

카렌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나츠오가 이번에 커플링이 깨진 걸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잘 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모습만 봐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토루를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건 필요한 일이었고, 카렌 역시 동의한 일이었으니까. 만약 네토루와 커플링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츠오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걸까.

“원망하냐고? 물론이지. 만약 네토루만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커플링 파트너를 빼앗길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하지만 네토루 덕분에 네가 살았잖아. 그 녀석 아니었으면, 너 그때 시계탑에서 분명 죽었을 거야.”

“아니야. 반대로 네토루가 없었으면 오히려 그때 내가 죽을 위험에 처할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시계탑 위에 올라갈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

시계탑 위에 올라갈 이유가 없었을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인 걸까. 하지만 나츠오는 그 말의 의미를 알려줄 생각이 없는지 주먹을 쥔 채 말했다.

“카렌.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네가 오로지 나하고만 커플링하면 좋겠다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나하고만···.”

“나츠오···.”

“그냥 이번 임무 안 따라가면 안 돼? 굳이 그 남자의 세컨드가 될 필요가 있는 거야? 세컨드면 정작 따라가도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잖아? 그냥 이곳에 나랑 같이 남아줘···. 그러면 나도 어떻게든 빨리 회복해서 너랑 다시 커플링 파장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중요한 임무야. 내가 어떻게 남아.”

“어떻게 남냐니···. 어차피 여기에 다른 부대원들도 남잖아? 너도 아프다고 해. 응? 그게 뭐가 어려워? 지금 이렇게 내가 부탁하잖아···.”

나츠오의 말대로다. 이번 임무에는 모든 부대원들이 따라가는 게 아니었다.

나츠오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몇몇 인원들은 도시에 남아 몸이 회복할 때까지 요양할 예정이었다.

그러다가···. 얼추 괜찮아졌다고 판단되면 393부대가 복귀할 때까지 다른 부대로 잠시 파견될 예정이었다. 다른 부대라고 상황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츠오의 부탁은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그동안 393부대를 위해서 열심히 싸웠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만 조금···.”

“···나츠오. 그래서 지금 사령관님하고 부대원들에게 아픈 척 하면서 거짓말을 하자고?”

“···그래. 이번 한 번만.”

나츠오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렌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이건 어린애 투정과도 같았다. 갑자기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나츠오···. 커플링이 깨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알겠는데···.”

“하···.”

거기서 나츠오는 소리 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건 웃는 게 아니었다. 마치 내면에서 무언가가 산산조각 난것처럼 처절한 웃음이었다.

“···카렌. 네가 알기는 뭘 알아? 내 마음은 하나도 몰라준 상태로 매번 네토루, 그 남자 옆에서 웃고 있었으면서···.”

“나츠오···?”

“너는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 모를 거야. 지금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정말 나도 너한테는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네가 마지막으로 내 부탁을 들어주면 그 녀석 말을 거절하려고 했는데···.”

“엣···!?”

말이 끝나는 다음 순간이었다. 나츠오가 갑자기 거리를 좁혀오더니 손을 뻗어왔다.

순간 놀라서 카렌은 그의 손을 떨쳐내기 위해 힘을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여성 파일럿이 남성 파일럿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자, 잠시만···. 나츠오···? 꺄아앗?!”

카렌은 그대로 나츠오의 힘에 바닥에 밀쳐졌다.

등이 바닥에 부딪치며 알싸한 아픔이 온몸을 가로지른 가운데, 나츠오가 그런 카렌의 몸을 덮치듯 손을 뻗어왔다.

“으읏···?”

그대로 양 손목이 붙잡힌 채 카렌은 흔들리는 눈으로 나츠오를 올려다보았다.

나츠오의 차가운 검은 눈동자.

그 안에는 카렌의 얼굴만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카렌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뭐지, 이 상황은···?

혹시 내가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나츠오가 이럴 리가 없는데···.

그렇기에 카렌은 애써 웃었다.

“나, 나츠오···. 무섭게 왜 이래? 응? 나···. 이런 장난 별로 안 좋아해···.”

그런 카렌의 말에 나츠오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도 괴로운 것처럼, 아픈 미소였다.

“···걱정 마. 카렌. 아프게는 안 할게. 너는 나한테 제일 소중한 존재니까. 게다가 그 녀석은 오히려 기분 좋을거랬어. 그리고 나도 최대한 너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아, 아프게는 안 하겠다니··· 지금 뭘···.”

나츠오는 대답 대신에 손을 움직여 카렌의 셔츠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카렌의 옷자락이 나츠오의 손가락을 따라 질질 올라가며, 새하얀 피부와 배꼽이 드러났다.

“그, 그만···. 나츠오?!”

이윽고 카렌이 입고 있던 파일럿용 브래지어까지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었다. 카렌은 헛숨을 들이 삼켰다.

······이 녀석. 설마 날 강간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건 악몽도 장난도 아니다. 그제야 카렌은 애써 부정했던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츠오는 지금 나를 정말 진심으로 덮치려고 하고 있다.

“으윽! 놔! 이거, 놓으라고! 나츠오···!”

카렌은 몸을 비틀었다. 나츠오한테 깔아뭉개진 몸을 흔들며, 붙잡힌 손목을 쳐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런 카렌의 발버둥에 나츠오는 더욱 슬픈 듯한 눈을 했다.

