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여기사
* * *
···갑자기 기사랑 대련이라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세레스를 대신해서 커플링 해달라는 건 그렇다 쳐도, 설마 세레스가 있었던 세인트 미샤르의 기사와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카렌이 탈의실에서 슈트로 갈아입고 있자니, 옆에서 죄인처럼 그늘 진 얼굴을 하고 있던 세레스가 거듭해서 물었다.
“···카렌. 정말 괜찮겠어요?”
아까부터 옆에서 안절부절하는 세레스의 모습에 카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쯤되면 오히려 카렌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현재 세레스는 카렌에게 사정을 전부 털어놓은 상태였다. 자기 때문에 대신 싸우게 되었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권리는 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세레스가 케레네라는 여기사랑 크게 싸운 것 같은데, 그러다가 커플링 파트너의 자존심 문제로 연결된 듯하다.
즉, 남성 파일럿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하여 오늘 뜬금없이 볼드로이라는 사내와 네토루가 대결하게 된 것이 현 상황이었다.
카렌은 입고 있던 슈트의 차림새를 점검하며 세레스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세레스, 며칠 뒤면 출격인데 괜찮겠어? 네토루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몸 상태가 호전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다던데.”
“아···. 그, 그게 말이죠···. 그건 걱정 안해도 될 거예요. 요즘 몸관리에 엄청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분명 예정 날짜까지는 괜찮아질 거예요.”
딱히 의도한 건 아닌데 세레스가 갑자기 당황하더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횡설수설했다.
카렌은 그 반응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현재 세레스는 네토루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반응이 이러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것.
‘···아직 모르는 건가?’
세레스는 아직 카렌 역시 네토루에게 치료받은 적이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당황할리가 없다.
이러니까 뭔가 곤란해지는 기분이다.
이쪽은 알고 있는데 정작 저쪽은 모르고 있으니 뭔가 의도치 않게 비밀을 숨기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별로 유쾌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레스에게 선뜻 털어놓기도 좀 그렇다.
아무리 치료라고 하지만 어디 남자랑 키스하고 있다는 걸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나츠오가 말한 것처럼 세레스가 네토루랑 정말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더더욱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연인이 남이랑 키스하는 걸 어떻게 좋아할까. 아무리 세레스라고 해도 기분이 나쁘겠지. 반대로 카렌이었어도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계속 비밀로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정말이지···. 세레스를 흘겨보던 카렌은 어색한 미소를 유지한 채 슈트를 마저 갈아입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대한 관계가 점점 확신에 이르고 있자 뭔가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2
당연하지만 성기병을 타고 싸우는 대련이 파일럿들끼리 마음대로 가능할 리가 없다. 성기병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비 반장인 아스나의 도움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사령관의 허락이 필요했다.
다행히 연락을 받은 리엔은 대련을 허락해주었다. 다만 곤란해하는 기색은 숨길 수가 없었지만.
아스나의 도움으로 훈련용 무장들이 준비되고 있는 가운데, 파일럿 슈트로 환복을 끝내고 성기병 앞에 도착하니 콕피트는 이미 열려 있었다.
카렌은 자신의 성기병 안으로 들어서며 조종석에 앉아 있는 네토루를 보았다.
그는 명상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카렌의 기척을 느끼고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 순간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고, 그가 말했다.
“카렌. 이번 일은 미안해.”
“······”
네토루의 솔직한 사과에 카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방금 뻔뻔하게 커플링 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사과하는 건가.
하지만 그래도 네토루가 미안한 건 알고 있다고 하니 괜스레 꿍해 있던 감정이 조금은 풀렸다.
그래서 카렌은 풋 가볍게 웃고는 말했다.
“···뭐야, 너. 사과하는 게 너무 늦어. 갑자기 커플링 해달라고 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카렌은 자신의 조종석에 몸을 엎드리고는 성기병과 커넥팅을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굳이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 나는 지금 억지로 싸우는 게 아니야. 이건 그냥 내가 너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니까.”
“···미안하다고?”
카렌의 말에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카렌이 자신한테 뭔가 잘못한 게 있던가.
오히려 미안해야 할 건 네토루였다.
웬 남성 파일럿들의 자존심 때문에 카렌을 강제로 끼어들게 한 거니까.
그런 네토루의 의문에 답하듯 카렌이 말했다.
“의무실에서 내가 네 이야기를 엿들었잖아. 사람들한테 네가 제1독립기동부대 출신이라는 거, 숨기고 싶던 거 아니야?”
“···겨우 그거 가지고?”
네토루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게다가 일부러 들은 것도 아닐 터.
카렌이 그 이야기를 들은 건 그냥 근처에 있다가 어쩌다 보니 듣게 되었을 뿐일 것이다.
네토루가 알고 있는 카렌은 비밀스럽게 남 이야기를 엿듣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네토루.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뭘?”
“···이건 아까 식당에서 하다가 만 이야기인데.”
카렌은 그 순간 네토루의 표정이 살짝 굳는 걸 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1독립기동부대···. 바르베르크가 무너질 때 너도 그 부대에 있던 거지?”
“······”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네토루는 조종석에 엎드려 있는 카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느새인가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고 있었다. 마치 일부러 서로의 얼굴을 피하듯.
덕분에 지금 카렌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네토루는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카렌은 원망하고 있을까.
