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여기사
* * *
“···그래서 네토루가 맞고 있던 케레네를 도와주게 되었다는 건가요?”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
네토루의 이야기를 듣던 세레스는 조심스레 케레네를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칼 여인은 아까부터 침묵을 유지한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레스는 테이블 아래로 남들 보이지 않은 시선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착잡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망설임.
그러한 감정 속에서 세레스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불쌍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게 나랑 무슨 관계냐고 차갑게 말해야 할까.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다.
······솔직히 말해서 세레스는 케레네가 불편했다.
이미 꼬일 대로 꼬인 관계이고, 당장 어제만 해도 서로 날을 세우며 말다툼을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과거에 좋은 추억이 있어도 현실 앞에서는 무의미한 법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세레스는 케레네를 원수마냥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 취급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던 세레스는 그 답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케레네를 연민하는 게 아니다. 세레스는 케레네를 통해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기사단에 계속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그러면 나도 케레네처럼 저렇게 처량하고 불쌍한 모습이 되어 있었을까?
세레스가 기억하는 케레네는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처럼 밝고 활달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당당했다. 그녀의 옆에 있으면 항상 밝은 기운을 얻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세레스는 케레네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째서 케레네 언니는 이렇게 된 걸까.
역시 커플링 파트너가 바뀐 탓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세레스가 막 입단했을 당시에 케레네의 파트너는 원래 볼드로이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사람은 없다. 죽은 것이다.
세레스는 기억하고 있다. 그날 텅 빈 것처럼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울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지금 케레네의 모습은 그날을 연상케 할 정도로 텅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여러 감정들이 가슴 안에 응축되고 있는 가운데, 입술을 달싹이던 세레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케레네 언니는 볼드로이 경을 만난 이후로 많이 바뀌었네요.”
“······”
세레스의 말에 케레네는 그저 고개를 튼 채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레스는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고는 네토루를 쳐다보았다.
이제 대충 상황은 이해했다.
······하지만.
세레스는 눈매를 살짝 가늘게 늘어뜨린 채 네토루를 퉁명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당신.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정말 케레네 언니를 안겠다는 건 아니죠?”
케레네를 도와주기 위해 볼드로이 경한테 그런 소리를 한 건 이해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그걸 실천으로 옮기는 건 당연히 싫다. 게다가 당장 어젯밤에 서로 몸을 섞지 않았는가.
세레스의 서늘한 시선에 네토루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음. 역시 싫겠지?”
“다, 당연하죠···! 당신은 제 커플링 파트너라고요! 그, 그런데···. 어떻게···.”
제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을 생각을 하죠?
차마 말을 전부 잇지 못한 채 세레스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렸다. 이 뒷 내용을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하지만 끝내 세레스는 용기를 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행히 방금까지 방에서 생각했던 온갖 상념들이 지금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건 커플링 파트너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에요. 기껏 맞춘 커플링 파장이 흐트러지는 건 물론이고, 애초에 당신이 굳이 케레네 언니를 정말로 안을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뭐, 그렇지.”
네토루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세레스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네토루의 얼굴에 흐릿하지만 망설임의 기미가 엿보인 건.
혹시 정말 욕심이 나는 걸까?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케레네를 안는 것에 관심이 생긴 걸까?
확실히 세레스가 보더라도 케레네는 미인이었다. 요염하면서도 특유의 화려한 외모는 분명 남자들에게 시선을 끌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어쩌면 네투로도 그것에 홀린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느새 반쯤 잊고 있던 거지만.
네토루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커플링 파트너 관계에 대한 질 나쁜 소문들이 말이다.
물론 그 소문들을 이제 믿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소문으로 한때 네토루를 견제했던 세레스 입장에서는 다시금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세레스. 일단 내 이야기를···.”
“···시, 싫어요. 당신이 뭘 말해도 저는 절대 안 되니까···.”
네토루가 뭔가 빠진 내용이 있다는 것처럼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괜스레 다급해진 세레스는 그의 말을 끊고서 다시 한번 자신의 의견을 강조했다.
그러자 곤란하다는 듯한 네토루의 눈빛과 표정이 세레스의 눈동자에 맺혔다.
정말 싫다. 그러한 네토루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니 세레스는 점점 초조해지는 걸 느꼈다. 머릿속이 혼잡해지고, 가슴이 아팠다.
정말로 케레네를 품에 안아야겠다는 건가?
커플링 파트너인 내가 이렇게 반대해도?
끝내 그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 세레스가 몸을 한차례 떨고 있을 때였다.
언제부터인가 고개를 들고 묘한 시선으로 세레스를 관찰하던 케레네가 살포시 웃더니 말을 꺼냈다.
