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NTO 001
* * *
이튿날이 지났다.
드디어 엘프란디아 국경을 넘는 임무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아.”
최종 점검을 위한 마지막 회의. 늦은 저녁까지 계속된 부대 회의가 끝나고 리엔은 잠시 테라스로 나왔다. 바람이나 좀 쐬면서 한숨 돌리기 위해서였다.
리엔은 뻐근한 어깨를 꾹꾹 눌러주면서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39구역과 비교하면 확실히 휴식 시간이 많아진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사령관 특성상 남들보다 할 일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다.
한 부대를 책임지는 사령관으로서 준비하고, 확인해야 할 것이 매일 같이 쌓여 있는 것이다.
내심 누군가 대신해주면 좋겠지만······. 그런 건 꿈만 같은 일이겠지. 그나마 아스나가 지난 며칠 동안 옆에서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고 있어 준 것만 해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스나에게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사령관인 리엔 만큼이나 피곤함에 찌들어 사는 게 아스나였다.
특히 오늘은 가 설치된 사령관용 지휘 차량 때문에 점검할 게 많다고 하던가. 그런 사정 속에서도 리엔을 도운 것이다.
현재 아스나가 점검 중인 지휘 차량은 이번 임무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리엔은 제39구역에서 부대 내부에 콕 틀어박힌 채 버그들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하지만 이번 임무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사령관의 주된 역할은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대규모 관측이다. 버그들의 움직임과 지형을 관측하여 파일럿들에게 데이터 링크로 지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임무에서는 제39구역에서 했던 것만큼이나 광범위한 관측은 할 수가 없다. 관측탑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 임무의 활동 구역은 애초에 국경 밖이었다.
‘···설마 내가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관측을 하게 될 줄이야.’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이번 임무에서는 가 설치된 지휘관용 전술 차량이 필요했다. 사령관이 직접 움직이면서 구석구석을 관측하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이번 임무에 사령관들이 대거 투입되는 건 이래서였다. 한 명이라도 더 많으면,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영역을 탐색할 수 있다.
“···오래 걸리겠지.”
리엔은 내일이면 시작될 자신의 험난한 생활을 떠올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엘프란디아의 광활한 영역을 관측으로 전부 훑어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하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꾹 참고해낼 수밖에 없다.
가서 무언가 성과를 내야 한다. 버그들의 움직임이라거나, 새롭게 둥지를 튼 여왕의 위치라거나···. 뭐든 좋으니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야지만 무언가 대비할 수 있으니까. 이번에 있었던 프라시온 같은 사태는 다시 겪기 싫다.
“···힘내자. 리엔.”
짝짝. 두 손으로 제 볼을 때리며 자기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던 리엔은 등을 돌렸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밤은 푹 자는 게 좋을 것이다.
* * *
“어, 어째서···. 제가 이번 임무에서 제외된 겁니까!”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임무를 앞두고 불미스러운 일로 전력에 공백이 생기니 책임자 중 한 명으로서 난감할 수가 없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베를레앙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틀 전에 케레네랑 커플링이 깨진 볼드로이였다. 베를레앙의 냉담한 시선에 볼드로이는 다급한 얼굴이 되었다.
“다, 다시 커플링해보면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케레네를 잘 타일러 볼 테니······.”
말하면서도 볼드로이는 옆을 바라보았다. 케레네는 아까부터 아무런 말이 없이 조용히 제 자리만 지키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볼드로이가 소리쳤다.
“···케레네!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해봐!”
“······”
하지만 이름을 불러도 케레네는 묵묵부답이었다. 단지 자신을 노려보는 볼드로이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차갑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의 몸 밑에서 창녀처럼 교태 부리던 여인이 거짓말 같다. 지금은 모든 것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너무나도 차가워져 있었다.그날 네토루의 방에 간 뒤로 계속 저 모양이었다.
“···볼드로이 경, 포기하게. 이미 나는 물론이고 위에서도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으니까.”
