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여기사
* * *
당연하지만 콕피트 안에서 나오는 볼드로이의 표정은 썩 괜찮아 보이진 않았다. 화를 간신히 삼키는 듯한 우락부락한 붉은 얼굴과 잔뜩 찌푸려진 사나운 인상이 째릿하고 네토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토루는 그러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건 딱히 이번 승패에서 이겼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승패를 떠나 그의 등 뒤로 콕피트 안에서 몸을 비틀거리며 나오고 있는 케레네의 모습 때문이었다.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과 초췌해진 새하얀 얼굴. 어제 세레스에게 모멸적인 언사를 했던 앙칼진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단지 앞으로 일어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애처로운 여인 내의 모습만 있을 뿐.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입술 사이로 터진 핏물이 살짝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무리한 기동을 했다고 해도 저런 외상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유는 뻔하다. 아마 볼드로이한테 손찌검이라도 당한 거겠지.
당연하지만 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파트너에게 손찌검하는 모습이 결코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특히 그것이 귀족이라면 더더욱.
몇몇 기사들이 여기사를 성기병을 움직이기 위한 암말 취급한다는 소문은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걸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그래서일까. 그 순간 우습게도 케레네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세레스였다. 혹시 세레스도 기사단에서 저러한 걸 겪어봤을까. 그걸 생각하니 괜스레 머리 한쪽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침 눈치 좋게 네토루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카렌은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화난 건가?’
특유의 능글맞음이 완전히 사라진 채 차갑게 식어 있는 표정은 보고 있던 카렌도 무서울 정도였다.
뭔가 이렇게 화난 네토루를 보는 건 낯설어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그동안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화난 얼굴을 한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면 첫날에 카렌한테 뺨을 맞았을 때도 네토루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그때 네토루가 이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덕분에 괜스레 카렌도 조마조마해진 심정으로 그에게 기댄 채 걸음을 옮겼다.
2.
누가 이겼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구겨진 얼굴로 격납고에서 사라지는 볼드로이의 모습과 죄인처럼 그 뒤를 따라가는 케레네의 모습만 봐도 결과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니.
“어떻게 할까. 너한테 사과라도 하게 할까?”
“네?”
네토루가 카렌을 부축하며 내려왔을 때였다. 세레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네토루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케레네가 너한테 저번에 욕했던 거 말이야.”
“아···. 그거 말인가요.”
혹시 계속 신경 쓰고 있던 걸까. 세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굳이 사과까지 받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방금 세레스는 보았다. 케레네의 처연한 뒷모습을 말이다. 세레스는 그런 걸 보고도 굳이 따라가서 사과하라고 강요할 성격은 되지 못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상냥하게 대해주던 언니였다.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생각하면 그녀의 자존감을 짓밟을 정도로 강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오히려 두려운 얼굴로 파트너의 뒤를 따라가는 케레네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였다. 아무리 활달한 여기사도 기사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흐음···. 저래서 네가 그런 짓을 했던 건가?”
“그런 짓이라면···?”
문득 네토루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싶어서 세레스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네토루가 입가를 살짝 비틀며 웃었다.
“왜? 기억 안 나? 내 방에서 네가 녹음기 가지고 예전에 뭔 짓을 했는지.”
“······읏.”
갑자기 그 일을 왜 꺼내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다지 오래 안 된 일이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반쯤 잊고 있었던 사건. 이제는 세레스에게 흑역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얼굴을 붉힌 세레스는 시선을 틀었다.
“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요?”
“글쎄···.”
말끝을 흐리던 네토루는 볼드로이의 뒤를 따라다가는 케레네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저 뒷모습에서 세레스의 어린 모습이 얼핏 보이고 있는 건.
네토루는 세레스가 어린 시절에 기사단에서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잘 모른다. 애초에 세레스도 그걸 이야기해준 적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393부대에서 세레스가 어떤 텃세를 부리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썩 즐거운 기억들은 아니었겠지.
그동안 남자 무섭다고 꼬맹이들이랑 커플링하던 아가씨다. 심지어 네토루에게는 주도권을 넘겨받겠다고 웃기지도 않은 일을 벌였다.
그것만 봐도 전에 있던 커플링 파트너에게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네토루는 첫 커플링 때 세레스가 보여준 나약한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우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세레스, 너도 기사단에서 저런 취급을 당했던 건가 싶어서.”
“···네?”
생각지 못한 네토루의 말에 세레스는 잠시 말을 잃고서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변함 없는 삭막한 눈동자. 하지만 케레네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씁쓸해 보였다. 그런데 저 눈빛은 단순히 케레네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이 남자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건···.