“···네토루, 당신. 잠시 자리 좀 비워주면 좋겠는데, 괜찮겠어요?”
2.
─찰칵
네토루가 나가자, 두 여인만이 남은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케레네는 그러한 침묵 속에서 한동안 말없이 세레스를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초조함과 두려움.
그러한 감정이 두둥실 떠다니는 세레스의 얼굴은 뭐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해서 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저건 누가 봐도 진심으로 커플링 파트너를 좋아해서 나오는 모습이니까.
······아무래도 정말 좋은 파트너를 만났나 보다.
그건 성기병 파일럿으로서도,
한 명의 평범한 여자로서도,
정말로 부러운 일이었다.
덕분에 케레네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한탄스러워졌다. 본인도 한때 눈앞에 있는 세레스처럼 누군가를 갈구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더 이상은 돌아오지 않을 먼 추억이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신기했다.
기사단에서 커플링 파트너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그 어리숙했던 소녀가 지금은 어엿한 여인이 되어 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으니.
···아마 이래서 내가 세레스에게 모질게 굴 수밖에 없던 거겠지.
누구는 기사단에서 본래 짝을 잃어 이러고 있는데, 누구는 기사단에서 나가더니 자기 짝을 찾았다.
과연 이걸 누가 질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스스로가 되돌아보아도 너저분하고 구차하다.
케레네는 자신의 더러운 이면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차라리 그때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저랑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세레스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케레네는 그런 세레스를 보며 풋 웃었다. 그녀의 새초롬한 시선이 그저 귀엽게 보여서였다.
정작 자신을 욕할 때는 멍청이마냥 가만히 있었으면서, 커플링 파트너가 엮이니 샤워실에서 덤벼든 것도 그렇고, 지금도 고슴도치처럼 이렇게 가시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그렇게 그 남자가 좋은 건가.
아무튼 좋다. 여기서 케레네가 할 말은 간단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나는 네 커플링 파트너를 뺏을 생각이 없으니까. 게다가 남이 좋아하는 사람 뺏는 건 내 취향도 아니고.”
─내 실험에 협력하면 볼드로이한테서 벗어나게 해줄 게.
솔직히 말해서 아예 욕심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정말 네토루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케레네는 그 힘에 의지한 채 그저 자신의 족쇄를 풀고 싶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굳이 세레스와 지저분한 치정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정작 네토루의 눈빛을 생각하면 이쪽한테는 별로 관심도 없어 보였고.
덕분에 나름 남자를 잘 아는 케레네의 입장에서는 지금 세레스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괜히 응원해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조,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저는 그냥 커플링 파트너로서···.
“······”
···그런데 아무래도 응원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을 듯했다. 생각지 못한 세레스의 반응에 케레네는 헛웃음을 흘렸다.
좋은 의미로 세레스는 반푼이가 분명했다.
3.
“···이거 곤란한데.”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케레네의 요구에 방에서 나와 있던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세레스가 격납고에서 보여준 태도를 생각하면 거부감이 심할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설마 세레스의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덕분에 케레네와 볼드로이의 커플링을 깨트릴 거라는 걸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리 네토루라도 세레스가 갑자기 저렇게 울먹이기 시작하면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냥 포기하는 게 좋으려나?
사실 네토루가 굳이 케레네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다.
물론 마력 신경계의 설계가 욕심나는 건 사실이지만, 애써 좋아지기 시작한 세레스하고의 관계를 비틀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역시 포기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네토루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는 걸 기다렸다.
이윽고 방에서 나온 지 30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철컥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때 네토루는 세레스의 방문이 열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끝났어요.”
열린 문 틈새로 세레스가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그리 말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잘 안 풀린 걸까.
세레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뭔가 이상했다.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우물쭈물 할 말을 삼키는 모양새였다.
역시 싫은 거겠지. 이해한다.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포기할 테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네?”
“내가 생각해도 많이 경솔한 판단이었어.”
“···네?”
“······?”
말을 하던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세레스가 순진하게 눈을 꿈벅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묘한 정적 속.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레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게···. 저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는데요?”
“···괜찮다고?”
네토루는 조금 놀랬다. 케레네가 안에서 무슨 말을 했길래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바뀐 걸까. 그러한 의문 속에서 세레스는 말을 덧붙였다.
“어,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도와주면 케레네 언니가 볼드로이 경한테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하는데···. 혹시나 하는 건데 그거, 거짓말 아니죠? 커플링 파장을 비틀어주겠다는 거···?”
“···물론. 이런 걸로 내가 거짓말 할 리가 없잖아.”
“후우···. 알겠어요. 그런데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세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차례 숨을 몰아쉬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케레네 언니랑 단둘이서는 안 돼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