“카렌···.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내가 그동안 너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 마음에 들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너 지금···. 뭘···. 말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당연히 네가 나랑 하게 될 줄 알았어. 커플링 파트너를 떠나···. 좋아하는 남녀 관계로서···. 네 처음을 가져가는 게 분명 내가 될 줄 알았다고···.”

“처, 처음을 가져가다니···.”

“솔직히 너도 날 좋아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카렌! 어떻게 날 놔두고 다른 남자한테···! 안길수가 있는 거야···? ”

“······뭐?”

카렌의 눈이 커졌다. 나츠오는 강한 분노가 담긴 눈으로 그런 카렌을 노려보았다.

“아직 성년도 아닌 주제에···. 나는 너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네토루한테는 그렇게 쉽게 허락해주는 건데!”

“너···. 지, 지금 무슨 오해를···. 나···. 네토루랑 그런 관계가 아니······.”

“거짓말 마! 내가 다 봤는데···!”

“으으윽!”

나츠오의 비명과 같은 고성에 카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섭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츠오가 이렇게 두렵게 느껴지다니.

오래된 인연이다.

어린 시절. 카렌은 나츠오와 기관에서부터 함께 했으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힘을 합쳐 해결했다.

카렌에게 있어 나츠오라는 존재는···.

씩씩하고···. 용감하고···. 정의로운 사내아이였다.

비록 가끔씩 철부지처럼 굴 때가 있어도 믿을 수 있는 커플링 파트너였다. 393부대에 있을 때도 몇 번이나 의지했다. 친했던 언니 오빠들이 죽을 때 같이 울었으며,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같이 기뻐하였다.

희로애락을 함께한 가족 같은 존재.

어떻게보면 카렌에게 있어 제일 오래된 소중한 인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객관적으로 봐도 카렌의 인생에 있어 나츠오가 차지하는 부분 결코 적지 않았다.

이게 악몽이면 좋겠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츠오가 활짝 웃으며 장난이었다고 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악몽보다도 지독했다.

스르르륵──.

옷이···. 벗겨진다. 입고 있던 티셔츠는 어느새 어깨 위까지 올라온 채 브라가 완전히 드러났고,

나츠오는 다음 목표를 찾아 손을 아래로 내리며 카렌의 바지까지 끌어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팬티가 드러날 때쯤 카렌은 허벅지를 꼬며 바지가 벗겨지는 걸 막았다.

“나, 나츠오···. 하, 하지마···. 부탁이니까···.”

카렌은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나츠오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현실감 없는 지금 상황도 그렇고, 나츠오가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슬퍼서였다.

하지만 카렌이 애원해도 나츠오는 멈추지 않았다.

“카렌···. 미안해···. 하지만 조금만 참아···. 분명 괜찮을 거니까? 응?”

단지 어느새인가 나츠오 역시 눈물을 흘리며 카렌의 옷을 벗기고 있을 뿐.

카렌은 입술을 달싹이며 힘겹게 말했다.

“그, 그만해! 나, 나도 이제 소리 지를 거야···! 더 이상 못 봐준다고···!”

소리 지르면 방에 있을 부대원들이 분명 반응할 터.

당연하지만 카렌이라고 그걸 몰라서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카렌이 섣불리 그렇지 못한 건 전부 나츠오를 걱정해서였다.

카렌은 나츠오를 강간범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츠오를 말로 타일러서 지금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허물없이 지낸 파트너를 제 손으로 파멸로 이끌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나츠오는 그런 카렌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역시. 카렌, 너는 상냥해.”

옷을 벗기던 나츠오의 손이 멈춘다.

그 순간 카렌은 희미하지만, 희망을 엿보았다. 만약 여기서 나츠오가 멈춘다면······. 하지만.

“···그러니까 더 포기할 수가 없잖아. 어떻게 너를 다른 남자한테 주겠어.”

“나···츠···오?”

카렌은 숨이 턱턱 막혀오는 걸 느꼈다. 어느새인가 나츠오가 카렌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걱정 마···. 분명 기분 좋을테니까···. 자고 일어났을 때는 모든 게 괜찮아져 있을 거야. 우리 예전처럼 다시 돌아가자···.”

숨이 부족해서일까.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카렌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죽음이 무섭지는 않다.

다만 카렌은 이 상황이 너무 슬플 뿐이었다.

어째서. 왜 이렇게 되는 거지.

흐릿해지는 시야. 하지만 그 저편으로 보이는.

괴이하게 일그러진 나츠오의 얼굴은 카렌이 알던 그의 모습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그래서일까. 점차 몽롱해지는 의식 속. 카렌은 이 모든 것이 그저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부족해지는 숨과 함께 몸에 흐르던 떨림도 사그라진다. 마치 속 빈 인형처럼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고 있었다.

피부와 공기의 경계선이 거의 없어져, 이제 곧 허공에 녹아 버릴 것 같은 감각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도,

분노에 받쳐 소리치는 것도,

카렌은 그 어느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윽······.”

하지만 그러한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그 순간 카렌은 금발 사내를 떠올리고 말았다.

언제나 위험할 때면 도와주던······.

그리고 그때였다.

─카렌. 잠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믿기 어렵지만 기다렸다는 것처럼 네토루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오고,

“······!”

그 순간 나츠오가 놀란듯 흠칫 떨더니,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을 풀고 말았다.

그 마지막 기회에 카렌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네토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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