설마 나인가?
“······”
방금 그가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 깨달은 세레스는 그저 멍청이처럼 눈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기사단 일로 자신을 진심으로 안타까워 해주는 건.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낯설고 억누를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 안쪽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먹먹하면서도, 따스하고, 기쁘고···.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끝내 감당할 수 없던 세레스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 깐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만약 네토루가 첫 커플링 파트너였다면 어쨌을까. 그러면 계속 기사단에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그의 조종을 감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거 외로는 모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보다도 헌신적이고 정의로운 모습을 생각하면 믿음직스러운 존재다.
··· 어쩌면 의외로 즐겁게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여느 다른 여기사들처럼 커플링 파트너인 네토루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겠지.
생각해보면 그래도 기사들과 사이좋은 여기사들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항상 간드러진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던 커플들이 몇몇 있었다. 실제로 그래서 언니들이 많이 부러워하기도 했고.
바보 같은 가정들이지만, 머릿속으로 온갖 것들을 생각해보던 세레스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부드럽게 풀린 온화한 눈이었다.
“어차피 이제는 전부 옛날 일이에요. 게다가 어차피 이제 저는 여기사도 아니니까···.”
거기까지 말하던 세레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멈추었다. 순간 그녀가 떠올린 건 기사단에 돌아올 생각이 없냐는 방금 전 베를레앙의 제안이었다.
─자네 기사단에 복귀할 생각 없나?
···당연하지만 세레스에게 이제 와서 기사단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그녀의 의지로 되는 일인가 였다.
바보 같게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비록 베를레앙은 제안하듯이 말했지만, 정작 그가 원하면 세레스의 의지 따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세레스가 아는 베를레앙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면 무엇을 못 할까.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으로 여기사의 목숨을 살려주고, 퇴출하였다. 그러니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다시 복귀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걸 생각하자니 세레스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안색이 파리해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자신이 기사단에 돌아가서 네토루가 아닌 다른 사람과 커플링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이제 와서 내가 다른 사람과 커플링이 가능할까?
아무리 지금은 네토루와 별문제 없이 커플링한다고 하지만, 그게 다른 남성 파일럿들이 괜찮아졌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세레스는 두려웠다. 자신의 처지가 옛날처럼 돌아갈까봐 말이다.
“···세레스? 갑자기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그때 네토루가 묻자, 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깜짝 놀란 세레스는 목울대를 떨며 획획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하면서도 세레스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를레앙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금까지 주변에 있던 베를레앙은 어느새인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이러면 곤란하다.
방금 거기서 확실하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어영부영 이야기가 넘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세레스가 오늘 저녁에 다시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네토루. 너, 케레네 어떻게 할 거야. 정말 그 여자랑 잘 생각은 아니지?”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카렌이 불쑥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그 여자랑 잔다고? 세레스는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서 네토루를 흘겨보았다.
혹시 내가 이해한 의미 그대로인가?
그 순간 세레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걸 느꼈다. 신기한 일이다.
방금까지 베를레앙 때문에 떠돌던 온갖 걱정들이 단번에 사라졌다.
“네토루, 이게 무슨 말이죠? 케레네랑 잔다니?”
“아···. 그게 말이지.”
세레스의 의문에 네토루는 잠시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띄웠다. 아무리 그래도 세레스 앞에서는 선뜻 쉽게 이야기할 내용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앞에서 묻는데 비밀로 해둘 수도 없는 일이다. 어차피 카렌도 알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 네토루는 적당히 대련 전에 있었던 일들을 그녀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자.
“···당연히 거절할 거죠?”
갑자기 세레스가 빙그레 온화하게 웃더니 네토루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 물음에 네토루는 순간 등줄기로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세레스의 입과 눈매는 웃고 있지만, 그녀의 눈은 결코 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자색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한기가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네토루 입장에선 지금껏 본 적 없는 터무니 없는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카렌도 그런 세레스의 눈빛에 놀란 건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혹시 화난 건가?
“물론···. 그래야겠지?”
그 기세에 압도당해 네토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러면 지금 당장 가서 거절하고 오세요···.”
세레스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네토루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잠시만···. 나 지금은 너무 피곤한데···.”
“으읏! 안 돼요! 빨리요!”
“···알았어.”
아침부터 많은 일이 있어서 피곤했지만 세레스의 닦달에 네토루는 어쩔 수 없이 볼드로이와 케레네가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