베를레앙은 볼드로이에게 커플링 파장이 기록된 종이를 내밀었다. 곧바로 손을 뻗어 내용을 확인한 볼드로이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파장의 수치가 이상할 정도로 낮았다.
“이, 이게 무슨···. 지금 이거 정말 제대로 된 수치가 맞는 겁니까?”
“글쎄···. 나도 잘못된 기록이면 좋겠네. 하지만 몇 번을 확인해봐도 결과는 똑같다고 하더군.”
커플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저조한 수치.
베를레앙 역시 이번 일은 난처했다. 이런 건 지금까지 없던 이변이었다. 특히나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 여기사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던 사건.
그래서 이번에 케레네는 특수한 케이스로 분류되어 수도의 병원에서 정밀 검사받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건 케레네를 보호해주기 위한 베를레앙의 마지막 ‘배려’이기도 했다. 계속 이곳에 놔뒀다가 볼드로이한테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까.
두 사람이 커플링할 수 없다고 판단된 이상 차라리 케레네를 잘 관리해두다가 다른 곳에 써먹는 게 낫다.
기사들이 비록 귀족이라면서 종종 오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반대로 여기사 역시 귀중한 자원이었다.
애초에 성기병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남녀가 짝을 이루어야 하니, 어느 쪽이 더 값어치 있다고 구분하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이다.
그렇기에 베를레앙은 케레네라는 여기사가 다른 곳에 귀중하게 쓰이기를 원했다. 세레스처럼 말이다.
‘···정 안되면 훈련소에 교관으로 집어넣어야 하나.’
안 그래도 마침 여기사를 육성하는 훈련 기관에서 요청이 있던 참이었다. 20대 후반을 바라보는 케레네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대로 교관의 자리에 밀어 넣는 것도 썩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여기사는 30대가 될 때쯤 은퇴하길 마련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베를레앙의 생각을 볼드로이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베를레앙 경.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자네는 도시에서 대기하게. 마침 이 근처의 다른 부대에서 여성 파일럿들이 몇 명 대기 자원으로 남아 있다고 하더군. 운 좋으면 대기하는 동안 임시로 커플링할 파트너를 찾을 수 있을 거네.”
“자, 잠시만요. 지금 설마 저 보고 기관 출신 파일럿이랑 커플링 하라는 겁니까···?”
“현재 기사단 내부에 대기 자원으로 있는 여기사들이 없다는 건 자네도 알 텐데?”
“······”
베를레앙의 눈빛이 서늘하고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한심한 것을 쳐다보는 듯한 냉정한 눈이었다. 볼드로이는 주먹을 쥐면서도 시퍼렇게 질린 안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처음부터 커플링이 안 되면 모를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여기사와 커플링이 깨진 기사는 없었다. 그렇기에 볼드로이는 기사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된 상태였다.
명예도, 파트너도 전부 잃어버린 것이다.
* * *
“몸은 어때?”
“···아파요.”
“아프다고? 어디가?”
“···여기요.”
걱정해서 물었건만. 침대 위에 조신하게 앉아 있던 케레네는 천천히 허벅지 사이를 벌리더니, 안 그래도 속이 다 보일 듯한 짧은 치맛자락을 슬그머니 집어 올렸다.
그러자 마력 신경계의 각인과 함께 허벅지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음부를 가리고 있는 속옷이 보였다. 남자로서는 시선을 떼기 어려운 야릇한 풍경이다.
더욱이 한 번 몸을 섞었던 여자다. 의식하지 않아도 케레네와 가졌던 잠자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순종적이면서도, 남자를 유혹할 줄 알던 여자.
만약 여기서 요구한다면 케레네는 분명 순순히 받아주겠지. 하지만 네토루는 케레네의 손을 잡고서 들추고 있던 치맛자락을 정리해주었다.
“어머···?”
“케레네.”
네토루는 케레네의 유혹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그래서 몸은 정말로 어떤 거야? 마력 신경계가 바뀐 이후로 정말 아픈 곳은 없는 거지? 내가 떠나기 전에 솔직히 말해. 그래야 뭘 해줄 수 있으니까.”
