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여기사
* * *
여러 의미로 피곤한 아침이었다.
네토루한테 늦은 새벽까지 계속 시달린 것도 문제였지만, 침대에서 나오고 움직일 때마다 아랫배가 욱신거려서 걷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런 상태로 네토루의 방에서 몰래 나올 때는 심장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혹시라도 다른 부대원들이 볼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으로 돌아와서 속옷과 옷을 챙기고는 샤워까지 무사히 끝낼 수 있었는데···.
“···좀 깨워주지 그랬어요.”
세레스는 옆에서 걷고 있는 네토루를 보며 그리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기 혼자 일어나서 여유롭게 씻고 온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녀의 투덜거림에 네토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깊게 잠들어 있어서 못 깨우겠더라고. 안 그래도 많이 피곤했을 거 아니야.”
“하아···. 확실히 피곤은 했죠. 당신이 계속 안 놔준 탓에 새벽 내내 시달렸으니까.”
여전히 걸을 때마다 허리와 골반이 아프다. 당연하지만 이건 전부 네토루 때문이었다. 그날 밤에 허리와 허벅지는 또 얼마나 강하게 쥐었던 건지, 씻을 때 보니까 창백한 멍자국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허리에 멍자국이 남았다고 세레스가 투덜거리자, 걷고 있던 네토루는 억울하다는 듯이 자기 목덜미를 보여주었다.
“···난 목에 손톱자국 남아 있는데? 이건, 누구 때문인 거 같아?”
“으읏···.”
“봐. 피도 조금 났을걸?”
“구, 굳이 그런 걸 보여줄 필요는 없어요!”
아무래도 이 남자는 작은 투덜거림도 받아줄 생각이 없는 건가. 자기도 피해자라면서 뻔뻔하게 구는 그 모습에 세레스는 끝내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 덕분에 둘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맴돌았지만,
그것도 잠시. 네토루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서 몸은 어때? 마력 신경계는 괜찮은 거 같아?”
“···네. 확실히 많이 나아졌어요.”
키스를 할 때도 놀라운 회복력이었지만 섹스와 비교하면 우스울 정도였다.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이 정도로 나아질 수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지경이다.
···아무래도 했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나보다.
세레스는 아직도 배 안에 남아 있는 아픔과 이질감을 느끼며 네토루를 힐긋힐긋 쳐다보았다.
“···다음은 언제인가요?”
“다음?”
“그···. 치료요! 한 번으로 끝날 건 아니잖아요.”
“글쎄···. 아마 매일 해줘야 할걸?”
“매, 매일이요?”
네토루의 대답에 세레스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치료라고 해도 매일은 무리다. 그러면 몸이 멀쩡하지를 않을 것이다. 세레스는 새벽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고는 온몸을 떨었다.
세레스가 반쯤 울먹이고 나서야 겨우 잠에 재워주었던 남자였다. 설마 그걸 반복하자는 건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하체에 힘이 풀리는 감각 속에서 세레스가 소리쳤다.
“자, 잠시만요···. 매일은 무리에요!”
그러자 네토루가 여느 때처럼 능글맞게 웃었다.
“어째서?”
“아, 아니···. 어째서라고 해도···. 애, 애초에 당신은 괜찮은 거예요?”
아무리 남자가 성욕에 미친 존재라고 해도 그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었다. 세레스도 그 정도는 안다. 게다가 어제 그가 어디 한두 번으로 끝냈던가.
그런 걸 반복했다가는 이 남자도 멀쩡하진 않을 터.
“너만 괜찮다면, 나는 문제 없는데.”
“···읏.”
정말 문제가 없는 건가? 생각해보면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새벽에도 지치질 않던 남자였으니까.
침대 위에서 아무리 지쳐 쓰러져도 세레스를 일으켜 세우던 게 바로 네토루였다.
이쯤 되면 두려움마저 느껴지고 있는 가운데, 네토루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걱정 마. 농담이었으니까.”
“···농담이요?”
“응. 아마 이제는 키스만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할 거야. 어젯밤처럼 굳이 잠자리를 가질 필요는 없고.”
“······”
그러면···. 이제 끝이라는 건가?
그건 다행인데···. 이건 어째서일까.
정작 이러니까 안도감과 아쉬움. 그것들이 미묘하게 맞물리며 가슴을 찡 울리고 있었다.
게다가 정작 네토루에게서는 아쉬움 하나 없어 보여서 왠지 얄밉다. 이 남자는 정말 그걸로 만족하는 건가. 밤에 그렇게 짐승처럼 나를 범했으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세레스는 순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서 흠칫했다. 그래서 애써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획획 저을 때였다.
“세레스.”
“···읏? 왜, 왜요?”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인가 진지하게 변한 네토루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세레스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고 말았다. 혹시 방금도 농담이라고 할 생각인가?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혹시 베를레앙이라는 사람 알아?”
“·· 예? 누구요?”
뜻밖의 이름이 돌연 네토루의 입에서 나오자, 세레스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방금까지 머릿속에 있던 온갖 잡념들도 싹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이 남자에게서 왜 저 이름이 나오는 걸까.
