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선물
* * *
낮이 짧은 계절이었다. 점심 무렵을 넘어서 도착했던 광장 위의 하늘이 점점 붉어지고 있다. 낮도 밤도 아닌 애매한 시간. 그러한 경계선 위에서 세상 모든 것의 윤곽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의 수가 줄고, 하나둘씩 발걸음을 돌린다. 온천지가 노을의 빛으로 물들고 있는 중앙 광장은 서서히 하루를 끝낼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점점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노점상이든, 그나마 버그들의 공격을 피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가게든, 제 각자 원래 있을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친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각자 자기만의 슬픔을 껴안고 있는 안타까운 얼굴들뿐.
카렌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는 전재(戰災)가 만연해 있다. 전쟁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다음날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왕정이 옳다. 공화정이 옳다.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한 채 오랜 혁명기를 거쳐 이제는 버그들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어느덧 갓난아이였던 아이들이 평화로움 따위는 모른 채 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오랜 기간이었다.
당장 카렌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은 전쟁으로 점철된 기억들밖에 없었다. 평화로운 것이 어떤 것인지 그녀 역시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린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도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한 아이들이 이번 세대를 이어서 계속 버그들과 싸울지도 모른다.
최전선에서 버그들과 싸우면서 카렌은 종종 느낀다.
이 싸움의 끝이 도무지 보이지를 않는다고. 세상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 기분이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외롭게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지금까지 온갖 재난들이 있었다고 했다.
악마, 신, 마왕, 마녀, 드래곤.
지금껏 수많은 존재들이 세상을 위협했고 사람들은 그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러한 구전들은 대륙 곳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왕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신화가 되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어떠할까.
버그라는 건 지금껏 나타난 적 없는 새로운 재난이다.
과연 이번에도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일까.
광장에 마련되어 있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카렌은 무릎 위에 올려둔 책을 쓸어만 졌다.
결국 오늘 그녀가 시장을 돌아다니며 산 것은 제목 없는 동화책이었다. 어느 나라의 신화나 전설 따위를 담은 것이 아닌, 누군가가 순수하게 새로 만들어낸 이야기.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보면 앞으로 미래가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야기라고 해야겠지. 책을 쓴 것은 흥미롭게도 어린아이였다. 노점상에서 웬 아이가 책을 팔고 있는 게 신기해서 무심코 사버렸다.
“···후후.”
책을 펼쳐보면 삐뚤삐뚤한 어린애 글씨체가 가득 채워져 있다. 하지만 카렌은 그러한 글자 하나하나도 소중하다는 듯이 천천히 읽어보았다.
읽어보니 내용은 썩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새로웠다.
본래 동화에는 기사와 마법사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담겨 있기 마련이었다. 성기병이 없던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새롭게 쓴 동화 속에서는 오로지 성기병들만이 나오고 있었다. 용감한 남녀가 성기병에 타고 버그들과 싸우며, 사람들과 도시를 지키는 이야기.
어쩌면···. 수십, 수백 년이 지난 먼 미래에서는 카렌이 있는 현시대의 이야기들이 동화와 전설이 되어 사람들에게 구전될지도 모른다.
현시대에서는 버그들이 재앙과도 같아도, 결국 언젠가는 역사 한편의 사건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카렌. 그거 꽤나 마음에 드나 보네?”
같은 벤치에 앉아 옆에서 다리를 둥둥거리고 있던 란이 문득 그리 말했다.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란은 잠시 예전 일을 되새기고는 말을 이었다.
“···보면 너는 항상 동화책만 사네. 작년에도 부대에 복귀할 때 동화책 샀잖아.”
393부대라고 항상 제39구역에 계속 있던 건 아니었다. 사령관의 판단하에 여유가 될 때면 두세 명 정도 간추려서 도시로 보내 가볍게 휴식 시간을 주고는 했다. 일종의 휴가인 것이다.
“저번에 샀던 건···. 아마 샤를기우스의 이야기가 담긴 동화책이었지?”
“아···. 맞아. 그걸 잘도 기억하네.”
카렌이 저번에 샀던 책은 프랑기아 왕국의 건국 신화이자 동시에 흔하디 흔한 영웅 신화가 담긴 책이었다. 멋스러운 용사가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무찌른다는 이야기.
이런 영웅 서사가 담긴 이야기는 어느 나라나 하나둘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흔하다.
그리고 흔한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사람들은 힘들 때마다 바라는 법이었다.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자신들을 구원해줄 영웅을.
그러한 욕망에는 어른이나 아이 가를 것이 없다.
당장 오늘 카렌이 새로 산 동화책만 해도 그러했다.
이제 겨우 열댓 살 정도 된 아이가 적은 이야기의 뼈대는 어린애 특유의 순수함이 담긴 영웅 찬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정말 이러한 존재가 나타나 줄까?
모두가 위태로운 시대 속에서, 어린아이가 적은 이야기처럼 모두를 이끌어줄 매력적인 존재가···.
“···이거 은근히 재밌네?”
기다리는 게 심심했던 것일까. 어느새인가 카렌에게서 동화책을 빌려 읽고 있던 란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란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거 너무 꿈만 같은 이야기들뿐이다.”
“어쩔 수 없잖아. 애가 쓴 거니까.”
“으음···. 뭐, 그런가?”
탁 하고 란이 책을 덮었다.
바람이 분다. 점점 광장에 활기가 사라지는 가운데.
“카렌. 이번 임무는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엘프란디아의 상황이 안 좋으면 어떻게 하지?”
란은 언제 올지 모를 린을 기다리는 게 지친 것인지 제 무릎을 끌어안더니 얼굴을 묻고는 말을 꺼냈다.
