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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29화 (129/148)

〈 129화 〉 선물

* * *

의외로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다.

오면서 보았던 다른 구역들과 다르게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활기 넘치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긍정적인 면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도 군데군데 현 시대의 그늘이 있다. 부랑자에 가까운 꼴을 하고 있는 시민들이나, 구걸을 하고 있는 이름 모를 노인들.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생활이다. 그러던 중에 버그들이 도시 안까지 침투했으니 안 그래도 어렵던 생활이 더욱 힘들어졌겠지. 이러한 현실을 보고 있다 보면 마음이 여러 의미로 착잡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점에서 성기병 파일럿들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이상 도시의 궁핍함이 현실감 있게 와닿지 않다는 것이다.

성기병 파일럿들이 굶는 일은 없다.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반대로 부족함이 없는 지원이 제공된다. 적어도 평균적인 시민들의 생활과 비교할 때는 그러하다.

기사단이든 기관이든 현시대에서 성기병 파일럿들은 그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는 고급 인재였다.

그들 아니면 버그들과 싸울 수 없다. 그러니 오로지 그들이 싸우는 것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현명하다. 부대 안에 파일럿들을 위해 온갖 잡일을 처리하는 요원들이 상당수 배치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대신 그 누구보다도 최전선에서 전력을 다해 싸워야 했지만 말이다.

중앙 광장. 네토루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로를 가로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하지만 그가 이곳에 온 건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카렌에게 생일 선물로 줄 걸 찾고 있다고 해야 할까.

카렌의 생일이 이제 코앞이다. 아마 이번 임무 중에 생일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러니 도시를 떠나기 전에 그녀가 좋아할 만한 걸 찾아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케레네 일로 신세 졌을 때 당돌하게 생일 선물을 달라고 요구했던 아이였으니, 혹시라도 까먹고 있으면 괜히 서운해 할 수도 있을 터.

그런데 뭘 주는 게 좋을까.

제법 오랫동안 걸어 다녔던 네토루는 미간을 좁혔다. 일단 밖에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뭘 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확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렌한테 직접 물어볼 걸 그랬나.

조금 모양새 빠질 수 있지만 그래도 그 녀석 성격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괜히 좋아하지도 않는 걸 줬다가 곤란해하면, 이쪽도 난처해진다.

그렇게 카렌에게 생일 선물로 줄법한 걸 찾아 얼마나 더 걸어 다녔을까.

─툭 하고 옆구리를 치고 가는 묵직한 감촉이 있었다.

뭔가 싶어 보니 웬 꼬맹이가 고개를 숙이며 옆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조그마한 몸집. 어린 소년은 그렇게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2.

사실 린과 란은 나츠오가 왜 갑자기 혼자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애초에 모를 수가 없다. 이제 곧 카렌의 생일이었으니까. 더욱이 성년이 되는 특별한 날이다.

다른 생일이라면 그냥 말로 축하만 해주겠지만, 린과 란도 성년이 되는 생일에는 카렌에게 선물을 받았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린···. 네토루도 딱 보니까 우리나 나츠오처럼···?”

“응. 아마 그런 거 같은데?”

린과 란은 카렌 모르게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네토루는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동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팍 하고 느낌이 왔다. 애초에 마침 린과 란도 선물을 사기위해 찾고 있던 가게들이었다.

그렇게 네토루를 따라다니며 린과 란도 카렌에게 선물로 줄법한 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네토루가 이번에는 어디로 가나 싶어서 쳐다보던 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웬 소년이 네토루를 툭 치고 옆을 스쳐지나가며 품속에 있던 지갑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네토루는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뭐야, 저 녀석 왜 저렇게 멀뚱히 쳐다보는 거야? 딱 봐도 소매치기잖아! 설마 눈치 못 챈 건가?”

“···으응? 그, 그런가? 그냥 부딪친 거 아니야?”

방금 같은 걸 보았지만, 카렌은 전혀 눈치 못 챈 모양이다. 린은 미간을 좁혔다.

“바보야! 방금 그 꼬맹이의 손이 누렁이 몸 훑고 지나간 거 못 봤어?!”

“······모, 못 봤는데?”