세레스는 고개를 돌려 네토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보라면서.
그런 그녀의 자색 눈동자에 담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네토루는 다시 한번 이름을 말했다.
“베를레앙이라는 기사 말이야. 혹시 모르는 거야?”
“아니요···. 알긴 아는데···.”
아무래도 잘못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에 세레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이 남자에게서 저 이름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어째서, 당신이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건가요?”
“오늘 아침에 만났거든.”
“···네? 아침에요?”
세레스는 눈을 꿈벅였다. 자신이 자는 사이에 그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그 와중에 또 만난 사람이 베를레앙 경이라고 하니 이쯤 되면 황당할 정도다.
“반응을 보니까,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은데 누구야?”
···당연히 잘 알 수밖에. 모르면 이상한 일이다.
“그분은···.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의 단장님이에요.”
아니, 정확히는 ‘전’ 단장님이라고 해야 하나.
세레스의 말을 믿기 어려웠는지 드물게도 네토루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양반이 단장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네토루의 반응에 세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양반이라니···. 말조심하는 게 좋아요. 그거 다른 기사가 들었다가는···.”
“···이런? 이미 들어버렸는데. 세레스.”
그때였다. 돌연 뒤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에 세레스는 얼어붙었다. 그녀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올백 머리의 금발 사내가 있었다.
케레네의 파트너인 볼드로이였다.
2.
···결국,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바르베르크에 대해서 네토루에게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카렌은 그에게 그일로 자신한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괜스레 그게 마음 깊숙히 남아버린 상황 속에서.
“카렌. 저 두 사람이 신경 쓰이는 거야?”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라니.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잖아?”
식당에서 나왔을 때였다. 네토루와 세레스의 뒤를 응시하고 있던 나츠오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카렌은 나츠오의 말에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내가 정말로 그랬나 싶어서 지금 잘 생각해보니, 확실히 식당 안에서 계속 세레스와 네토루의 분위기만 살폈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네토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정작 세레스 때문에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묘하게 세레스를 챙기는 네토루와 그런 네토루를 의식하듯 눈치를 보는 세레스. 그 기묘한 기류는 식사 내내 계속되었다. 덕분에 아무리 눈치 없어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다.
그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왠지 두 사람 모두 한 층 더 관계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뭐,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지면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커플링 파트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저 두 사람 혹시 사귀는 거 아닐까.”
그때 이어지는 나츠오의 말에 옆에 있던 카렌은 순간 흠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 응? 저, 둘이 사귄다고?”
“그래. 뭔가 분위기가 그렇지 않아? 예전에 카미죠 형이랑 사나에 누나가 저랬잖아.”
“···그건.”
카미죠. 사나에. 두 사람은 393부대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동시에 사이좋은 커플이었다.
비록 두 사람 전부 전투 중에 전사 했지만,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 좋던 두 사람의 모습은 카렌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나츠오의 말을 듣고서 카렌은 다시 한번 네토루와 세레스의 뒷모습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지금도 잘 보면 네토루와 이야기하며 세레스가 살짝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은 지금껏 카렌이 본 적 없는 세레스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가끔씩 네토루에게 표정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모습 또한 뭐라고 해야 할까.
의식하지 않아도 카미죠와 사나에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딱 저런 느낌이었다. 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모습이 말이다.
···그러면 정말 저 두 사람은 사귀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카렌은 아직도 기억한다. 네토루의 방에서 흘러나왔던 세레스의 신음 소리를 말이다. 서로 몸까지 섞었는데 이제 와서 긴밀한 관계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래, 그건 분명 그런데···.
어째서일까. 카렌은 네토루가 세레스랑 연인이 된다는 걸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고민하던 카렌은 곧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동안 393부대에서 네토루와 제일 가까이 지냈던 건 세레스가 아닌 카렌이었다.
애초에 세레스보다 카렌이 네토루와 더 많이 커플링했었고, 부대 안에서 같이 있던 시간도 더 많았다. 게다가 카렌은 알고 있다. 세레스가 네토루랑 커플링을 피하기 위해 뭔 짓을 했었는지.
그런데 갑자기 저 두 사람의 사이가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으니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애초에 저 녀석의 파트너는 원래 나였는데.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카렌.”
문득 상념에 잠겨 있던 카렌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인가 바로 앞에 네토루가 있었다.
“으응? 네, 네토루? 뭐, 뭐야?”
“너, 아까부터 이름 불러도 대답이 없고···. 뭔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뭔 생각을 하냐니···.”
···그야. 물음에 대답하려던 그 순간 카렌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자신이 뭘 말하려는 건가 싶어서였다.
덕분에 괜스레 부끄러워진 카렌은 입을 다문 그대로 살짝 고개를 틀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왜 찾는데?”
그런데 그 대답은 네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다.
“···겨우 이런 기관 출신 파일럿 따위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
기관 출신 파일럿 따위라고?
이건 또 뭘까. 카렌은 그제야 네토루의 근처에 있는 낯선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올백 머리를 하고 있는, 뭔가 재수 없어 보이는 사내였다.
지금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 카렌은 네토루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랑 커플링 좀 해줘야겠다.”
당연하지만 카렌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