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여기사들
* * *
밤이 찾아왔다. 네토루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복도를 걸었다. 왠지 모르게 방으로 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온갖 경험을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그런 거겠지.
하지만 굳이 꺼릴 이유는 없다. 어떻게 보든 나쁜 요소들은 없으니까. 단지 이건 네토루에게 조차도 낯선 일인지라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질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네토루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잠깐.”
갑자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사내 때문이었다. 케레네의 커플링 파트너인 볼드로이였다.
네토루는 머리를 툭툭 두들기고 있던 수건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침에 그런 꼴을 당했으면서도 살벌한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네토루는 그 눈빛을 무덤덤한 얼굴로 받아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볼일? 당연히 있지. 지금이라도 케레네를 얌전히 돌려보내. 만약 그 여자 몸에 손끝이라도 닿으면 가만히 안 둘 테니까.”
“······”
이야기를 듣던 네토루는 입술을 비틀었다. 뭔가 이제 와서 다급해지는 꼴이 우스워서였다.
이럴 거면, 그 여자를 그렇게 때리면 안 됐지.
애초에 대주라고 먼저 말한 것도 볼드로이 아니었던가. 커플링 파트너를 창녀 취급하고 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당연하지만 볼드로이가 이렇게 협박한다고 네토루는 한 번 온 여자를 쳐낼 생각은 없었다.
더욱이 이건 쉽게 찾아오지 않는 좋은 기회였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여기사의 마력 신경계를 제 마음대로 개발하는 것이다. 이건 카렌과 세레스를 위한 일종의 준비 연습이었다.
이런 기회를 어떻게 그냥 버릴 수가 있을까.
“만약 싫다면 어떻게 할 건데?”
“···네 놈이 남의 여자를 건든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이번 작전 내내 감당할 수 있겠어?”
“왜? 내 뒤통수라도 칠 건가?”
볼드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째릿 노려보고 있을 뿐. 덤빌듯한 살벌한 눈빛을 보아하니 정말 뒤통수라도 칠 작정인 듯했다.
···덕분에 네토루는 조그맣게나마 남아 있던 망설임도 스르륵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된 이상 볼드로이랑 같이 작전을 수행하는 건 완벽하게 불가능하게 되었다. 버그들만큼이나 무서운 건 언제 돌변할지 모를 내부의 적이니까.
오늘 밤 케레네와 볼드로이의 커플링을 완전히 꺾는다. 네토루는 그 목표를 확실히 하였다.
이런 놈과 같이 작전을 수행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그래서 네토루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내 뒤통수 노릴 거면 맘대로 해.”
“···뭐?”
“마음대로 하라고.”
“······”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걸까. 볼드로이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가 소리쳤다.
“너···. 이렇게 케레네를 감싸는 이유가 뭐야?! 애초에 이번 일의 모든 원흉은 그년 때문이잖아! 그 여자가 샤워실에서 입만 함부로 놀리지 않았어도···.”
“아. 확실히 그건 그렇지.”
네토루는 볼드로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케레네라고 떳떳한 입장은 아니었다. 확실히 이번 일의 모든 시작은 그녀였다.
샤워실에서 세레스와 커플링 파트너로 괜한 자존심 세우는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없었겠지.
하지만.
“···.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변명을 하기에는 남성 파일럿으로서 너무 한심하지 않아? 그만큼 케레네가 널 파트너로서 신뢰하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반대로 너는 그 여자를 창녀 취급하고 있었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남성 파일럿이었다면 자신의 커플링 파트너에게 몸을 대주라고 말하거나, 손찌검 따위를 해서는 안 됐다. 그건 커플링 파트너 관계를 떠나 인간으로서 실격이었다,
그러니 이미 그런 선을 넘은 이상 볼드로이에게는 그 어떤 변명 거리도 존재할 수가 없다. 게다가 정작 자기 파트너보다는 알량한 자기 자존심부터 챙기던 남자 아니던가.
무릎을 꿇는 것 대신 케레네를 버리는걸 선택한 순간부터 이미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네토루였으면 차라리 자존심을 접고 무릎부터 꿇었을 것이다.