주변 사람 놀라도록 갑자기 린이 목소리를 높인 탓일까. 덕분에 옆에 있던 카렌과 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

“···아읏! 답답해! 그냥 내가 대신 잡아줄까?”

“린, 네가? 그런데 그 아이 이미 사라졌는데? 여기서 어떻게···.”

“헷. 소매치기가 도망칠 곳은 뻔하지 뭐.”

그리 말한 린은 다리에 힘을 주더니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카렌은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빠르다.

순식간에 사람들 틈새로 린의 등이 멀어지더니 모습을 감춘다. 일반인의 신체 능력을 아득히 넘어선 움직임이었다. 카렌으로서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라고 해야 할까.

“우아···. 린, 정말 빠르네.”

“린이야···. 뭐, 우리랑 다르게 남성 파일럿들처럼 심장에 마력 신경계를 구축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신체 능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지.”

말릴 틈새도 없이 사라진 린을 보며 란은 못 말린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생긴 것도, 몸도, 자라온 환경도 똑같지만 란은 린처럼 빠르게 달릴 수가 없었다. 마력 신경계의 구조와 위치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여성 파일럿들은 성기병과 커넥팅 하기 위해 자궁구에 마력 신경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린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력 신경계는 남성 파일럿들과 다를 게 없었다. 성기병을 조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린의 성격이 저렇게 말괄량이인 건 남성 파일럿들처럼 강인한 신체와 특유의 성격이 절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린이 정말 잡을 수 있겠어?”

“아마 괜찮을 걸···? 소매치기는 우리도 전문이거든. 게다가 린은 다리가 유독 빠른 편이고.”

“···으응? 전문이라고?”

란의 대답에 카렌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소매치기가 전문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 의미를 순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한 카렌의 시선에 란은 생긋 웃으며 숨김 없이 말했다. 카렌이라면 알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성기병 파일럿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도 길거리에서 소매치기하고 살았으니까.”

썩 즐거운 과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굶주린 배를 채울 수가 없던 시절.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란은 린이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3.

솔직히 말해서 린은 네토루 좋아서 소매치기범을 쫓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별 깊은 관계도 아니다. 부대 안에서도 서로 반쯤 무시하고 지낸다.

그러니 린으로서는 그냥 무시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굳이 귀찮게 대신 잡아줘서 뭐하겠는가.

다만 문제는 저 지갑 안에는 카렌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한 돈이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린과 란은 카렌을 좋아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카렌의 생일을 축하해주었으면 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몇 없는 또래 친구였으니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거리를 뛰어다닌다.

그 움직임은 결코 느리지 않다. 그렇지만 린은 그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가볍게 가로질렀다. 작은 체구를 이용한 기민한 움직임 덕분이었다.

비록 쫓기 시작했을 때 이미 소년은 저 멀리 도망가고 있는 상태였지만 상관없다. 그러한 부족함을 메울 신체 능력이 린에게는 존재했으니까. 게다가 그 소년이 어디로 도망갈지도 뻔히 보였다.

소매치기라면 린도 지긋지긋하게 해보았다. 그렇기에 누렁이의 지갑을 훔친 아이가 어떻게 도망갈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년이 도망쳤을 방향을 유추하며 린은 몸안에 구축되어 있는 마력 신경계를 활성화시켰다.

대다수의 여성 파일럿들은 신체 능력 향상에 무관한 마력 신경계를 쌓아 올렸지만, 린은 다르다.

그녀는 언니인 란과 커플링하기 위해 남성 파일럿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고, 그렇다 보니 기타 다른 남성 파일럿들처럼 특출난 신체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러한 성기병 파일럿 특유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이용해 소년의 뒤를 얼마나 쫓았을까.

린이 쫓던 소년은 중앙 광장을 벗어나더니 포탄에 두들겨 맞은 탓에 반쯤 무너져내린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곳에 왜 왔나 싶어서 따라 들어가자.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린은 주춤거리며 건물 구석에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상황이 이상했다. 누렁이의 지갑을 훔쳐 도망쳤던 소년은 웬 폐건물 안쪽에서 불량스러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울먹이고 있었다.