카렌은 푹 수그리고 있는 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왜. 걱정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 이번에 엘프란디아에서 넘어온 버그들은 뭔가 이상했잖아. 게다가 데스 웜이라는 것도 갑자기 나타나고. 그거 네토루가 막아서 다행이지 정말 큰 일이었다고.”
“음···. 그건 그렇지.”
“애초에 지금까지 온갖 상황을 겪어 봤지만, 이번 같은 일은 없었어.”
카렌과 란은 같은 또래의 소녀들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393부대에서 많은 것을 같이 하였다.
죽을지 모를 위험한 상황도 함께 몇 번이나 헤쳐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있었던 프라시온 사태는 두 사람도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만약 갔는데 데스웜 같은 게 또 나타나면 어떻게 해? 나···. 솔직히 그렇게 커다란 괴물이랑 싸우는 건 자신이 없다고···.”
“너무 걱정 마. 나타나면 네토루랑 내가 어떻게든 상대해줄 테니까.”
“쳇. 어떻게든 해준다니···. 정작 저번에 데스 웜이랑 싸웠던 건 세레스였잖아?”
“윽···. 그,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세레스한테만 맡길 수는 없잖아? 나도 그 녀석의 커플링 파트너인데···.”
“흐음···. 그 녀석의 커플링 파트너···?”
“뭐야···. 그 눈은.”
“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란은 카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뭔가 거리감이 있다 싶었는데, 이제는 완전 그 녀석의 커플링 파트너가 다 되었다 싶어졌다. 어느새인가 자신을 네토루의 파트너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카렌이나, 세레스나. 예전에는 네토루를 그렇게 싫어할 때는 언제고···. 둘은 언제 이렇게 변했을까.
흥미로운 카렌의 변화에 란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카렌의 눈이 살짝 커졌다.
“···. 저 녀석 이제야 돌아오네.”
카렌이 바라보는 곳에 란도 시선을 옮기자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츠오였다.
이윽고 나츠오가 돌아오자 카렌은 눈매를 치켜세우며 잔소리부터 시작했다.
“나츠오. 혼자서 어디를 갔다 온 거야?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하하···. 미안. 그래도 이걸 봐서라도 좀 참아줘.”
카렌의 꾸지람에 나츠오는 머쓱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걸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가 있었다.
그걸 본 카렌의 눈에 의아하게 변했다.
“응···? 갑자기 이게 뭐야?”
“뭐긴. 네 생일 선물이지. 이제 곧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
이런 건 생각을 못 했던 건지 카렌은 아, 하고 탄성을 흘리다가 곧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쿡쿡 웃었다.
카렌은 그제야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되었다.
나츠오가 갑자기 왜 중앙 광장에 오자고 했던 건지, 왜 갑자기 혼자 사라진 건지 말이다. 아무래도 선물 고르려고 혼자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나 보다.
“뭐야. 설마 이거 때문에 그렇게 혼자 돌아다닌 거야? 같이 오자고 했으면서?”
“뭐···. 그렇지. 어쨌든 빨리 받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이거 지금 열어봐도 돼?”
“물론이지.”
기대된다. 카렌은 나츠오에게서 조그마한 상자를 받고서 바로 열어보았다.
아니, 열려던 찰나였다.
두 사람 사이에 낭랑한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카렌!”
“어? 린이다.”
카렌을 잠시 상자를 열어보려던 걸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 린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옆에는 린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다.
네토루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린은 네토루와 함께 있던 건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소매치기 일은 제대로 해결된 듯했다. 천진난만한 린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후아···. 힘들었어···.”
총총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던 린은 그대로 카렌을 꼬옥 껴안고는 얼굴을 비볐다. 어딘가 지친 듯한 토끼 같은 모습에 카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혼자 그렇게 뛰어다녔으니 힘들기도 했겠지.
“···소매치기 일은 잘 해결됐어?”
“물론이지! 내가 누구야?”
“그래, 그래. 고생했어.”
카렌은 린을 칭찬하듯 쓰다듬어주면서도 힐긋 옆을 쳐다보았다. 여느 때처럼 네토루가 무덤덤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인다. 그게 부담스러웠던 카렌은 넌지시 말을 꺼내 보았다.
“···뭐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뭘 그렇게 봐?”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네토루가 돌연 한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카렌의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만 지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렌은 깜짝 놀라 흠칫했다.
“으앗? 야, 야···. 가, 갑자기 뭐야.”
“가만히 있어 봐. 줄 게 있으니까.”
“줄 거라니···? 읏···. 야···. 뭐, 뭐 하는···.”
카렌은 얼굴은 붉힌 채 얼어붙었다. 이건 너무 거리가 가깝다. 게다가 갑자기 낯간지럽게 남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고 있는 건 또 무엇인가.
주변을 보니 린과 란이 기묘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나츠오 역시 표정이 이상하다.
이쯤 되니 카렌으로서는 네토루가 주변에 다른 애들이 다 보는 곳에서 갑자기 뭘 하는 건가 싶어졌다.
“야···. 자, 장난치지 말고 떨어져···.”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 녀석을 밀쳐내든가 해야 하는데 어째 몸이 선뜻 움직이지를 않았다.
카렌이 그 이유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건 학습된 무력감이었다. 치료할 때마다 매번 이러한 느낌이었으니까. 녀석은 항상 제멋대로였다.
이윽고 한동안 제 맘대로 카렌의 머리카락을 쓸어만 지며 무언가 달아주던 네토루가 툭 말했다.
“예쁘네.”
“······!”
예쁘다고? 네토루의 말에 카렌은 훅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게 뭔가 싶어 더듬더듬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핀?”
카렌은 어느새 자신의 머리카락에 머리핀이 달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천천히 주변에 있던 가게 유리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유리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곳에는 네잎클로버 형태의 머리핀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