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16화 (116/148)

〈 116화 〉 여기사

* * *

“···나참. 도대체 이게 뭔 일이야.”

네토루 덕분에 아스나는 아침부터 훈련용 무장을 준비한답시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안 그래도 며칠 뒤에 있을 작전 때문에 준비할 게 많던 아스나로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막말로 리엔보다도 바쁜 것이 지금의 아스나였다. 한번 국경을 넘으면 제대로 된 보급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처음부터 철저하게 준비하고 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웬 뜬금 없는 대련 준비까지 해야 했으니.

아무튼···.

갑자기 네토루가 뜬금없이 기사랑 대련한다고 했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다. 앞으로 작전 날이 머지않았는데 갑자기 기사랑 왜 싸우는 것인가.

이제 와서 네토루의 실력을 의심할 생각은 없다. 뭔가 승산이 있으니까 수락했겠지. 하지만 문제는 승패를 떠나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라는 것이다.

아스나가 아는 기사라는 것들은 대체로 성격이 오만스러운 녀석들이 많았다.

뭐, 귀족이니 솔직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괜히 갈등을 만들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며칠 뒤면 같이 작전을 수행하게 될 텐데···.

‘···리엔도 고생이 많아.’

지금쯤이면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리엔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스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리엔은 사령관으로서 이번 대련을 거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같이 작전을 수행하게 될 기사단의 대표인 베를레앙이 이번 대련을 적극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은퇴했다가 복귀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한때 무려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리엔도 쉽사리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 곤란하게 된 것은 리엔이었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친구의 모습에 목덜미를 긁적이던 아스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이대로 하던 일이나 계속할 생각이었다. 며칠 뒤에 있을 작전을 생각하면 여전히 할 일거리가 많다.

하지만 그때였다. 문득 아스나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부터 격납고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세레스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웬 흰머리가 희끗희끗 드러나 있는 중년인이 있었는데,

얼굴은 처음 보지만 아스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 중년인이 바로 베를레앙이라는 걸.

그리고 세레스를 기사단에서 퇴출했던 남자다.

2.

네토루가 괜찮다고 했으니 승패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분명 어떻게든 이기고 오겠지.

다만 카렌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갑자기 난데없이 남의 싸움에 말려들게 된 거니까.

비록 그녀는 괜찮다고 해도 세레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며칠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세레스가 그 사실에 큰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였다.

“오랜만이군. 세레스.”

···익숙한 목소리. 수년 만에 들어보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그 목소리에 세레스는 흠칫하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와 있는 중년인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은 세레스가 기억하던 수년 전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나?”

“···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세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 없는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베를레앙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그러면 다행일세.”

왠지 베를레앙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건 오랜만에 만난 옛 단원이 반가워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호선을 그리는 눈매를 유지한 채 베를레앙은 세레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좋은 커플링 파트너를 두고 있더군. 아침에 잠시 만나보니 첫인상이 썩 나쁘진 않았네. 이른 아침부터 성실하게 훈련하는 친구는 많이 없으니까 말이야.”

“······”

···성실하게 훈련이라.

세레스는 이른 아침부터 훈련장에서 땀을 흘렸을 네토루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세레스가 기진맥진할 때까지 밤에 그렇게 붙잡아놓고서, 정작 본인은 이른 아침부터 훈련할 체력이 남아 있던 걸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다른 사람과 대화 중에 순간 자신이 뭔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서 얼굴이 훅훅 달아오르는 걸 느낀 세레스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베를레앙 경은 괜찮은 건가요?”

반신불수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신의 행운이 따랐다고 할 정도로 위태로운 부상이었다.

덕분에 빠르게 인수인계를 끝 맞추고 단장의 자리에서 내려왔던 사람이 바로 베를레앙이었다.

···적어도 세레스가 기사단에서 퇴출당하기 며칠 전의 상황은 그러했다. 그렇기에 네토루의 입에서 베를레앙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는 많이 놀랐다.

“하하. 사실 나라고 좋아서 복귀한 건 아니네. 몸뚱이가 이런데 계속 싸우고 싶겠나? 당장 지금도 조종석에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욱신거리네. 좋게 봐도 몸이 멀쩡하다고는 할 수가 없는 상태지.”

“···그런데도 어째서?”

“뭐···. 어쩔 수 없었네. 제7구역에서 자리 잡은 여왕도 그렇고, 이번에 있었던 프라시온도 사태도 그렇고, 한 사람이라도 더 손을 보태야 할 판이니까.

“즉···. 상황이 좋지 않아서 복귀했다는 거군요.”

“그런 거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아도 프랑기아 왕국의 상황은 썩 좋지가 않았다. 수년 전에 부상으로 은퇴했던 기사마저 복귀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이번에 계획된 엘프란디아 탐색은 사령부 측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왕국 내부 사정도 좋지 않은데 굳이 엘프란디아 쪽으로 병력을 보낼 필요가 있냐면서.

하지만 끝내 계획은 성사되었다. 베를레앙이 사령부의 미지근한 반응을 다그칠 정도로 적극적으로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부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버그들의 전체적인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게 베를레앙의 판단이었다.

이건 사활을 건 전쟁이었다.

그렇기에 시야를 넓게 볼 필요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괜찮더라도, 국경 밖에서 버그들이 과연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의견이 수용만 되었을 뿐인지라 이번 작전에 대한 지원은 저조했다.

실제로 이번 작전에 동원되는 기사의 숫자는 해봤자 소대 2개를 간신히 꾸릴 정도밖에 안 되었다.

