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여기사
* * *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다. 다른 부대원들이 어슬렁어슬렁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가운데 오로지 세레스만이 안 보였다.
드문 일이다. 세레스가 식사 시간에 늦는 것은 말이다. 그렇기에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던 카렌이 표정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세레스가 늦네. 혹시 아직도 자고 있나?”
“걱정 마. 세레스라면 이제 곧 올 테니까.”
그때 카렌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네토루가 그리 말하더니 카렌의 앞자리에 앉았다. 카렌은 그런 네토루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 싶어서였다.
“곧 올 거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아까 만났거든.”
“세레스를? 내가 식당에 오기 전까지도 세레스는 방에서 안 나오고 있었는데?”
카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레스가 방 안에서 나오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방문을 두들겨봐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깊게 자고 있나 싶어서 그냥 포기하고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남자인 네토루는 세레스를 어디서 만난 걸까. 그것도 의무실에서 헤어질 때 바로 샤워하러 간다고 했던 녀석이 말이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주둔하는 기지가 달라졌다고 해도 여성과 남성의 구역은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니 네토루가 세레스의 행방을 아는 건 뭔가 이상했다.
“···음.”
카렌의 의아한 눈길에 네토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옳았던 듯했다. 당연하지만 차마 세레스가 자신의 방 안에서 자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세레스도 부랴부랴 샤워실에서 씻고 있겠지. 밤에 치렀던 정사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식당에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그러한 사정을 모를 카렌은 별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네토루가 대답이 없자 눈매가 서서히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네토루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진실과 거짓을 반반씩 담아 카렌에게 대답했다.
“내가 방금 씻고 나올 때, 세레스가 여자 샤워실에 들어가는 걸 봤어.”
“···샤워실?”
“그래. 아마, 네가 식당에 오는 사이에 방에서 나왔던 거 같은데.”
“······”
네토루의 대답에 카렌은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카렌은 네토루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걸 깊게 하고들기는 뭔가 그렇다.
그래서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빵을 찢어 스프에 찍어 먹고 있을 때였다. 네토루를 힐끔 쳐다보던 카렌은 아침부터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
“네토루.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묻고 싶은 거? 뭔데.”
이걸 그냥 솔직하게 물어봐도 되는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알게 된 거 카렌은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기로 했다.
“의무실에서 들었는데 너, 예전에 제1독립기동부대라는 곳에 있었다며?”
“···뭐야. 설마 그걸 엿들은 거야?”
“아니···. 으음···. 딱히 의도해서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정말 어쩌다 보니?”
네토루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덕분에 카렌은 괜히 물었나 싶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용기 내어 넌지시 물어보았다.
“···거기는 뭐 하는 부대야?”
카렌은 예전에 네토루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전에 어떤 부대에 있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비밀이라면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의무실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카렌에게 호기심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네토루의 과거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기사인 베를레앙과 이야기 하던 모습이 너무 진지했던 탓에 더욱 신경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때 카렌의 질문에 대답한 건 네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카렌. 너 설마 모르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면, 제1독립기동부대를 한 번쯤 들어봤을 텐데.”
나츠오의 목소리였다. 뒤늦게 식판을 들고 온 그는 자연스레 의자를 끌고서 카렌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야. 나츠오, 너는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당연하지. 네 고향인 바르베르크가 버그들한테 함락당할 때 제일 먼저 방어선이 뚫렸던 부대잖아.”
“···응? 뭐라고?”
생각지 못한 나츠오의 대답에 카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카렌의 반응에 나츠오는 표정을 찡그렸다.
“···카렌. 정말 몰랐던 거야?”
“그야···. 그런 걸 알리가 없잖아. 반대로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야 그때 신문에서 봤으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첫 번째 면에 제일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어. 바르베르크가 무너진 건 제1독립기동부대 때문이라고.”
“······”
그때 신문에 그런 게 적혀 있던 걸까.
바르베르크가 무너지고 카렌은 오랫동안 피난 행렬을 따라 돌아다녀야 했고, 그러다가 결국 낯선 도시의 고아원에 맡겨져 있던 것이 카렌의 과거였다.
그러니 당연하지만, 그 당시의 어린 카렌이 신문 같은 걸 볼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카렌은 예상치 못한 정보에 조심스레 네토루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그 당시에 네토루가 제1독립기동부대에 있었나 싶어서였다. 그러면 이렇게 함부로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다.
그런데 그 불길한 직감은 맞았던 걸까.