말을 끝낸 네토루는 볼드로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머, 멈춰! 아직 내 이야기는 안 끝났···.”
거기서 네토루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이상 여유롭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는데. 케레네가 지금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
볼드로이는 순간 멈칫하더니 멍한 얼굴이 되었다.
2.
“···어머. 왔어요?”
“···왔어요?”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세레스와 케레네가 사이 좋게 방 안에 들어온 네토루를 반겨주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엇일까.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껴둔 채 마주 보며 앉아 있던 두 여인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불그스름했다.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 안에서 술 냄새가 난다.
네토루는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넣고는 두 사람이 있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와인?”
테이블 위에는 방금 막 개봉된 듯한 와인병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네토루는 와인병을 가볍게 흔들어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와인 병이 텅텅 비었다.
비록 오는 중간에 볼드로이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을 지체했다고 하지만, 이걸 두 사람끼리 그새 다 마실 수 있는 건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네토루는 케레네를 쳐다보았다. 세레스가 이런 걸 구해왔을 리는 없을 테니 범인은 뻔했다.
“케레네. 이런 건 어떻게 구한 거야?”
당연하지만 술 같은 게 부대 안에 떡 하니 돌아 다닐리가 없다. 애초에 현 상황에서 술은 쉽게 구하기 힘든 사치품이었다. 사람 먹을 식량도 없다고 하는 상황에 술 같은 게 값싸게 유통되고 있겠는가.
“흐흐···. 피난민들 중에서 가게 정리한답시고 팔길래 하나 구해왔어요.”
케레네는 잔을 기울이며 입술에 남은 와인의 일부를 혀로 핥더니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를 유혹하는데 능숙한 여우 같은 여인의 웃음이었다.
“후아···. 이거 은근히 맛이 좋네요? 생각지 못하게도 좋은 걸 구했어요···.”
“······”
일단 이 여자가 확실히 취한 건 분명한 듯하다. 말하는 어투도 그렇고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그 상태로 한동안 싱글벙글 계속 웃던 케레네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슬쩍 고개를 들더니 네토루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맞다. 원래 당신 오려면 같이 마시려고 했는데···. 정말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까 저희끼리 전부 다 마셔버렸네요.”
“···됐어. 어차피 내가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라서 크게 신경은 안 써.”
“어머, 혹시 술 싫어하세요?”
“그냥 잘 안 마시는 것뿐이야.”
“흐음. 그래요?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안심하던 케레네는 다시 와인잔을 기울이며, 새빨간 입술 안으로 와인을 머금더니 꿀꺽 삼켰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천성이 이러한 것인지 그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요염했다.
···이런 여자가 그렇게 맞고 다닌 것인가.
커플링 파트너라는 건 남녀 관계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여성으로서 매력이 높을수록 파트너에게 사랑받길 마련이었다.
미인을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 그러한 절대적인 진리는 커플링 관계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케레네는 이성을 유혹하는데 도가 튼 여자였다.
한동안 먼 곳을 바라보듯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와인잔을 기울이던 케레네가 툭 말했다.
“당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나중에 세레스한테 술 먹일 때 조심해요.”
“···갑자기?”
“이유가 궁금하면 세레스를 보던가요.”
“······”
그 말에 네토루는 세레스를 자세를 살펴보았다.
아까부터 세레스는 조용했다. 그저 두 손으로 와인잔을 앙증맞게 꼭 쥔 채 내용물을 훌쩍이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아이가 달달한 포도 주스를 마시는 것마냥 잘도 마시고 있다.
그제야 네토루는 케레네의 경고를 이해했다.
“···과연.”
···가만히 자세히 보니 제대로 의식은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로 눈동자에 묘하게 힘이 풀려 있다.
저건 누가 봐도 고주망태의 상태였다. 그런데도 세레스는 멈추지 않고 와인을 꼴깍꼴깍 목구멍 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취했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마시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저게 마지막 잔이라 망정이었지, 안 그랬다면 누군가가 당장 말려야 할 판이었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은 건지 베실베실 웃고 있는 세레스를 지그시 쳐다보던 네토루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세레스한테 얼마나 먹인 거야?”
