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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28화 (128/148)

〈 128화 〉 선물

* * *

393부대가 도시에 주둔하기 시작한지 벌써 며칠이 지났을까. 그 동안 엘프란디아 탐색을 위한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러하여 현재 격납고 내부에서는 성기병에 올라탄 기사들이 하나둘씩 커플링을 진행 중이었다.

격납고 내부에 세레스의 성기병과 비슷한 형태로 중무장한 성기병들이 일렬로 들어서 있으니 여러 의미로 대단한 풍경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건 베를레앙이라는 기사의 성기병이었다.

온갖 마법 각인들이 조밀하게 새겨져 있는 성기병 중갑을 착용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다른 기사들과는 그 위치가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무장들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일반적인 성기병들과 비교하면 그들의 것도 과할 정도로 대단했다.

아스나의 말에 따르면 기사들이 사용하는 모든 방어구들은 따로 마법 가공을 거친 거라고 하던가.

안 그래도 성기병 자체가 튼튼한데, 거기에 방어구의 힘까지 더해지면 얼마나 대단할까.

오죽하면 아스나가 일정 거리에서는 포탄에 맞아도 멀쩡하다고 할 거라고 확언할 정도였다.

카렌은 그러한 기사들의 성기병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사들의 성기병을 보고 있자니 문득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이렇게 기사들이 부지런히 시험 기동에 들어간 건 단순히 출격 전의 점검 때문은 아니었다.

임무를 며칠 안 남긴 상황 속에서 이틀 전에 갑자기 기사와 여기사의 커플링이 깨진 게 주된 이유였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커플링 파트너 관계에서 비롯된 갈등 문제인 듯했다.

즉, 커플링이 성립하는데 중요한 ‘감정’의 영역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기사단 내부에서 이런 식으로 커플링이 깨진 예는 없는 듯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물어보니 세레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그냥 모르는 게 좋을 거라고.

아무튼, 이번 사건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카렌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지금 같은 일은 오래전에 예정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 언니도 참 불쌍하네.”

솔직히 말해서 카렌하고는 별로 좋게 엮인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파트너에게 맞고 다니는 모습만큼은 카렌이 보더라도 불쌍할 수밖에 없었다.

카렌은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대련이 끝나고 콕피트에서 입술이 터진 채 나오던 여인의 모습이. 애초에 파트너를 그렇게 때려놓고 서로 커플링이 유지되는 걸 바라는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서로에게 의지해도 모자랄 판에 파트너에게 하찮게 취급받는 만큼 비참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서 커플링이 깨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커플링이 깨졌을 때 콕피트에서 나오는 붉은 머리칼 여인은 어딘가 후련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반대로 볼드로이의 얼굴은 처참했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케레네는 진심으로 커플링이 깨지기를 원했던 거겠지. 그렇게 자신을 묶고 있던 무거운 족쇄를 풀게 되자 본래 성격이라도 돌아온 것일까.

─···카렌. 저번 일은 제가 미안했어요.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어요?

입가에 웃음이 많아지고, 활달해진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한 장미처럼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뭔가 쉽게 잊지 못할 것만 같은 요 며칠 간의 일을 회상하던 그때였다.

“카렌. 오늘 나랑 중앙 광장에 가보지 않을래?”

턱을 괸 채 멍하니 있던 카렌은 옆에서 들려온 제안에 고개를 돌려 나츠오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뭔가를 고민하나 싶더니 생각지 못한 제안을 하고 있다.

중앙 광장. 단어 그대로 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커다란 광장이었다. 그리고 인구 이동이 제일 활발한 곳이기에 한때 음식점과 여러 잡화 물품을 팔던 가게들이 몰려 있던 곳.

“같이 중앙 광장에 가자고?”

“응.”

나츠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잘못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카렌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거기는 왜? 가서 할 게 있어?”

“···그냥 가서 뭐 살 거 없나 둘러보려고. 며칠 전부터 그곳에 있는 가게들이 다시 열리고 있는 모양이니까.”

비록 버그들의 공격에 도시 내부가 전쟁터가 되며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하지만, 다행히 도시 중심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었다.

393부대의 노력 덕분에 주된 전투들이 도시 외곽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기병들이 잔해 치우는 작업에 투입되면서 도시는 빠르게 안정화되는 중이었다. 기본적인 도시 기능이 얼추 회복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중앙 광장에서는 최근 들어 다시 가게들이 열리는 듯했다.

대규모 피난 계획이 실행되려면 아직 먼 상황이었으니, 그때까지 어떻게든 시민들끼리 생활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령부에서 시민들에게 생필품을 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소하게 필요한 것들은 개개인이 어떻게든 구해서 써야만 했다.

심지어 도시를 떠나기 전에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각 시민들마다 여러 형태로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던 물건을 팔고 있는 듯했다.

