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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18화 (118/148)

〈 118화 〉 여기사

* * *

격납고에서 도망치듯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빌어먹을. 볼드로이는 머리끝까지 오른 열을 느끼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콕피트를 나오자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던 그 녀석의 얼굴이 계속 뇌리에 남아 떠돌고 있었다. 마치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눈빛.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감히 지금 누가 누구를 깔보는 건가. 그렇기에 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내가 이런 굴욕적인 수모를 겪어야 하는가.

볼드로이는 기사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귀족이라서 가능한 위치가 아니었다. 그만한 재능이 있기에 그는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전신에 마력 신경계를 구축하고, 기술을 익혔다. 헉명기에도 많은 사람을 죽이고 공을 쌓았다.

그렇지만 오늘 그는 완벽하게 패배했다.

성기병의 성능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단순히 역량 차이에서 완벽히 밀려버린 것이다.

볼드로이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한 패배를 받아들였다가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걸 부정하게 되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이번 싸움은 무언가 이상했다.

‘···도대체 마지막에 그건 뭐였지?’

볼드로이는 대련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것들을 되새겨보았다.

녀석이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싸움을 받아들였을 때 볼드로이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때 볼드르이는 케레네의 한계 출력에서 아득히 벗어난 출력으로 기동했다. 힘이든 속도든 녀석을 압도하지 않는 게 없었다.

하지만 믿기 어렵게도 녀석이 타고 있던 새하얀 성기병은 마지막 순간에 비정상적인 성능을 보여주었다. 기관 출신 주제에 오버로드 상태인 케레네의 성기병과 비등한 성능을 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이지?

만약 그러한 성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그렇게 무식하게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볼드로이 경.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던 케레네가 기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 목소리에 볼드로이는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에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 초라한 케레네의 모습에 볼드로이의 눈은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 생각해보니 이 모든 원인은 눈앞에 있는 케레네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 여자가 가만히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째서 내가 이 여자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것인가.

“케레네. 고개 들어.”

“···네?”

─찰싹!

고개를 들었던 케레네의 턱이 강하게 꺾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뺨이 붉게 변하고, 입술이 터지며, 입가에 핏물이 흘렀다.

“······으윽.”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케레네는 그의 손에 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조심스레 볼드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인가 그가 다시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복도의 새하얀 조명. 그 뒤로 그늘진 그의 얼굴에 서늘한 음영이 가라앉았고, 차갑게 식은 눈동자에는 살기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케레네는 발치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온몸이 떨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극한의 공포가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볼드로이가 싸늘한 목소리로 다시 말한다.

“고개 들어.”

그의 명령에 케레네는 달달 입술을 떨었다. 두렵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기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대로 몇 대 맞아주면 그의 화가 풀리겠지. 케레네는 체념했다. 어차피 이런 건 익숙하지 않은가. 단지 오늘은 그가 많이 화났을 뿐.

······그런데 그때였다.

“···꼴사납게. 파트너한테 화풀이라도 하는 건가? 그것도 기사라는 놈이 말이야.”

조소 어린 목소리가 복도 안에 울려 퍼졌다. 케레네는 그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복도 저편으로 걸어오는 웬 구릿빛 피부의 금발 사내가 보였다.

세레스의 커플링 파트너인 네토루였다.

어째서 저 남자가 여기에?

하지만 그러한 의문도 잠시.

“흐윽? 자, 잠시만, 갑자기 이게 무슨···?”

저벅저벅 거침없이 두 남녀 사이로 걸어오던 금발 사내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였다. 갑자기 케레네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등 뒤로 보낸 것이다.

“···하?”

그 난데없는 네토루의 행동을 지켜보던 볼드로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되었다.

저러니까 마치 네토루가 케레네를 지키려는 듯한 모양새 아닌가. 당연하지만 불쾌한 풍경이었다.

황당함을 넘어선 강한 분노에, 볼드로이의 핏발선 두 눈이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너, 뭐 하는 거냐? 비켜. 남 일에 끼어들지 말고.”

“그건 안 되겠는데.”

“···뭐?”

네토루가 입술을 비틀었다.

“이 여자 오늘 나한테 한 번 대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잘 꾸며서 내 방에 보내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이렇게 뺨 맞은 얼굴로 보내면 곤란하지.”

“······”

네토루의 말에 볼드로이가 입매를 올렸다. 하지만 그건 웃는 게 아니었다. 살갗을 저미는 듯한 살기가 그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상대를 찢어 죽일 듯한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미친 새끼. 지금 대련에서 한 번 이겼다고 내가 우습게 보여? 내가 정말 그 말을 지킬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만 볼드로이는 케레네를 웬 다른 남자와 배를 맞추게 할 생각은 없었다. 케레네는 자신의 파트너다. 미쳤다고 남한테 가랑이를 벌리게 하겠는가.

저 여자는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니 다른 남자의 몸 밑에서 교성을 흘리는 꼴은 절대로 못 본다.

그런 볼드로이의 말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네토루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대신 네가 나한테 무릎이라도 꿇던가. 원래 이번 싸움에서 지면 내가 무릎 꿇고 사과하는 거였잖아? 그러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않겠어?”

“···뭐?”

