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여기사들
* * *
“케레네 언니랑 단둘이서는 안 돼요···.”
“···둘이서는 안 된다고? 그게 뭔 소리야.”
개미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 때문도 있지만, 순간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한 네토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세레스는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그, 그게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데 세레스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인가 세레스의 눈동자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심지어 새하얗던 얼굴에는 열이 잔뜩 올라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간신히 부끄러움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모습에서.
세레스는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세, 셋이서 하자고요···!”
“······”
셋이라니. 네토루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이 아가씨가 뭔 소리를 한 걸까. 혹시 셋이라는 단어에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는 걸까?
셋···. 셋···.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하나뿐.
덕분에 잠시 사고 회로가 망가진 듯한 기분이다.
네토루는 자신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듯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 정도로 방금 세레스가 꺼낸 말에는 파괴력이 엄청났다.
셋이라. 그것은 즉 케레네를 안는 자리에 세레스도 함께 있겠다는 건가? 아니, 함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같이 하자는 거 같은데···.
어쩌면 세레스는 방금 자신이 무엇을 말한 건지 제대로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네토루가 본인이 잘못 이해했거나.
그래서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을 치우며 세레스를 쳐다보고 있자니, 어느새인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반응을 보아하니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제대로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러니까 괜히 더 곤란해지는 건 네토루였다.
도대체 세레스가 어째서? 당연하지만 네토루가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방 안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길래 세레스가 갑자기 이런 조건을 걸고 있는 것인가.
네토루는 지금까지 여러 여성 파일럿을 만났다.
그러니 여자 경험은 결코 적은 게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여자와 동시에 잠자리를 가져본 적은 없었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그런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다. 어느 여자가 그러는 걸 좋아할까.
게다가 이러한 조건을 요구하는 게 다른 사람도 아닌 세레스라고 하니 더욱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혹시 세레스의 성벽이 그러한 종류인 걸까?
설마 싶어 네토루의 눈초리가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던 그때 세레스가 눈치 좋게 자기변명을 시작했다.
“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 그게···. 이건 제가 먼저 생각한 게 아니라···.”
“하아···. 뭘 그렇게 처녀처럼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냥 당당하게 말해. 어차피 네 커플링 파트너잖아? 게다가 이미 두 번이나 해봤다면서?”
그런데 그때 세레스의 말을 비집고 케레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레스의 방 안에서 나온 케레네는 네토루를 보며 요염한 눈웃음을 짓더니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제가 하자고 했어요.”
“···뭐?”
“그러니까 3P요. 혹시 몰라요? 세 명에서 하는 거.”
“아니···. 알긴 아는데···.”
방금까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화사해진 모습은 영 익숙해지기 어렵다.
그래서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친 케레네는 생긋 웃더니, 갑자기 다가와 네토루에게 팔짱을 끼면서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세 명에서 섹스하는 거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왠지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요?”
“···재미있을 거 같다고?”
“네.”
케레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네토루와 팔짱 낀 몸을 더욱 긴밀하게 밀착시켰다. 덕분에 뭉클하고 그녀의 가슴이 팔에 닿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케레네의 행동에 거리감이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네토루가 약간 미간을 좁힌 채 천천히 그녀를 밀어내고 있자,
“게다가 당신···. 세레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여자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세레스가 도와줘야지 않겠어요?”
밀려나던 케레네가 되려 한 층 더 거리를 좁히더니 손을 뻗어 네토루의 가슴팍과 목덜미를 간질이듯 쓸어만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남자를 유혹하는 행동에 옆에 있던 세레스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자, 잠시만요···. 케레네 언니? 지금 뭘···? 이건 방 안에서 했던 말이랑 틀리···.”
“어머. 근육 봐···. 이러니까 볼드로이 경이 제대로 힘도 못 쓰고 밀리지. 직접 만져보니까 겉으로 보는 것보다 더 몸이 좋네요?”
“······”
기묘한 상황이었다. 네토루는 달라붙는 케레네를 힐끔 쳐다보다가도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세레스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안에서 뭔 이야기를 나눈 거지.
누가 봐도 케레네의 현재 행동은 연기하는 것처럼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실제로 케레네의 눈은 재미있는 무언가를 구경하는 것처럼 힐끔힐끔 세레스를 쳐다보기 바빴고 말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네토루는 케레네의 어깨를 천천히 밀어내며 세레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세레스. 방 안에서 둘이 뭔 이야기를 한 거야?”
“이, 이야기요? 그, 그냥 평범하게···.”
찔끔찔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는 세레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려보는데.
“쉿. 그런 건 묻지 마요. 여자들끼리의 은밀한 대화였으니까. 굳이 남자가 알아서 좋을 건 없다고요?”
그러던 그때 케레네가 은근슬쩍 네토루의 시선을 막았다. 그러면서도 세레스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자기 품에 안기 시작했다. 그러한 둘의 모습은 뭔가 린과 란처럼 사이 좋은 자매를 연상케 했다.
···혹시 둘이 화해라도 한 건가?
잘 보니 케레네를 쳐다보는 세레스의 눈빛이 조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온화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런 세레스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던 케레네의 눈꼬리가 천천히 초승달처럼 휘더니, 이윽고 그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당신한테 나쁠 건 없잖아요? 저희가 원해서 해주겠다는데. 설마 거절하는 건 아니겠죠?”
“···음.”
아무리 그래도···.
“아니···. 뭘 망설이는 거예요? 이거, 오늘 아니면 경험 못 해봐요. 어떤 여자들이 이런 걸 해주겠어요?”