“흐음···. 아픈 곳이요?”
진지하면서도 걱정 어린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유혹이 통하지 않은 걸 깨달은 걸까.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네토루를 응시하던 케레네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네. 다행히 지난 며칠 동안 몸에 큰 문제라고 할 건 없었어요. 실제로 저번에 볼드로이 경이랑 커플링 해봤을 때도 제 마력 신경계는 괜찮았고요.”
“······”
정말 괜찮은 걸까. 네토루는 케레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한 여자의 마력 신경계를 통째로 비틀어본 건 네토루도 처음이었다.
케레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마력 신경계를 개변한 건 카렌을 위한 사전 연습이었다.
그렇기에 케레네한테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 물론 몸에 큰 부작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건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내일 네토루가 출격한 이후로 갑자기 몸이 나빠지면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네토루 입장에서는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한 네토루의 걱정을 꿰뚫어 본 걸까. 케레네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웃음 지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마음 편히 임무 수행하고 오세요. 괜히 당신이 그러니까 저만 더 신경 쓰이잖아요?”
“그런가.”
네토루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케레네의 몸에 문제가 없다면 이제 이걸로 카렌의 마력 신경계를 재구축할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실행에 옮기는 것뿐.
다만···. 이걸 카렌한테 설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
역시 오늘 밤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겠지. 어차피 그 아이가 성년이 된다면 더 이상 머뭇거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곧 카렌이 성년이 된다고 하던가요?”
“······”
그때였다. 돌연 난데없는 케레네의 질문에 네토루는 멈칫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케레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야 하룻밤 동안의 불장난에 불과하니 뭐라고 참견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해요. 세레스, 그 아이가 은근히 질투 좀 많은 것 같았으니까. 지금까지 평생 제 손에 아무것도 없이 지냈던 아이였던 만큼, 남한테 양보하는 법을 잘 모를 거예요.”
“······”
“아무리 지난 수년간 친하게 지내던 여동생 같은 아이라도 여자의 질투만큼은 추한 건 없거든요. 애초에 당장 저만 봐도 그렇고요. 그러니 괜히 커플링 파트너끼리 싸우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주의하세요. 알겠어요?”
즉, 여자 관계를 조심하라는 건가.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드디어 내일이네.”
늦은 저녁이었다. 샤워를 끝내고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아내던 카렌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밤하늘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카렌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엘프란디아의 국경을 떠올려보았다.
낯선 이국의 땅.
이제 곧 그런 곳에 간다고 하니 뭔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혹시 엘프들을 만날 수도 있는 걸까.
비록 두 달 전쯤에 관측탑 사건으로 네토루와 함께 엘프란디아의 국경 지대를 잠시 넘어가기는 했지만, 제대로 안쪽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러니 카렌에게는 사실상 엘프란디아로 넘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 기대되기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한층 더 앞서고 있었다. 저번에 란에게는 애써 강한 척 했지만, 카렌 역시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번 임무는 단순히 제39구역을 지킬 때 하고는 다르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 일이다.
······부디 무사히 끝나야 할 텐데.
마침 커다란 보름달이 밤하늘을 빛내고 있었기에, 카렌이 멍하니 달을 구경할 때였다.
똑 똑.
누군가 카렌의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온 걸까. 뭔가 싶던 카렌은 젖은 머리를 정리하던 수건을 세탁통에 집어넣고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어본다.
그러자 나츠오가 카렌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카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나츠오, 무슨 일이야?”
“······”
그런데 나츠오는 대답이 없었다. 단지 어딘가 공허한 눈으로 카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음울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나츠오의 얼굴.
이윽고 입술을 달싹이던 나츠오가 나직이 말했다.
“······너한테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할 이야기?”
“응···.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방 안에 들어가서 해도 될까?”
이야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지만···. 내일 떠나게 되면 당분간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들어두는 게 좋겠지.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