“에이. 많이 안 먹였어요. 해봤자 제가 마신 양에 반의반은 될까 싶을 정도?”
“그런데 저렇게 취할 수 있는 건가?”
“그러게요? 저도 조금 놀랐어요. 주는 대로 잘 받아먹길래 괜찮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확 취해있더라고요.”
저런 세레스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 걸까. 케레네는 쿡쿡 웃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와인 마셔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그동안 술 마셔볼 일이 없었다나?”
“···처음이라고?”
“네. 정말 그 동안 저 나이 먹고 뭐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제39구역에 있었다고 해도 한 번쯤은 마셔볼 법한데.”
“···하아. 그러니 자기 주량도 모르지.”
다 큰 아가씨가 술 한 번 해본 적 없다는 건 조금 신기하지만 그래도 아예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술은 사치품이었고, 393부대의 부대원들은 대부분 꼬맹이들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술 마실 일이 뭐가 있겠는가.
아무튼, 보다 못한 네토루는 끝내 세레스에게서 와인잔을 빼앗았다.
“흐에?”
“···세레스. 그만 마셔.”
“우우욱···. 시, 싫어요···.”
난생처음 마셔본 와인이 마음에 든 걸까.
과자 뺏긴 아이처럼 뺏긴 잔을 되찾기 위해 세레스가 손을 뻗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잔뜩 취한 탓인지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비틀거리더니 끝내 엎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가 넘어지고,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병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더니 안에 남아 있던 내용물들이 줄줄 흘렀다.
우당탕···.
“······”
네토루는 그 참담한 풍경에 무심코 다시 한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건 뭔가···. 뭔가다.
지금 이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쯤 되면 세레스, 이 아가씨가 내일 무슨 얼굴을 할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웃어야 할지, 한탄해야 할지 모를 현 상황에 고심하던 네토루는 일단 몸부터 굽혔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세레스의 몸을 향해 팔을 뻗자, 세레스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품에 안겨 오며 네토루의 목에 팔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안기 편해진 네토루는 힘껏 그녀를 들어 올린 채 자신의 침대 위로 눕혔다.
···그리고는 그대로 세레스는 눈을 감더니 움직임이 사라져버렸다. 바로 잠든 것이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던 케레네가 풉 웃음을 터뜨리며, 웃는 얼굴 그대로 사과했다.
“하하···. 미안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술 가져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아무리 제가 천박하다고 해도, 어제 만난 남자랑 갑자기 몸을 섞는 건 제정신 유지하고 할 짓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죠.”
잘 들어보니 사과가 아닌 한탄이다.
분명 겉으로는 생긋생긋 웃고 있지만, 천박이라는 단어를 읊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혹시 전에 했던 말을 신경 쓰는 건가.
“···천박하다고 한 거, 일단 사과하지.”
“네?”
네토루의 진심 어린 사과에 웃고 있던 케레네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더니 잠시 눈을 꿈벅였다. 그러다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오해하지 마요. 당신이 전에 했던 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볼드로이 경한테까지 천박하다고 취급 받은 게 서글퍼서요. 어쨌든 나름 오랜 커플링 파트너였는데···. 결국 그한테 저는 그 정도 취급밖에 안 됐던 거겠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케레네는 와인잔에 남아 있던 내용물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러자 입술 사이로 와인이 새어 나오더니,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며 그녀의 가슴골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순간만큼은 네토루조차도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고혹적인 몸짓이었다. 그러한 시선을 즐기듯 케레네는 쿡쿡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작해보죠. 마침 몸도 후끈해지고, 좋네요.”
스르륵···. 입고 있던 옷이 그녀의 살결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그렇게 속옷만을 남기고 나신을 드러낸 그녀가 당돌히 걸음을 옮겼다.
케레네는 그대로 세레스의 몸 위에 올라타더니, 직접 세레스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레스마저 속옷만 남긴 채 그대로 나신을 드러내게 되자, 그 위에 있던 케레네가 네토루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어때요? 이거, 마음에 들어요? 제 작품인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