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여기사들
* * *
이렇게 정신없이 당하기만 했던 적이 있던가. 아마 첫 경험 이후로는 처음이겠지. 케레네는 낯선 방 안의 천장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격렬한 섹스에서 케레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작업이 끝난 상태였다.
······마력 신경계가 바뀌었다.
혹시 모를 임신을 막기 위해 마력 신경계를 활성화하고 있던 케레네는 어쩐지 제 몸 같지 않은 기묘한 감각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나는 볼드로이한테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몸 안에 남아 있는 그의 기운을 즐기던 케레네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자고 있는 세레스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본 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겨주고 있는 네토루의 모습이 보였다.
남녀 셋이 한 번에 자기에는 침대가 비좁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세레스처럼 네토루의 품에 안겨 있던 케레네는 입술을 삐죽였다.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대우 차이 때문이었다. 정작 이쪽은 시선 한 번 안 주면서 마지막에는 커플링 파트너인 세레스만 챙겨주고 있다. 보는 입장에선 질투 나게 하는 커플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케레네는 무심코 네토루의 품에 깊숙이 파고들고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세레스만 보지 말고, 저도 봐줘요.”
그것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교태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거짓된 연기는 아니었다. 정말로 남자의 사랑을 바라는 듯한 여인으로서 애절한 목소리였다.
세레스에게는 분명 관심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지만 그가 이쪽을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히 이제는 욕심이 나고 있었다.
세레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네토루라면 너저분한 치정 싸움도 한 번 감수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더러운 욕심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감정 따위는 없는, 오롯이 남자의 애정만을 갈구하는 순수한 욕망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러한 욕망이 닿은 걸까.
세레스를 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코앞에서 있는 그의 눈을 보며 케레네는 이불속에서 더욱 그의 몸과 밀착했다.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마치 첫 사랑에 빠진 소녀 시절처럼.
“깼어? 피곤했을 텐데.”
“···그냥 잘까 했지만, 당신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이쪽을 봐달라고 교태 부린 게 도움이 된걸까.
케레네는 자신의 허리 위로 올라오는 네토루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꺄앗···?”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긴다. 케레네는 기쁜듯 달콤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자 네토루가 피식 웃었다.
“볼드로이가 이걸 보면 꽤나 슬퍼하겠어? 자기 커플링 파트너가 이렇게 다른 남자 품에 기쁜 얼굴로 안겨 있으니.”
“가, 갑자기 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마요···. 절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당신이니까···.”
케레네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는 얼굴을 기댔다. 단단한 근육. 그리고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그의 심장 고동이 귓가에 스며들고 있다. 그때마다 케레네의 심장의 고동 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이런 건 볼드로이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두근거림이다. 케레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나한테는 관심 없냐고. 커플링 할 생각은 없냐고. 어차피 커플링 파장은 상관 없지 않은가. 세레스에게 어렴풋이 네토루의 능력에 대해서는 들었다. 그리고 덕분에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도 말이다.
하지만 끝내 케레네는 그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건 단순히 파트너가 있는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자신의 모습이 구차해서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괜히 네토루만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고 말이다.
게다가 이미 세컨드까지 있는 남자 아닌가.
케레네는 자신의 성기병과 싸웠던 새하얀 성기병의 주인인 검은 단발머리 소녀를 떠올려보았다.
아직 성인도 안된 어린 소녀. 그렇기에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이.
그리고 어쩌면 세레스에게 큰 적이 될지 모를 아이.
세레스만큼이나 두 사람의 관계도 좋아 보였다.
게다가 세컨드라고 해도 커플링 파트너인 이상 앞으로 남녀 관계는 더욱 긴밀해질 수밖에 없겠지.
다만 아직 그 아이가 성년이 안 된 탓에 서로 애매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과연 그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네토루가 가만히 놔둘까? 다른 것도 아니고 커플링 파트너인데?
그러니 카렌 그 아이는 분명 세레스의 연적이 된다.
네토루의 커플링 파트너가 된 이상 두 사람은 서로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법이다. 특히나 그것이 남녀 관계가 얽힌다면 더더욱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케레네는 세레스가 걱정이었다.
저 반푼이 같은 아가씨가 과연 제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낼 수 있을지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등 좀 떠밀어줘야 할텐데···. 잠시 고민하던 케레네는 네토루에게 넌지시 물었다.
“당신은 세레스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을까. 네토루가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야.”
“후후···. 그냥 궁금해서요. 여자로서, 커플링 파트너로서 좋아하는 부분이 몇 개 있을 거 아니에요.”
혹시라도 네토루가 이상하게 생각할 까봐, 케레네는 생긋 웃으며 자기부터 말했다.