“···카렌. 너, 바르베르크 출신이었어?”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무겁게 깔린 네토루의 목소리가 카렌의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보았다.
네토루의 표정에 깔린 짙은 그늘을 말이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어두운 표정을 지은 적이 있던가. 평소와 다르게 복잡한 감정이 뒤얽혀 있는 그 삭막한 눈동자에 카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네토루는 정말 그 당시에 제1독립기동부대에 있었나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하지 않을까 싶은 사실이었다.
“그, 그렇기는 한데···.”
“그런가···.”
네토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카렌은 그 순간 숨을 삼키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렌은 이런 네토루의 얼굴을 보자고 제1독립기동부대에 대해서 물은게 아니었다.
죄책감과 슬픔으로 물든 네토루의 얼굴은 너무나도 안타깝고, 낯설어서 카렌은 아연해졌다. 덕분에 괜히 물었다 싶은 뒤늦은 후회가 그녀를 괴롭혔다.
“그···. 네토루? 지금 뭔 생각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나는···. 딱히 너를···.”
“죄송해요···. 저만 늦었네요.”
카렌이 말을 끝내기도 채 전이었다. 뒤에서 식판을 들고 오던 세레스의 말이 카렌의 말을 끊었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말이 꼬인 카렌은 무심코 혀를 깨물었다. 이건 타이밍이 너무 나쁘다. 그래서 괜스레 카렌이 세레스를 원망스럽게 흘겨보던 그때였다.
“······?”
문득 카렌은 네토루와 세레스에게서 미묘한 기류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건 뭔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
네토루가 힐끔 쳐다보자 세레스가 살짝 시선을 피하더니, 어디를 앉아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새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네토루 옆자리 말고는 앉을 곳이 없었다. 이미 다른 곳에는 부대원들이 앉아 있었으니까.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가 재미있는지, 방금까지 심각했던 표정을 지우고서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세레스. 뭘 그리 고민해. 그냥 내 옆에 앉아. 어차피 앉을 곳도 없잖아?”
“으읏···. 그, 그렇기는 한데요···.”
네토루가 직접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주자 차마 거절할 수 없던 건지 세레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왠지 세레스의 얼굴이 붉다.
···이건 도대체 뭘까.
방금까지 어두웠던 네토루의 얼굴이 세레스가 나타나자 미묘하게 밝아진 것도 그렇고, 그런 네토루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세레스의 모습도 그렇고···.
누가 봐도 평범한 분위기는 아니었는지라 계속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저 두 사람 사이좋네···.”
옆에 있던 나츠오가 싸늘한 목소리 그리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흠칫한 카렌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나츠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지금 보면 안 될 걸 본 것처럼 온갖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누가 봐도 그것은 질투하는 얼굴에 가까웠다. 덕분에 카렌은 자연스레 생각할 수밖에
···이 녀석 설마?
2.
지난 며칠간 393부대가 도시 안에 주둔하고 있지만, 사령관인 리엔의 생활 패턴은 변함이 없었다. 한 번 패턴이 무너지면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은 언제나 근면성실해야 했다.
······물론 그래도 도시에 주둔한 이후로 조금 편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제39구역에 있을 때 리엔은 항상 버그들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만 했다. 자고 있을 때조차도 마법으로 긴밀한 관측망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비록 버그들이 야간에 움직이는 일이 드물기는 하지만, 그래도 야간 침투가 아예 없는 건 아닌지라 새벽 도중에 잠을 깼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항상 리엔의 눈 밑에 다크써클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39구역에 있는 이상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나마 가끔씩 아스나가 대신 관측망을 유지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9:03.
리엔은 아직 낯선 사령관 집무실에서 조용히 몸가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찾아올 손님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얼굴 좀 보고 싶다나.
비록 부상으로 인해 은퇴했던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한때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의 단장을 부임했던 자였다.
그러니 아무리 리엔이 사령관이라고 해도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제 곧 올 시간이 됐는데?”
뭔가 늦는다 싶어서 시간을 확인한 리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래 9시 정각이 되면 찾아오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건가.
그러한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타이밍 좋게 뚝뚝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온 것일까.
리엔이 들어와도 된다고 말하자, 곧 문이 열리더니 올백 머리를 한 금발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의 볼드로이 경이었다.
···왜 이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볼드로이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크흠··· 베를레앙 경이 저한테 자기 대신 말 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오늘은 사령관을 못 볼 것 같다고 말입니다.”
“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게. 대련 중에 허리를 삐끗했다고.”
“···네?”
대련? 허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