“음···. 그런데 가서 내가 뭐 살 게 있나?”

“뭐 어때. 어차피 지금 부대 안에서 할 것도 없잖아? 그냥 가서 기분 전환이나 한다고 생각해.”

“으음···.”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병 조정 작업이 끝난 이상 파일럿이 부대 안에서 하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부대 내부의 귀찮은 일들은전부 정비반 쪽의 요원들이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게 과연 다음에도 가능할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휴가가 될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으면 또 정신 없이 지낼테고.

그러니 여유가 될 때 가볍게 기분 전환 삼아 구경하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카렌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였다.

“그거, 우리도 같이 가도 될까?”

둘 사이에 웬 쌍둥이 자매가 끼어들었다.

린과 란이었다.

그 난데없는 등장에 나츠오는 흠칫했다.

이런 건 본래 그의 계획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사이좋게 걸어오는 두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어어? 너희들도 같이 간다고?”

“응. 가서 머리끈이라도 팔고 있으면 사게. 안 그래도 지금 계속 쓰고 있던 게 끊어졌거든.”

따라가는 이유를 설명하듯 린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평소와 다르게 묶이지 않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가지런하게 아래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런 린의 모습은 어딘가 신선했지만 나츠오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 너희도 같이 가자.”

2.

다행히 부대 외출에 대한 리엔의 허락은 흔쾌히 떨어졌다. 늦지 않게 제시간에만 돌아오라고 하던가. 그거야 당연한 일이기에 걱정 말라고 말했다.

그렇게 도착한 중앙 광장에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시민들 사이에서 물품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 건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제 각자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물건을 팔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까지.

버그들과의 전쟁이 계속되는 만큼이나.

사람들도 그러한 시대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일까.

어떻게든 다음날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볼만한 물건이 없어 괜히 왔나 싶지 않을까 싶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다만 제대로 된 상점들보다는 간단히 즉석에서 만들어진 듯한 노점상들이 많았다. 심지어 길바닥에 물건을 늘어놓고서 판매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굳이 상인이 아니더라도 도시 전역에서 시민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모여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카렌, 린, 란이 셋이서 임시로 형성된 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문득 바닥에 자그마한 천막만 깔아둔 채 온갖 잡화들을 올려놓고 있던 할머니 앞에서 린이 무릎을 굽혔다.

린은 그대로 한참 동안 물건들을 살펴보고는 무언가 발견하듯 생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음···. 이게 좋겠네. 할머니, 이걸로 하나 주세요.”

린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물건이 팔린 게 좋은 걸까. 노인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린이 가리킨 것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린이 노인한테 돈을 건넸을 때였다.

액수를 확인하던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마 아가씨. 돈을 잘못 준 것 같구나? 그거 그렇게 비싼 물건 아니야.”

“헤엣. 그냥 받으세여. 이건 물건이 마음에 들어서 제가 일부러 더 드린 거니까. 이거,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죠? 되게 이뻐요!”

노인의 주름진 손. 그 손아귀에 강제로 돈을 쥐여주고서 린은 벌떡 일어나 등을 돌리더니 도망치듯 돌아왔다.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과 란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린이 산 것은 리본이 장식된 수수한 느낌의 머리끈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물건을 산 것 치고는 방금 린이 쥐여준 액수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린이 단순하게 정말 물건이 마음에 들어서 저렇게 큰돈을 쓴 건 아닐 것이다.

“···란. 혹시 린은 평소에도 저러는 거야?”

“음···. 뭐, 그렇지. 예전에도 도시 올 때마다 모은 돈은 그 자리에서 전부 펑펑 써버렸어. 어차피 돈 모아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 같다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란의 대답에 카렌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카렌은 린이 어째서 저렇게 돈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싸움. 이런 상황에 재물욕 따위가 생겨날 리가 없다.

어차피 돈이라는 건 죽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때 방금 막 구매한 머리끈으로 풀려 있던 머리를 묶던 린이 걸어오며 물었다.

“카렌. 그런데 나츠오 그 녀석은 어디 간 거야?”

“···그러게.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안 그래도 이쪽도 답답하던 찰나였기에 카렌은 표정을 찡그렸다. 시장에 오자고 한 사람은 나츠오인데, 정작 녀석은 찾아볼 게 생겼다면서 혼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혹시 주변에 있을까 싶어서 둘러보던 그때였다.

옆에 있던 란이 이상한 걸 봤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카렌, 저 사람 혹시···?”

뭔가 싶던 카렌은 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츠오 대신 생각지 못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왜?

혼자서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카렌은 자신이 순간 잘못 봤나 싶었다.

"흐음···.재미있네. 우리, 저 녀석 한 번 따라가 볼래?"

마침 머리를 다 묶은 린도 그 뒷모습을 봤는지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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