망설이는 네토루가 답답했는지 케레네가 눈매를 치켜뜨며 말했다. 이쯤 되니 네토루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설마 이런 걸 강요받을 줄이야.
“아무튼, 오늘 밤에는 딴 데 가지 말고 몸 깨끗이 씻고 방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저희 둘이 알아서 찾아갈 거니까.”
“으읏? 어, 언니?”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좀 더 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 건지, 케레네와 세레스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세레스가 강제로 끌려가 버렸다.
덕분에 복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네토루는 헛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2.
네토루를 보내고 세레스의 방안에서 얼마나 서랍을 뒤적거렸을까.
······케레네는 황당해졌다.
아무래도 이 아이는 정말로 반푼이가 맞는 듯했다. 아무리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여자로서 실격이었다.
“세레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한데?”
“뭐가 말이죠···?”
“왜 속옷이 이런 것 밖에 없는 거야?”
확인해보니 서랍 안에 있는 건 오로지 파일럿용 속옷들뿐이었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속옷은커녕 수수한 느낌의 일반적인 속옷조차 없었다. 믿기 어렵게도 전부 보급용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미쳐.
오늘 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케레네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탁하고 벽이 들어선 느낌이었다. 아니, 무슨 어린 소녀도 아니고···.
케레네는 세레스의 파일럿용 속옷들을 천천히 손에 집어 들며 살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설마 이런 걸 입고 어제 그 남자한테 안긴 건 아니지?”
“아···. 그, 그게···.”
말끝을 흐리던 세레스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케레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만. 너─ 정말 파일럿용 속옷을 입고 간 거야? 무슨 출격하는 것도 아닌데도? 지금 장난해?”
“······”
대답을 피하듯 세레스가 쓰윽 시선을 피했다.
설마 정답인 걸까. 케레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세레스를 쳐다보았다. 이쯤 되면 커플링 파트너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속옷은 남겨 관계를 위한 전투복 같은 것이었다. 어떤 걸 입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칙칙하기 짝이 없는 보급 속옷 따위를 입고 갔다니.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걸 입고 갈 생각을 해···! 이 반푼이 같은 아가씨야!”
“바, 반푼이라니···. 그, 그렇게 부르지 마요.”
“뭐? 그러면 반푼이를 반푼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기사단에서 언니들을 보고 뭘 배웠어? 그때 분명 꾸미는 법도 알려줬을 텐데?”
“·····윽.”
반항했으나 기사단 시절마냥 몇 마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세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만 세레스라고 아무런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그, 그런 속옷 같은 게 그동안 저한테 필요한 적도 없었고···.”
지난 수년간 남자랑 연이 없는 처녀로 살았던 세레스였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가 성인 남자랑 커플링 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니 케레네가 말하는 야시시한 속옷 같은 걸 어찌 준비하는가.
만약 준비해놨어도 수년간 계속 먼지만 쌓인 채 서랍 안쪽에 처박혀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 차라리 처음부터 사지 않는 게 현명하다.
“게, 게다가···. 정작 그런 게 있었어도···. 여기에 가져올 여유도 없었고···. 설마 제39구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이렇게 계속 주둔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에휴. 됐어. 너한테는 기대 못 하겠다.”
기사단에서 쫓겨난 세레스가 그동안 대충 어떤 느낌으로 지냈을지 뻔히 보인다. 접근하는 남자란 남자는 전부 뻥 걷어차고 지냈겠지. 이쯤 되면 네토루라는 파트너를 어떻게 만났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예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세레스의 속옷을 뒤적거리며 치수를 확인하던 케레네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랑 사이즈는 똑같네.”
얼핏 봐도 체형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직접 수치로 확인해보니 완전히 똑같았다.
정말 운이 좋다. 기사단 안에서도 케레네와 비슷한 사이즈의 속옷을 입는 여기사들이 많이 없는데 말이다.
케레네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어디 가지 말고 방에 가만히 있어.”
“···케레네 언니는 어디 가려고요?”
“나는 내 방에 좀 갔다 올게. 가서 내 속옷이라도 가져와야겠다. 내꺼라도 입어. 아니, 그냥 줄게.”
“주, 준다니···. 아무리 그래도···.”
남이 입은 건 싫다는 건가? 케레네는 피식 웃었다.
“걱정 마. 전부 새거니까. 게다가 엄청 야해.”
“으읏···.”
혹시 야한 건 못 입겠다는 건가. 얼굴을 서서히 붉히던 세레스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싫어도 케레네는 세레스에게 강제로 입힐 생각이었다.
그래야지 그 남자가 세레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지 않겠는가. 남자라는 건 단순했다. 야한 걸 입으면, 그만큼 좋아하는 법이니.
케레네는 곧바로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지만, 발걸음이 가볍다. 다른 남자한테 안긴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던가.
이윽고 자신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케레네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의 방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사내 때문이었다.
“······너. 뭐하고 왔어?”
눈이 마주친 볼드로이가 으르렁거리듯 묻는다.
케레네는 몸에 벤 습관에 따라 그 시선에 천천히 눈을 내리깔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볼드로이 경이 생각하는 일은 아직 없어요.”
“아직?”
“네. 아직이요. 지금 말고 오늘 밤에 그 남자한테 가랑이를 벌릴 거든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천박하게요.”
“뭐? 처, 천박?”
볼드로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하지만 케레네는 개의치 않고 그의 앞을 지나가 방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그가 따라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찰칵.
문을 잠그고 케레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려움에 잠겨 있던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묘하게 기분이 좋아서 입가에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오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천박해질 것이다.
저 남자가 후회할 정도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