“네? 자, 잠시만요! 원하는 액수 다 모아오면 엄마 유품 돌려준다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훔쳐 온 돈을 받을 생각은 없는데? 이 지갑은 내가 본래 주인 찾아서 돌려주마.”

“거, 거짓말! 돌려주기는 뭘 돌려줘! 너희들이 그냥 가져갈 생각이잖아!”

“아니, 그러면 제대로 된 돈을 가져오던가! 어디서 손 버릇 나쁘게 남의 지갑을 훔쳐?”

인상 좋지 않은 사내가 발로 소년의 배를 밀쳐냈다. 꽈당하고 넘어진 소년이 그대로 건물 바닥을 굴렀다.

더럽고 축축한 바닥이었다. 덕분에 소년의 얼굴과 몸은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그러한 상태로 몸을 한차례 떨던 소년이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나쁜 놈들! 애초에 너희들도 몰래 훔쳐 간 물건이면서!”

“뭐? 몰래 훔쳐가다니···? 우리는 그냥 피난 가다가 어쩌다 보니 주웠을 뿐이야.”

“으윽!”

히죽 웃던 사내가 소년의 얼굴을 발로 짓눌렀다.

그 폭력적인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린은 저도 모르게 비명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도시 곳곳에 부랑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건 여러차례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현장을 보게될 줄은 몰랐다.

저 소년에게 뭔 사연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짙은 그늘이 깔린 건물 안. 광원이라고는 부서진 창문들을 통해 희미하게 깔리는 얕은 햇빛들뿐.

이곳은 누가 봐도 범죄자들의 아지트였다.

막말로 여기서 저들이 저 소년을 죽여도 아무도 모르겠지. 그러한 불길한 감이 얼추 맞아떨어진다는 것처럼 몇몇은 아예 싸늘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구석에 숨어 지켜보던 린은 끝내 참지 못하고 땅을 박찼다. 그리고는 그대로 소년의 얼굴을 발로 짓누르고 있던 사내의 몸을 밀쳐냈다.

“크윽? 뭐, 뭐야! 이 년은!”

작은 체구. 가벼운 무게. 그렇지만 그러한 몸으로도 전력을 다해 몸으로 박치기를 하니 사내의 몸이 퉁 하고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 모습이 꽤나 꼴사납고 우스웠지만 린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의 손부터 붙잡았다.

“윽? 너, 넌 뭐야!”

“시끄럽고, 따라와!”

어리둥절 당황하는 소년의 손을 쥔 채 그대로 린은 달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어벙한 얼굴로 지켜보던 사내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뒤쫓기 시작했다.

“저년 잡아!”

“뭐야, 저 꼬맹이는!”

꼬맹이라니!

이쪽도 나름 어엿한 성인이건만 애 취급하는 남성들의 태도에 린은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다리를 멈추지는 않는다. 일단 이곳에서 탈출하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건물 입구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때였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입구 앞으로 여러 그림자가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방금까지 못 보던 사내들이 표정을 찡그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다른 인원들이 더 있었나 보다. 심지어 그들의 손에는 예리한 나이프까지 쥐어져 있었다.

‘···이, 이거 좋지 않은데?’

안색이 파리하게 변한 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에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나는 그냥 소매치기나 잡으려고 했을 뿐인데. 그리고 소년에게 몇 마디 따끔하게 야단칠 생각이었다.

소매치기를 계속했다가는 분명 나중에 나쁜 꼴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미 당하고 있나?

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도망칠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들과 싸울 수도 없다.

아무리 마력 신경계가 있다고 하지만, 손에 나이프까지 쥐고 있는 성인 남성 여럿을 혼자 쓰러뜨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애초에 맨몸으로 사람과 싸우는 재주는 없다.

지금까지 린이 배운 거라고는 버그들과 싸우는 방법뿐이었다. 손에 무기라도 있으면 모를까 이래서는 무리다.

눈앞이 막막한 상황에 린의 등허리 위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던 그때였다.

─저벅저벅

별안간 사내들이 막아서고 있던 입구 쪽에서, 새로운 발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그 발소리에 놀란 듯 막아서고 있던 사내들이 급히 뒤를 돌아봤다.

열댓명이 넘는 사내들의 시선 속에서.

햇볕을 등진 채 웬 금발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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