만약 베를레앙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이것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레스. 자네는 무척이나 운이 좋네.”

“···네?”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였을까. 세레스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그 일은 ‘퇴출’로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까.”

“······”

“자네의 파트너인 잔세르센은 귀족이었지. 그것도 머지않은 미래에 큰 전력이 될 거라고 기대받던 기사였고 말이야.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기사단 내부에서 ‘처분’ 되었을 수도 있네.”

귀족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것도 보잘것없는 여기사가 말이다. 당연하지만 이건 결코 가볍게 스쳐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일단 기사단의 규율과도 관련된 일이니까.

여기사는 기사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것을 어긴 여기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래서 본래 세레스는 단순히 퇴출로 끝날 예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를레앙은 그런 세레스를 구해냈다. 그것은 단순히 불쌍해서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었다.

그건 단지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뿐이다.

지금도 변함없지만, 그때는 한 사람이라도 더 싸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였다.

물론 기사를 폐인으로 만든 여기사를 다시 쓸 수는 없기에 제39구역에 버려두기는 했지만···.

“그때 일은 정말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날 일을 잊지 않던 세레스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베를레앙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단장의 권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는 건 세레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데 저한테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베를레앙 경.”

세레스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눈치가 있다면 모를 수가 없다. 베를레앙이 단순히 사람 좋은 얼굴로 이곳에 과거의 일을 꺼내러 온 건 아니라는 걸.

“하고 싶은 이야기라···.”

베를레앙은 너저분한 턱수염을 쓸어만졌다.

그러한 행동에서는 어느새인가 방금까지 사람 좋던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한 집단의 장이었던 냉정한 얼굴만이 그곳에 있었다.

“자네 기사단에 복귀할 생각 없나?”

“···복귀 말인가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세레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당연하지만 썩 반가운 제안이 아니었다. 굳이 그곳에 돌아갈 이유가 없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저는···.”

쿠우웅···.

성기병 특유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말하려던 세레스를 무시하듯 슬며시 고개를 들던 베를레앙이 나직이 말했다.

“축하하네. 아무래도 자네의 파트너가 이긴 모양이야.”

그는 격납고 안으로 복귀하는 두 성기병을 바라보았다. 팔 한 짝이 잘린 채 너덜너덜한 상태로 돌아오는 붉은 성기병과는 반대로 새하얀 성기병은 너무나도 멀쩡하다.

그렇기에 베를레앙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몇 번을 보더라도 탐나는 인재였다.

3.

부대에 복귀하고 성기병이 격납고에 무사히 안착했을 때였다.

카렌은 조종석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네토루가 강제로 마력 신경계를 활성화한 감각이 여전히 몸 안에 잔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제 몸 같지가 않다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무리해서 기동 한 탓인지 하복부가 욱신거리는 가운데,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 신경계가 찌릇찌릇하고 떨고 있었다.

‘으읏.’

아픈 건 아니었지만 카렌은 조종석에 걸치고 있던 허벅지를 비비적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상할 정도로 온몸이 예민해진 탓인지 아까부터 제 몸을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허리가 빠진 것처럼 다리에도 힘이 안 들어간다.

그래도 그나마 지금은 이게 좀 나아진 상태다.

승패가 결정되던 한순간의 싸움에서 정작 카렌은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낯선 감각이 전신을 엄습했고, 그렇게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몸을 움찔움찔 떨며 조종석에 쓰러져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 네토루가 상대의 팔을 잘라내면서 싸움을 끝내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정도였다. 어쩌면 반대로 기동 불능 상태로 졌을지도 모른다.

“몸은 어때? 괜찮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네토루가 묻자, 카렌은 자신의 아랫배를 쓸어만지며 투덜거렸다.

“일단 괜찮은 거 같은데···. 이거, 정말 몸에 문제없는 거 맞지?”

“걱정 마. 아무런 문제 없을 거니까.”

또다. 이번에도 질릴 정도로 익숙한 패턴이었다. 덕분에 카렌은 괜스레 심술이 났다. 어떻게 저렇게 변함없이 자신할 수 있는 걸까.

“만약 문제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면 내가 어떻게든 책임질게.”

“···책임?”

그 대답에 카렌은 당혹스러운 듯 눈을 꿈벅였다. 책임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괜히 그걸 물었다가는 뭔가 부끄러운 걸 들을 것 같아서, 카렌은 조종석에서 간신히 몸을 세우고는 네토루를 보며 손을 뻗었다.

“···책임은 무슨. 됐고, 나 일어나게 손 좀 잡아줘.”

“그래.”

고개를 끄덕인 네토루는 자신을 향해 뻗어온 카렌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반쯤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톡, 하고 그의 가슴팍에 이마가 닿고 말았다.

“자, 잠시만···. 그냥 손만 잡아달라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강한 척 하지 말고. 그냥 기대.”

“···으윽.”

그의 말대로 카렌은 정말로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고 있었다.

“···에휴. 알았어.”

그래서 카렌은 그냥 마음 편하게 그에게 몸을 기대기로 했다. 순순히 네토루의 어깨와 목에 카렌이 팔을 올리자, 네토루는 자연스레 카렌의 허리를 안아주었다.

······저번에 세레스가 네토루한테 몸을 기댔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몸은 단단한데 생각 이상으로 포근한 느낌이 썩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콕피트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마침 맞은편에 안착되어 있던 붉은 성기병에서도 콕피트가 열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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