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0 엘프란디아
“으윽···. 이거, 안 되겠구만.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침대에 엎드려 있던 베를레앙이 신음을 흘렸다. 네토루는 첫인상과 너무나도 다른 그 초라한 중년인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쉬었다.
“아니, 기사라는 양반이 이게 뭡니까?”
“자네도 버그 놈들에게 총 한 번 맞아보게. 그러면 나처럼 될 테니까.”
“···사정은 알겠는데, 그러면 애초에 이런 몸으로 왜 저랑 대련하자고 한 겁니까?”
“나야 그냥 가볍게 몸이나 풀려고 했지. 어디, 자네가 미친 놈처럼 달려들 줄은 어찌 알았겠나?”
쓸데없이 진심으로 싸운 전부 네놈 탓이다. 노골적으로 그런 눈빛을 보내는 베를레앙의 태도에 네토루는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진심을 다해 덤벼들기는 했다. 어쨌든 기사니까 전력을 다해야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런 기회도 드물고 말이다.
그런데 설마 검을 몇 번 나누기 무섭게 항복을 외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기사라는 존재가 말이다.
“···. 끄응. 예전에는 하루종일 검을 휘둘러도 끄떡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골방 노인네 같은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침대 위에서 한숨을 쉬며 한탄하는 모습은 옛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전형적인 아재의 모습이었다.
이쯤 되니 이 양반이 정말 기사가 맞는지 의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어디 그냥 평범하게 나이 많은 성기병 파일럿처럼 보였다.
현재 두 사람의 위치는 의무실이었다. 베를레앙이 대련 도중에 허리를 삐끗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버그들과의 전쟁 초기에 총탄에 맞아 허리를 다친 듯했다. 그래서 몸을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하던가.
사실 어떻게 보면 버그들에게 총을 맞고도 살아남은 게, 그나마 기사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 엄지손가락만 한 총탄을 맞고도 사람이 멀쩡할 수 있겠는가. 그런 걸 일반인이 맞았다가는 단어 그대로 몸이 찢겨진 채 그 자리에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마침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 총 맞고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자네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버그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경악의 연속이었네. 하늘에서는 갑자기 금속 덩어리가 떨어지더니 폭발하지 않나, 녀석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지니 그 자리에서 수십, 수백 명이 갈기갈기 찢겨죽지 않나···.”
먼 곳을 바라보듯 빈 허공을 바라보던 베를레앙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딘가 한이 어린, 그러면서도 씁쓸한 목소리였다.
“버그를 처음 봤을 때는 저게 역사 속에서나 나왔던 마왕의 군세인가 싶었네. 녀석들과 처음 교전했을 때는 그야말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핏물이 강처럼 흘렀지. 그런 끔찍한 전투는 처음이었어.”
기사는 초인의 영역을 꿈꾼다. 하지만 그래봤자 기사 역시 결국 똑같은 인간이었다. 초인의 영역에 도전하지만, 정작 초인은 아닌 것이다.
정말로 신화에서 나올법한 영령의 격에 이른 것이 아닌 이상, 총탄과 포탄 앞에서는 기사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음속으로 날아오는 금속 덩어리에 맞는 순간 고깃덩어리가 되는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버그들과의 전쟁 초기에는 처참하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미지의 적들이었고, 하나같이 전부 기존에 없던 강력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더욱이 그 당시에 성기병들이 착용하던 갑옷조차도 버그들의 화기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에서는 빠른 기동을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렇기에 그 당시의 갑옷은 성기병의 기동을 살리기 위해 점차 얇고 가볍게 변해가고 있었고,
그 결과 버그들과 처음 교전했을 당시에는 총탄에 맞는 그대로 갑옷에 구멍이 뚫리며, 콕피트 안에 있던 파일럿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나마 지금 같이 성기병들이 버그들의 총탄에 맞고도 계속 전투를 속행할 수 있게 된 건 최근 일이었다.
나름대로 녀석들의 화기에 저항할 수 있도록 성기병의 갑옷을 개량한 것이다.
물론 그만큼 무게가 증가하면서 성기병의 연비와 기동력이 나빠졌지만, 그래도 별 저항도 못 해본 채 종잇장처럼 찢겨져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약 그때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준비가 되어 있었으면 이렇게 허리 아프다고 끙끙거릴 일은 없었겠지. 베를레앙은 뼈가 삭은 것처럼 욱신거리는 허리를 느끼며 네토루를 쳐다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이야기나 좀 나눠보는 게 어떤가? 자네한테 묻고 싶은 게 좀 있거든.”
“저는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네토루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자 베를레앙은 미간을 좁혔다.
“어허. 지금 내가 자네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그렇게 뻔뻔하게 나올 건가? 으윽···. 이것 좀 보게나! 이래 가지고 이번 주 안까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나 모르겠군! 며칠 후면 엘프란디아로 넘어가게 될 텐데 말이야!”
“······.”
이걸 어쩔 건가. 자네가 책임지게. 그렇게 억지 부리는 베를레앙의 모습에 네토루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그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중년인은 일단 기사였다.
그래도 다행히 성격 자체는 좋아 보이는 양반이니, 일단 적당히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면 저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자니 베를레앙의 느슨했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었다.
