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여기사
* * *
의무실에서 치료는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사실 치료라고 할 것도 없었다. 터진 입술과 그 외의 자잘한 상처에 약만 발라주면 끝이었으니까.
그렇게 치료가 끝나고 침묵이 얼마나 지속되고 있었을까. 케레네는 아까부터 조용히 의무실 침대 위에 앉아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도와준 건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거기서 저를 왜 도와준 거죠? 당신이 저를 도와줄 이유는 없을 텐데요.”
“이유?”
“혹시 볼드로이 경한테 맞고 있는 제가 불쌍하게 보여서 그랬나요?”
네토루는 물끄러미 케레네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다. 당장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유리구슬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그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순간이지만 첫 커플링 할 때의 세레스를 연상케 해서 여러 의미로 곤란했다. 딱 봐도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혹시 여기사들은 전부 이런 걸까. 다른 듯하면서도 묘하게 세레스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네토루는 아직 얼굴에 남아 있는 욱신거림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큰 이유는 없어.”
“이유가 없다고요···?”
“애초에 사람이 맞고 있는데 이유가 필요하나?”
“······”
당연하지만 케레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도와주었을 것이다. 남성 파일럿에게 맞고 있는 여성 파일럿의 모습은 봐서 기분 좋을 게 없으니까.
잠시 네토루를 멍하니 바라보던 케레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세레스는 정말 좋은 파트너를 뒀네요···.”
···좋은 파트너라. 솔직히 네토루는 자신이 그녀에게 좋은 파트너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매번 네토루랑 커플링 할 때마다 오버 히트로 고생하는 여자였으니까.
오버 히트라는 건 결코 여성 파일럿에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엄연히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네토루는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글쎄···. 내가 좋은 파트너라고 하기에는 뭔가 그런데. 매번 무리만 시키거든. 그 녀석 지금도 오버 히트 상태인 거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야기를 듣던 케레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풉···. 바보 같네요. 당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좋은 파트너라는 증거죠. 반면에 저는···.”
말을 하다 멈춘 케레네는 자신의 뺨을 매만지며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착잡한 표정이었다. 새삼 자신의 신세를 깨달은 것처럼 말이다.
한계 출력을 강제로 넘어뜨린 오버로드 상태로 싸웠지만, 볼드로이는 걱정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손찌검만 하지 않았는가.
이윽고 한숨을 푹 쉬던 케레네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바로 당신 방이라도 가서 옷이라도 벗을까요? 아, 그 전에 샤워부터 먼저 해야겠네요···.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대련하기 전에 볼드로이 경이랑 한 번 했거든요.”
“······”
네토루는 케레네를 훑어보았다. 기사 슈트를 착용 중인 그녀의 두 허벅지 사이에서는 정사의 증거들이 숨김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련 전에 콕피트 안에서 여성 파일럿이랑 한차례 몸을 섞고 있었다니.
그런 상태로 이쪽을 응시하는 케레네의 붉은 눈동자는 공허한 느낌으로 텅텅 비어 있었다. 저런 인형 같은 몰골로 품에 안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들어가는 장미처럼 너덜너덜한 모습에 네토루는 헛웃음을 흘렸다.
“괜찮겠어? 정말 그랬다가는 볼드로이가 널 가만히 안 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가 남한테 안긴 여자를 반겨줄 것 같지는 않거든.”
“···그건.”
비록 볼드로이가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만 그게 정말 그러라고 한 소리는 아닐 것이다. 이대로 네토루가 케레네를 품에 안으면, 정작 곤란해지는 건 케레네였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 입장에선 그녀를 안는 것도 썩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안는 것이 옳다. 이건 단순히 성욕 때문이 아니다. 케레네가 여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사의 마력 신경계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여성 파일럿의 마력 신경계를 네토루가 원하는 형태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종류의 마력 신경계를 알아야만 했다.
창조를 위해서는 모방부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우선 인것이다.
아무리 네토루라고 해서 마력 신경계의 설계를 처음부터 새로 짜 만들 수는 없었다.
실제로 아직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건 새로운 마력 신경계의 구조를 설계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비교적 완성이 덜 된 카렌이면 모를까 정작 세레스의 마력 신경계는 아직 건들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상황에서 여기사인 케레네의 마력 신경계는 세레스를 조교할 때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설령 케레네가 여기사가 아니었어도 품에 안는 걸 꺼릴 이유는 없다. 새로운 마력 신경계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는 어떻게든 붙잡아야 했다.
실제로 그래서 네토루는 스스로 안 좋은 소문을 뿌리면서까지 부대를 자주 옮겨 다니며 커플링 파트너를 바꾸고 다니지 않았는가.
마력 신경계를 긴밀하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여성 파일럿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성기병이 중요한 전투 수단인 이상 네토루 혼자 강해져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의미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의 역량을 받아줄 파트너가 필요했고, 운명이나 행운 따위에 의지한 채 일일이 찾는 것보다는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제39구역에 있을 때,
─너에 대한 소문은 도대체 어디까지 진짜야?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전에 있던 부대에서 커플링 파트너를 망가뜨렸다는 이야기 말이야.
카렌이 첫 커플링을 끝내고 네토루에게 물어봤던 소문에 대한 진위 여유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네토루가 제39구역에 넘어오게 된 것도 전부 이러한 소문과 행동 때문이었다. 인위적으로 사건을 꾸며내 계속 커플링 파트너를 바꾸고 다니는데 어디 좋은 모습으로 보일까.