“···저는 말이죠. 세레스가 기사단에 막 왔을 때 순진하고 멍한 구석이 있는 걸 좋아했어요. 저한테 귀여운 여동생이라도 생긴 느낌이었죠.”
순진한 얼굴로 다른 여기사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그게 귀엽다고 조금만 짓궂은 장난을 쳐도 애가 종종 울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걸 말하자 네토루가 피식 웃었다.
“역시 어릴 때도 잘 울었나 보네.”
“그래서 저희 사이에서 세레스는 별명이 반푼이었죠. 잘 울고, 멍한 구석이 있고···. 조금만 거짓말해도 순진하게 다 믿어버리고···.”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느 날 세레스가 갑자기 파트너를 폐인으로 만들었을 때 모두가 놀랐다.
파트너를 배반하는 건 여기사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짓이었으니까. 어린 소녀가 지금껏 쌓아온 상식을 부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물론이고 여기사들도 세레스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건 케레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그동안 꿋꿋이 참아왔던 것을 손쉽게 허물어버린 세레스가 미웠다. 세레스 때문에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던 여동생이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세레스가 기사단에서 나갈 때까지 케레네는 계속 피해 다녔다. 모르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그래도 그것이 그나마 그때 그녀가 세레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자 인내였다.
“···그런데 저는 그런 아이한테 못된 짓을 했죠. 기사단에서 쫓겨나던 마지막 날까지 계속 울면서 저를 찾아온 걸 그냥 무시했거든요.”
“그래서 그날 일을 후회하나?”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일을 하나둘씩 꺼내면서 흐려진 표정을 본 것일까. 네토루가 묻자 케레네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가 나쁜 년인 건 변함이 없는데.”
자신과 다르게 오랜만에 만난 세레스가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자기 커플링 파트너 챙기겠답시고 식당에서 따로 아침을 챙기며 돌아다니던 모습을 봤을 때는 시기심과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커플링 파트너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우면서도 질투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세레스의 어떤 점이 좋으시나요? 저는 방금 말했으니까, 이제 당신 차례에요.”
“···그걸 꼭 말해줘야 하나?”
“그야, 궁금하잖아요. 좀 알려줘봐요.”
“······”
계속 밀어붙인 노력이 통한 걸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네토루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거기서 케레네는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고민하는 네토루의 모습이 귀여운 것도 있지만 그 순간 확실히 보았기 때문이다.
네토루의 품에 안겨 있던 세레스의 눈꺼풀이 방금 움찔움찔했다.
설마 싶었는데 역시 깨어 있던 건가.
의외로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저것도 여자로서의 본능 같은 걸까.
순진하게 자는 척하면서 알게 모르게 즐길 건 다 즐기고 있었다니. 얄미운 계집애다.
다행히 네토루는 눈치 못 챈 것 같기에 케레네는 초승달처럼 눈매를 부드럽게 휜 채 말했다.
“···그러면 네토루, 당신은 세레스와의 관계를 어디까지 생각하세요? 단순히 커플링 파트너? 아니면 그 이상의 관계?”
역시 이번에도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을까.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있던 네토루가 잠시 표정이 굳는게 느껴졌다. 도대체 뭘 묻고 싶냐는 듯이.
그리고 덩달아 세레스도 눈꺼풀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조심스레 흘겨보며 케레네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민폐 같은 이야기지만, 여기사들은 자기를 책임질 남자가 필요해요. 바보 같게도 배운 거라고는 남성 파일럿을 위해 사는 것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정작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죠. 저희가 괜히 파트너한테 붙잡혀 사는 줄 아세요?”
이건 순수하게 네토루를 위해 케레네가 조언하는 이야기였다. 여기사의 커플링 파트너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
세레스가 393부대에서 네토루를 만나기 전까지 지금껏 쉽사리 진득하게 파트너 한 명을 고집하지 못한 건 이것도 한몫할 것이다.
진지한 목소리로 조언한 탓일까.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지며 네토루 역시 진지한 얼굴이 되자, 케레네는 쿡쿡 웃으며 네토루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후후···. 그렇다고 지금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마세요. 그냥 그렇다고요.”
츄웁
케레네는 네토루의 몸 위에 올라탄 상태로 상체를 숙여 그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섹스하면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아니 세레스를 배려해서 최대한 참아왔던 입맞춤이었다.
그 상태로 그의 입안에 혀를 밀어 넣으며 케레네는 옆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어느새인가 눈을 뜨며 망연한 얼굴로 보고 있던 세레스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세레스를 보며 케레네는 은은한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만약 케레네였다면 자기 파트너가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걸 저렇게 망연한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움직여야지.
···역시 반푼이라니까.
덕분에 케레네는 세레스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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