뻔뻔스러운 요구에 볼드로이는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주먹 쥔 손가락 틈새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네토루는 그런 볼드로이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냉소 어린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둘 중 하나 선택해. 네가 말했던 걸 지키거나 아니면 네가 무릎 꿇고 사과하던가.”

“···이 새끼가.”

볼드로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이성의 끈이 머릿속에서 툭 끊기는 걸 느끼며 그는 움켜쥔 주먹을 움직였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폭력이었다. 이내 바로 코앞에서 주먹을 맞은 네토루의 고개 훅 꺾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네토루는 기사가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에 맞고도 뒷걸음치는 일 없이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에 휘둘러진 볼드로이의 주먹을 밀어내듯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끄드드득···!

“······!”

팔의 근육이 팽팽하게 올라와 있는 가운데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점점 주먹이 밀려나고 있다.

볼드로이는 주먹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단순히 녀석의 힘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이 녀석은 방금 일부러 주먹을 맞았다. 마치 처음부터 피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증거로 놀라거나, 화나거나, 그러한 감정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어째서인가?

이윽고 볼드로이의 주먹을 밀어낸 채 끝내 고개를 원래 위치로 되돌린 네토루가 무미건조한 눈동자로 볼드로이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조금의 기죽음도, 흔들림도 없었다. 단지 잘 갈린 얼음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만이 볼드로이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네토루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과 맞닿아있는 볼드로이의 손을 움켜쥐고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라는 놈이 이렇게 주먹이 가벼워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

“이, 이자식···!”

꽈드득···.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악력이 볼드로이의 손목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

아프다. 잘 단련된 기사의 육신이 비명을 질렀다. 아수라처럼 치켜뜬 볼드로이의 눈가 옆으로 핏줄이 바싹 튀어 올랐다.

끝내 참다못한 볼드로이는 남은 왼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녀석을 진심으로 날려버릴 생각으로 마력까지 담았다. 전신의 마력 신경계가 순식간에 활성화되고, 초인의 영역에 이른 괴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일반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맞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힘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뻗어 나간 주먹은 네토루에게 닿지 못했다.

턱­ 하고 볼드로이의 손목이 곧바로 잡혔다.

볼드로이가 왼손을 뻗자 네토루 역시 남은 손으로 주먹을 막은 것이다. 네토루는 붙잡은 손 역시 부서뜨리듯 강하게 움켜쥐기 시작했다.

으드드득!

“끄으윽?!”

“···맞아주는 건 방금 한 번뿐이야.”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 말한 네토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온다. 순식간에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는 그 한걸음과 동시에 볼드로이는 자신의 손목이 꺾이는 걸 느끼며 뒷걸음쳤다.

“끄아아아악! 놔! 이거, 놓으라고! 어서, 안 놔?!”

볼드로이가 비명과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네토루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그에 맞춰 볼드로이 역시 뒷걸음을 반복해야만 했다.

이윽고 쿵­ 하고 복도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자 볼드로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네토루를 바라보았다.

끄드드득···. 이 순간에도 손목에서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아픔보다도 볼드로이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좆같았다.

그때 금발 사내가 히죽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떻게 할 거야.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가 강제로 무릎이라도 꿇게 해줄까?”

무릎을 꿇게 해준다고? 그 속삭임에 참다못한 볼드로이는 안 그래도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을 더욱 괴이하게 망가뜨리며 소리쳤다.

“···너,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 지금 누구를 건드리는 건지 알고 있는 거냐고!”

“감당? 그러면 이번 일을 다른 사람한테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녀보던가. 그런데 다른 기사들이 네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같이 안타까워 해줄까? 아니면 부끄럽게 여길까?”

네토루의 말에 볼드로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연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을 다른 기사들한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건 너 같은데. 기사라는 놈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 걸 남들이 알면 네 명예가 아주 나락 밑바닥까지 가라앉을 게 뻔하니까.”

“이 자식···.”

“자. 선택해. 마지막 기회야. 어떻게 할 거야?”

볼드로이는 목울대를 떨며 네토루와 케레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만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2.

손을 놔주자 볼드로이는 치욕에 물든 얼굴로 곧바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가 모습을 감추자 네토루는 입술 사이로 흐르던 핏물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쳤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의 주먹이었다. 그런 걸 정면에서 맞은 탓인지 입안에서는 피 맛이 느껴지고 있었다. 입술을 할짝대던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피할 걸 그랬나?’

사실 피하려고 하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토루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녀석의 주먹을 정면으로 맞아주었다.

그래야지 나중에 리엔이 곤란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기사와 분란이 생기면 제일 곤란해지는 건 사령관인 리엔이었다. 그러니 이번 갈등에서 네토루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될 필요가 있었다.

안 그래도 눈 밑에 항상 그늘을 매달고 다니는 어린 아가씨다. 그런데 괜히 이번 일로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과 관계가 꼬이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게다가 며칠 뒤면 같이 작전도 수행하게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제 이 상황을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까. 잠시 그걸 고민하던 네토루는 혼자 남겨진 붉은 머리칼 여인을 응시했다.

붉게 부어오른 뺨과 불어 터진 입술.

그러한 꼴로 케레네는 지금 이 상황이 곤란하다는 것처럼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한 여인을 가만히 지켜보던 네토루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따라와. 일단 의무실부터 가는 게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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