그때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케레네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죠? 어차피 당신이랑 실제로 몸을 섞든, 안 섞든 볼드로이 경이 어떻게 저를 생각할지 뻔한데요.”
케레네의 말대로다. 어차피 정말로 서로 관계를 맺든 말든 볼드로이의 생각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비록 네토루 덕분에 한숨 돌렸다고 해도 이것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괜한 짓을 한 걸지도 모른다. 앞으로 케레네는 볼드로이에게 영원토록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은 걸로 생각될 테니.
과연 오늘 이후로 케레네가 볼드로이에게 제대로 된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답은 뻔하다. 막말로 창녀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정말이지.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된 건지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지금 상황에 네토루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상황이 우습다. 어째서 내가 세레스를 멸시하던 여자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애초에 원래는 케레네를 안을 생각이 없다며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대로 그냥 무시하기에는 또 상황이 묘했다. 어쨌든 네토루가 끼어듦으로써 케레네의 처지가 더 꼬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잠시 생각하던 네토루는 뻐근한 목을 풀며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케레네를 안아 그녀가 구축한 마력 신경계의 설계를 손에 넣으면서도, 그녀의 처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말이다. 게다가 이러면 지금껏 구상하던 능력도 시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네토루는 케레네에게 물어보았다.
“너, 커플링 파트너 바꾸고 싶지 않아?”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케레네의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볼드로이와 케레네의 커플링 파장 일치율을 수복할 수 없을 수준까지 강제로 꺾어주면 그만이었다.
두 사람이 영원토록 커플링 할 수 없도록 말이다.
다만 이러면 문제는 두 사람이 커플링 할 수 없게 됨으로서, 엘프란디아를 넘어갈 때 기사 전력이 하나 빠지게 된 다는 점인데,
잘 생각해보니 이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괜히 협력도 안 될 녀석과 같이 억지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작전에서 빠지게 하는 게 네토루 입장에서는 편한 일이었다.
막말로 볼드로이가 어느날 갑자기 뒷통수를 노리고 덤벼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아닌가. 서로 화해를 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2.
어느새인가 방으로 돌아온 세레스는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까부터 머릿속이 붕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격납고에서 네토루한테 했던 자신의 추태를 회상하던 세레스는 훅훅 달아오른 얼굴을 그대로 베개 위에 파묻었다.
······아무래도 내가 잠시 미쳤나 보다.
방금 일을 떠올리자니 부끄러움과 민망함. 그러한 감정들이 절묘하게 뒤섞이며, 세레스의 얼굴을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만들고 있었다.
네토루가 다른 여자를 안는 것에 정색하던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되돌아봐도 너무 낯설었다. 심지어 카렌조차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 할 정도였으니.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머리가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쿵 뛰어다니는 것이 정말 미쳤나 싶었다.
그래도 지금 다시 잘 생각해보니 아예 잘못된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건 커플링 파트너로서 당연한 행동이자 권리였다.
서로 힘겹게 맞춘 커플링 파장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네토루가 케레네를 품에 안으면 파장이 흐트러질 게 뻔했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가만히 놔둘까.
그러니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 네토루가 다른 여자를 안는 것은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 나는 그냥 합리적인 판단을 했을 뿐이야.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세레스는 여전히 베개 위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애초에 커플링 파트너를 두고 다른 여자를 안는 것이 정상적인 이야기인가? 주변의 다른 사람한테 물어도 대답은 아마 전부 똑같을 게 뻔했다.
그렇게 생각이 거듭될수록 부끄러움과 민망함은 사라지고, 점차 합리화에 성공하며 세레스의 머릿속이 평온해지던 그때였다.
─세레스. 안에 있어?
“······읏?”
갑자기 들려온 네토루의 목소리에 세레스는 흠칫했다. 그 순간 애써 진정시켜놓은 생각들이 다시 뒤죽박죽 뒤섞이기 시작했다. 혹시 환청인가?
─세레스?
아무래도 환청은 아닌 모양이다.
“자, 잠시만요···. 기다려봐요···.”
그가 갑자기 왜 방에 찾아온 걸까. 잠시 그것을 생각하던 세레스는 일단 엎드려 있던 침대 위에서 조심스레 내려와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침대에 엎드려 있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흐트러진 옷맵시를 재빨리 정리했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단정히 정리한 세레스는 조심스레 자신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당연하지만 네토루가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혼자 온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평상복 차림의 붉은 머리칼 여인이 네토루의 옆에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서 있었다.
“···케레네 언니?”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레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케레네의 얼굴에 있는 온갖 상처들 때문이었다.
약을 발랐다고 하지만 부어오른 뺨과 불어터진 입술은 어찌 숨길 수가 없다. 게다가 푸르스름한 멍 자국까지. 여자 얼굴에 누가 이런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잘 보니 케레네 뿐만이 아니라, 네토루의 얼굴에도 상처가 있었다.
그 모습에 놀라서 표정이 굳어 있던 세레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그 상처들은 볼드로이 경 때문인가요?”
질문을 받은 케레네는 시선을 피했다. 팔 한쪽을 자기 품에 껴안으며,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다. 그 행동에 세레스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이건···. 너무하다.
볼드로이 경의 성격이야 예전부터 유명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때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화를 억누르는 세레스의 모습을 보던 네토루가 말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 있는데, 방 안에 들어가도 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