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9 엘프란디아
제1독립기동부대.
네토루의 시작점이자 통칭 001부대라 불리는 곳.
각자 자기 구역을 지키는 다른 부대들과 다르게 국가 전역을 떠도는 기동부대였기에, 그래서 붙여진 부대 넘버링이 ‘0’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래전에 해체된 부대였다. 마지막 임무에서 부대가 전멸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에게 별로 그리운 곳은 아니었다. 말이 기동부대지 위험한 일이나 임무가 있으면 대신 투입되던 그런 부대였다.
네토루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부대 이름에 잠시 눈을 감고는 손에 있던 창을 강하게 쥐었다.
안 그래도 마침 방금까지 그가 떠올렸던 전장의 풍경은 운 나쁘게도 001부대의 마지막 임무였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버그들. 상황은 절망적.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
특히나 마지막 임무는 가히 지옥에 가까웠다. 사령관의 관측은 물론이고, 다른 부대들의 지원을 바라기 어렵다. 오로지 각자 자기 역량에 의지해야만 했던 임무였다.
그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던 네토루는 천천히 눈을 뜨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제1독립기동부대에 있던 걸 알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네토루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1독립기동부대 출신인 건 맞습니다만, 혹시 그와 관련된 일로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음? 볼 일? 아···. 오해는 하지 말게. 지금 여기서 자네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니까. 방금 이야기도 그냥 호기심에 물어봤을 뿐이네.”
그리 말한 베를레앙은 네토루를 따라 근처에 보관되어 있던 연습용 무기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가 쥔 것은 검이었다. 그것을 가볍게 휘둘러보던 그는 네토루가 쥐고 있던 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네 혹시 원래 창을 다루나?”
베를레앙은 네토루가 성병기 알슈트페론으로 데스 웜을 죽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가 기억하는 알슈트페론은 분명 창이 아닌 커다란 대검이었다.
“주무기는 아니지만, 창도 적당히 다룹니다.”
“흠. 적당히라···. 뭐, 여러 무기를 다룰 수 있으면 좋지.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적당히 치고는 창을 다루는 재주가 썩 나쁘지는 않았는데···. 네토루의 무덤덤한 대답에 베를레앙을 피식 웃었다. 딱히 비웃으려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냥 순수하게 신기해서였다. 기관 출신의 파일럿이 여러 무기를 다룰 줄 아는 건 드문 일이니까.
무기 하나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은 게 아니라면, 쓸데없이 여러 무기를 쓰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익히는 게 좋다.
이건 기관 출신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실제로 어쭙잖게 여러 무기를 익히게 하는 것보다는 한 우물만 파도록 조언하기도 한다.
베를레앙은 뻐근한 몸을 풀듯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는 네토루에게 다가섰다. 제 자리를 유지한 채 네토루는 다가오는 중년 남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들었네. 데스 웜이라는 놈을 자네가 죽였다고 하지?”
“운이 좋았습니다.”
“흐음. 운이 좋기는 무슨. 그게 전부 실력이지.”
베를레앙이 본 데스 웜은 결코 운으로 잡을만한 괴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성병기를 사용한다고 했지만, 문제는 그걸 혼자서 잡았다는 것이다.
혼자 성병기를 사용할만한 틈을 만들어 냈다는 것부터가 충분히 대단한 실력을 지녔다는 증거였다.
“보아하니 몸 좀 풀고 있던 것 같은데, 나랑 잠시 좀 놀아주겠나?”
“대련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뭐 그런 거지. 싫다면 거절해도 좋네.”
네토루는 미묘한 시선으로 베를레앙을 응시했다. 기사치고는 꽤나 터덜터덜한 성격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네토루는 하늘을 보았다. 어느새인가 점점 하늘이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물감이 번져가는 듯한 그 창연함을 구경하던 네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도 충분하고, 어차피 한 번 흘리기 시작한 땀이다.
게다가 기사와 대련을 하는 건 흔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해보는 게 좋다.
생각을 정한 네토루는 쥐고 있던 창을 원래 보관되어 있던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베를레앙이 쥐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형태의 검을 집어 들었다.
“호오? 창으로 안 싸우는 건가?”
네토루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기사를 상대하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네토루는 검의 무게를 느끼듯 가볍게 휘둘러보고는 그의 앞에 섰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대략 10m.
일반인에게는 멀게 느껴질지 몰라도 신체를 극한까지 수련하는 남성 파일럿에게는 한두 걸음 만에 서로의 거리가 좁혀질 위치였다.
더욱이 이제는 성기병이라는 생체 병기를 타고 싸운다고 하지만, 기사의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본래 기사라는 것은 용과 괴물을 잡았다고 불리는 시대의 주인들이었다. 인간의 육신을 극한까지 단련하여 초인의 영역에 도전하는 존재들.