솔직히 카렌이 원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자기 고향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부대를 어찌 좋아할까. 만약 그녀가 그 일로 욕한다고 해도 네토루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바르베르크.
네토루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순간 어둠이 찾아오고 그날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폐허가 된 도시의 풍경과 기나긴 피난 행렬.
그리고 그 안에는 카렌도 있었을 터. 그것도 어린 카렌이 말이다. 지금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제 겨우 사춘기가 시작되었을쯤의 어린 나이였겠지.
그러면 혹시 카렌은 부모님도 그때 잃은 걸까.
커플링을 하다 보면 서로 온갖 이야기들을 꺼내길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카렌의 가정 이야기도 얼핏 섞여 있었다.
네토루가 알기로 카렌은 어린 시절에 버그들한테 부모님을 잃었다고 들었다. 기관 출신들 중에서는 제법 흔한 일이라서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카렌이 부모를 잃은 건 내 잘못일 테니까.
네토루는 입술을 달싹였다. 입술이 무겁다. 단어 하나 말하는 것조차도 목에 탁탁 걸리는 기분이다.
만약 숨기려고 하면 숨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거짓말은 싫다. 그건 눈앞에 있는 소녀를 기만하는 일이니까. 더욱이 커플링 파트너지 않은가.
이윽고 네토루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맞아. 그때 나도 있었어.”
“···그래.”
그때 마침 커넥팅이 끝난 건지 카렌의 몸 주변으로 마법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리를 비롯해 허벅지와 팔에 마법진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렇게 전투 중에 흔들림을 방지해주는 속박 마법진이 팔다리에 형성되고, 그걸 시험하듯 카렌이 가볍게 몸을 흔들어보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토루.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그 일로 괜히 내 눈치 보지 마.”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네토루의 살짝 커졌다.
“멍청아. 그러니까 바르베르크가 무너진 일로 내 눈치 보지 말라고. 너한테 그런 건 안 어울리니까. 그냥 평소처럼 행동해. 너, 그거 너무 안 어울려.”
“······”
이건 또 뭘까.
너무나도 당돌한 카렌의 태도에 네토루는 무심코 눈을 꿈벅이며 말을 잃었다. 그러자 그런 네토루를 보며 카렌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는 노려보았다.
“···너 혹시 방금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 막 내가 그때 좀 더 잘 싸웠다면, 괜찮지 않았을까 하고.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다고.”
“···그건.”
“뭐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나 보네.”
아무래도 정말이었나보다. 네토루를 응시하던 카렌은 코웃음쳤다. 왠지 멈칫하는 네토루의 모습이 너무 낯설면서도 신기해서였다.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저런 네토루를 보니 문득 옛날 일이 떠오르는 건.
괜히 그때 일이 떠올라서 더욱 마음에 안 든다.
카렌은 여느 때처럼 뻔뻔스러운 네토루의 모습이 좋았다. 조금 얄미워도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래서 카렌은 그의 얼굴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하는 건데 굳이 나한테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나는 그 일로 너를 원망할 생각은 없으니까.”
“······”
“···게다가 그때는 너, 나이도 어렸을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책임감 가질 위치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설령 그때 네가 잘 싸워봤자 결과가 얼마나 바뀌었을 것 같아.”
카렌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네토루가 돌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카렌. 아무리 내 나이가 어렸다고 해도···. 그때 나는 지금의 너랑 동갑이었을 걸?”
“응? 그, 그런가? 아니. 그러니까···.”
말꼬리를 잡아당기며 목소리를 흐리던 카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눈을 찡그렸다.
“···아무튼, 어렸던 건 맞잖아?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어?”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
그때쯤 카렌의 등줄기에서 푸르스름한 선과 함께 조정간이 떠올랐다. 네토루는 카렌의 조정간을 자연스레 쥐었고, 카렌은 커플링이 성립되는 걸 느끼며 희미하지만 네토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당사자는 괜찮다고 하지만 정작 상대는 가끔씩 쉽사리 수긍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처럼 말이다.
그러면 이럴 때 해결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상대방이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도록 탈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카렌은 그에게 탈출구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아직 미안하면, 엘프란디아로 가기 전에 생일 선물이라도 주던가.”
“생일 선물···?”
“그래. 나, 이제 곧 생일이잖아.”
“···음. 그거, 노력해볼게.”
다행히 통한 걸까. 카렌은 조종간을 쥐고 있는 그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건 무척 다행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
“···그런데, 네토루. 내 성기병으로 볼드로이라는 사람 이길 수 있겠어?”
그 물음에 네토루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걱정 마. 너랑 나라면 충분히 가능하니까.”
“아니, 그래도 상대는 기사인데? 너라면 모를까 정작 나는 평범한 기관 출신이고···.”
“왜? 불안해? 너 때문에 질까봐?”
“응···.”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 상하지만 여기사보다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네토루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만 믿어. 어떻게든 이길 테니까. 방금 저 남자가 널 기관 출신 파일럿 따위라고 말한 거, 반드시 후회하게 해줄게.”
“···뭐?”
이 녀석, 혹시 아까 그 남자가 했던 말을 계속 신경 쓰고 있던 걸까.
순간 뭔가 싶던 카렌은 입을 앙 다물었다.
그나저나 엄청 부끄러운 말을 진지한 목소리로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정말로 뻔뻔스럽게 말이다.
덕분에 카렌은 괜스레 얼굴이 훅훅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