“내 자네한테 직접 물어보지. 마지막 임무에서 제1독립기동부대는 정말 전멸한 게 맞는 건가?”
“······”
예상치 못한 질문에 네토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는 그것뿐.
네토루는 아무런 생각도 읽을 수 없는 고요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채 베를레앙을 응시했다.
이 질문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건 알 수 없지만 네토루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전멸한 게 맞습니다. 당시 전투의 흔적은 분명 사령부 쪽에서도 확인했을 텐데요.”
“그런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사령부 놈들의 조사는 별로 믿음직스럽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면 유일한 생존자인 제 말은 어떻습니까?”
“유일한 생존자라···?”
베를레앙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네토루의 앞에 있는 것은 방금까지 넉살 좋던 중년인이 아니었다.
꿰뚫어 보는 듯 서늘한 시선. 네토루는 그 시선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꼈다. 눈앞에 있는 중년인은 단순히 허투로 나이 먹은, 저물어가는 기사가 아니었다.
“제1독립기동부대는 혁명군 출신들이 대거 모여 있던 부대였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흔히 사형수들의 부대라고 불렀네.”
“······”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제1독립기동부대는 위험한 임무가 있으면 일단 밀어 넣고 보던 부대였다. 부대 구성원들의 특성 때문에 귀족들 입장에서는 전멸해도 그만, 살아남아도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형수들의 부대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제1독립기동부대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네. 단순히 그들이 혁명군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식으로 무의미하게 소모하기에는 아까운 인재들이었으니까.”
당연하지만 혁명기 때 귀족들이 괜히 밀린 게 아니었다. 단순히 시민들의 지지를 넘어 그만한 힘이 혁명군에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혁명군 내부에도 뛰어난 파일럿들이 다수 존재했으며, 그 안에는 혁명군에 뛰어든 귀족들이나 기사들도 여럿 있었다. 흔히 신귀족이라 불리는 이들.
그리고 그러한 파일럿들이 제1독립기동부대에 다수 배치되었다. 사령부에서 위험하다고 판단된 이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단순히 위험분자라고 경계할 게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대우해줘야 했다고 생각하네. 애초에 이런 판국에 인간끼리 서로 의심해서 뭘 하겠는가?”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뭡니까?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고 싶은 말? 자네도 알면서 왜 그러나. 지금 다시 한번 물어보지. 정말로 그들은 전멸한 게 맞나?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은 전부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네. 그중에는 혁명기 때 나하고 직접 칼을 맞댄 놈도 있었지. 그렇기에 나는 그들이 전부 죽었다고 생각 못 하겠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부 전멸했습니다. 실제로 그만큼 위험한 임무였고요. 그건 베를레앙,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래. 위험한 임무였던 건 부정하지 않겠네. 어디 버그들이 자리 잡은 점령 구역에 기어들어가서, 둥지 안에 있는 여왕의 목을 따오라는 게 어디 제대로 된 명령이었겠나? 확실히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임무였지. 그건 나도 이해하네.”
당시 그들에게 요구된 마지막 임무는 간단명료했다.
다른 부대들이 버그들의 시선을 끄는 사이, 제1독립기동부대가 후방으로 돌아가서 버그들의 둥지 안에 있는 여왕을 기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제 목숨을 제물로 바쳐서 여왕을 죽이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무리 다른 부대가 시선을 끈다고 해서 버그들이 여왕의 안전을 무방비하게 놔두지는 않으니까.
그렇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임무였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여전히 못 믿겠군. 차라리 자네라는 생존자가 없었다면 모를까.”
“······”
이건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굳어가는 네토루의 얼굴을 보며 베를레앙은 목소리를 높였다.
“한 가지 물어보지. 자네는 그날 어째서 ‘살아’ 돌아온 건가? 혹시 애국심인가?”
애국심?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네토루에게 프랑기아에 대한 애정이 있을 리가 없다. 막말로 이런 나라가 당장 사라져도 아무런 느낌도 없을 터.
다만, 그들 따라 도망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 순간, 그날 했던 약속은 물론이고, 그 이름 모를 소녀마저 버리게 되는 거니까.
우습게도 아직 살아 있는지, 아니면 오래전에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2.
네토루랑 이야기 중인 저 중년인은 누구인 걸까.
그게 궁금했던 카렌이지만,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덕분에 문 근처에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엿듣던 그녀는 두 사람의 진지한 분위기에 못 이겨 자리를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의무실 문이 열리더니 네토루가 안에서 나왔다.
“네토루. 저 아저씨, 누구야?”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일단 기사야.”
“저 사람이 기사라고?”
네토루의 대답에 카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저히 기사 같지가 않아서였다. 조금 체격이 대단한 것 빼고는 말하는 어투나 분위기가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그게 신기했던 카렌은 아직 닫히지 않은 문 틈새로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여전히 침대에 엎드려서 끙끙거리고 있는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
저 사람이 정말 기사라고?
······아무리 봐도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카렌은 아직까지 기사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게 있다. 게다가 당장 세레스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말이다.
빳빳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가.
나쁜 소문 중에는 기관 출신의 파일럿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나머지, 고기 방패마냥 작전 중에 미끼로 써먹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저곳에 있는 중년인은···.
“···그냥 동네 아저씨 같은데?”
카렌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빵집 아저씨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