이건 눈앞에 있는 중년인 역시 그러할 터.
네토루는 아래로 향해 있던 검 끝을 느릿하게 위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중단까지 당겨진 뭉툭한 검날이 베를레앙을 향하고, 그 순간 그의 삭막한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당장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전의였다.
그러한 네토루의 눈빛에 베를레앙은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어떤 청년인가 싶어 알아보려고 가볍게 제안한 대련에서, 그는 마치 사생결단이라도 내듯 매서운 기파를 뿜어내고 있었다.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압박감.
그것에 끌려가지 않도록 느슨하게 풀려있던 감각을 가다듬으면서도, 베를레앙은 서서히 주변으로 드리우고 있는 햇살 속에서 돌연 세상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색채를 잃은 듯 흑백으로 변해가고 있는 가운데,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베를레앙과 네토루 뿐이었다.
서로의 검날이 교차하고, 소리보다도 빠른 검격들이 끊임없이 맞부딪친다. 시간마저 잡아 늘어뜨린 듯한 감각 속에서 수십 번의 검격이 교환되었다.
검이 그리는 수많은 궤적들이 시야에 수를 놓으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끝내 그것들은 한곳에 모여들며 답을 찾듯 수렴하였고.
이윽고 그렇게 최적의 경로를 따라 상대의 목숨을 취하듯 검날이 번뜩이고 있을 때였다.
“······”
후읍- 베를레앙은 잠시 멈춰두고 있던 호흡을 풀었다. 등줄기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렀다. 그제야 그는 눈을 깜박깜박 움직이며 현실을 보았다.
서로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거리는 여전했고, 검을 쥐고 있는 자세와 대지 위를 짓밟고 있던 발의 보폭 역시 변함이 없었다.
결국, 방금 그 모든 것들은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그려낸 환상과 예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베를레앙은 방금 전력을 다해 청년의 목숨을 취했다.
···재미있군.
흥미로운 일이다. 아무리 상상이라고 하지만, 상상 속에서 그는 여유를 느낄 겨를도 없이 청년을 죽여야 할 정도로 싸워야 했다는 것이니까.
성기병을 타고 싸우는 것과 육신으로 직접 싸우는 건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게다가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대련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기관에서는 버그들과 싸우는 방법만을 가르치지, 인간을 죽이는 살인 기술 따위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기병을 타지 않고서 기관 출신이 기사에게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기사라는 것은 버그와 인간 가리지 않고 죽이기 위해 길러진 전쟁 병기와도 같았고, 기관 출신의 파일럿은 오로지 버그만을 상대하기 위해 육성된 존재였다.
그런데 이건 무엇일까.
왠지 모르지만 베를레앙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청년은 단순히 버그라는 괴물을 때려잡는 기술뿐만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버그들과 전쟁을 하는 시대에 인간을 죽이는 방법 따위가 필요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 답을 찾기 위해 베를레앙은 땅을 박찼다.
어차피 결국 베를레앙이 머릿속에 그리던 것은 막연한 상상에 불과했다. 일단 서로 검을 부딪쳐보지 않으면 답을 알 수가 없다.
터어엉─!
이윽고 머릿속에서 그렸던 것과 똑같은 풍경을 그리듯 서로의 검과 검이 교차하고, 베를레앙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청년을 무너뜨리기 위해 몸에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뜨드득─!
그의 몸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2.
7:00
역시 제39구역에서 고정된 생활 리듬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딱히 알람을 해놓은 것도 아닌데 눈이 알아서 저절로 뜨였다.
이불을 들추자 자연스레 밀려 들어오는 한기에 이대로 좀 더 잘까 싶었지만, 카렌은 애써 기지개를 피고는 침대를 정리하고서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아직 깨어난 부대원들은 아무도 없는 건지 부대 안은 조용했다.
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현재 393부대는 휴식을 위해 도시에 주둔 중이었고, 게다가 사령관인 리엔 역시 부대원들에게 지금은 푹 쉬어두라고 한 상황.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서 하나같이 모두 늦잠을 부리는 중이었다.
이런 기회는 드물다. 버그 걱정 없이 언제 이렇게 마음 편히 쉴 수 있을까. 뭔가 낯설지만 부대의 평온한 분위기를 즐기며 텅 빈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카렌의 걸음이 멈추었다.
복도를 걷고 있던 카렌에게 묘한 풍경이 시선을 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금발 사내였다.
“···네토루?”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좀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역시 부지런한 녀석이다. 남들 모두 자고 있을 때 이른 아침부터 훈련이라도 한 것인지 땀투성이의 네토루가 보였다.
그런데 그런 네토루보다도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네토루의 몸에 기대어 살얼음 걷듯이 조심스레 걷고 있는 한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당연하지만 카렌으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저건 도대체 뭔 상황인 걸까?
카렌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네토루한테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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