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08화 (108/148)

EP.108 엘프란디아

언제부터였을까.

이 세상에 떨어지고 며칠이 지났는지 더 이상 날짜를 세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본래 이름보다도 네토루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진 건.

이제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내 나이가 몇이었는지, 내 가족이 누구였는지, 내 친구들은···.

그럴 수밖에.

태평하게 현실을 그리워할 만한 세상이 아니었다.

당장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만 했고, 조금만 실수해도 누군가 죽거나, 내가 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현실을 잊어야만 했다.

애니메이션과 현실의 경계선을 허무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제일 첫 번째 과제였다.

하지만 그러자 반대로 문제점이 생겼다.

더 이상 현실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가짜인가? 정말 단순히 애니메이션 속 세상인가? 그러면 내가 보았던 무수한 죽음은?

눈물은? 분노는? 그것들 모두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설령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해도 좋다.

애초에 이제 와서 어느 것이 현실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거리를 두어도 이 세상에는 점점 나의 발자국들이 남고 있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추억이 쌓이고, 인연들이 가슴에 스며든다.

그것이 싫어 홀로 싸우고자 해도, 커플링 파트너라는 것이 있는 이상 나는 혼자가 될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오히려 이 세계에 녹아들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가끔 생각은 해보았다.

만약 내가 그리워하던 현실보다도,

이 세상에 더 소중한 게 많아지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도 나는 현실로 돌아가려고 할 것인가?

만약 현실에 있는 내 가족보다도 소중한 게, 이 세상에 생겨버린다면, 그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거지.

그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뒤로 미룰 수 없는 두 갈림길.

거기서 선택을 하는 순간 내 정체성이 정해지니까.

내가 네토루인지, 아니면 ■■■일지 말이다.

2.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캄캄한 방안의 풍경이었다. 창문을 보니 밖은 여전히 어둡다.

달이 막 자리를 떠나려는 어스름한 하늘이 세상을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한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순간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궁금해졌지만, 시계 하나 보자고 네토루는 섣불리 몸을 뒤척일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현재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좁은 침대지만, 살을 부대낀 채 옆에 누군가 있었다.

많이 피곤했던 걸까.

새근···. 새근···.

조용하면서도 귓가를 간질이는 귀여운 숨소리.

네토루는 그 소리에 이끌리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나신을 훤히 드러낸 채 잠들어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그에게는 여러 만남이 있었다. 그 중에는 좋았던 것도 있었지만, 나빴던 기억도 여럿 있었다.

슬픔과 기쁨. 애정과 원망.

인간 관계라는 건 정말로 어렵다.

특히 커플링 파트너랍시고 자연스레 생겨날 수밖에 없는 남녀 관계에서는 말이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떠할까.

이 여자는 나에게 슬픔인가 기쁨인가.

네토루는 그 답을 찾아보듯 자고 있는 세레스의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

허리까지 닿는 아름다운 자색 머리카락, 온화한 인상을 더불어 숨길 수 없는 우아한 자태. 네토루가 객관적으로 보아도 세레스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레스에게 했던 속삭임들 중에서는 어느 하나 거짓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아름답거나, 예쁘다고 하는 게 뭐가 이상할까.

정작 세레스는 그러한 칭찬에 약한 듯 했지만···. 오히려 그게 귀여운 점이기도 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나이에 맞지 않게 사람이 어수룩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여자가 부대원들에게 나름 연장자랍시고 노력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왠지 웃음만 나온다.

만약 이 여자는 내가 없었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세레스는 네토루의 팔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는데, 제법 베개 대용으로 쓸만한 듯했다.

“···생각보다 잘 자는데.”

사람 팔을 베고 자는 게 편할 수 있는 건가?

순간 호기심이 돋았다. 네토루는 조용히 손을 뻗어 세레스의 볼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아무래도 깊게 잠든 듯했다. 이러면 적어도 자는데 불편하지는 않다는 거겠지.

팔을 짓누르는 세레스의 머리를 느끼며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단련된 몸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의 머리를 팔 위에 계속 올려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세레스가 자기 베개마냥 팔 위에서 너무 잘 자고 있던 탓에 뭔가 섣불리 빼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정작 이쪽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지만, 아이처럼 순하게 자고 있는 세레스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 싶어졌다.

오랜만이었다. 진심으로 지칠 때까지 밤새 여자를 품에 안았던 것은. 내심 용케 세레스가 마지막까지 받아주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새벽 내내 그녀의 몸 안에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공기 중에는 진한 정액 냄새가 흘러 다니고 있었고. 여전히 그녀의 몸 안에는 네토루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만약 세레스가 성기병 파일럿이 아니었다면 정말 오늘 일로 임신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이렇게 여자 몸 안에 무책임하게 사정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이제는 이러한 변화 역시 오래전의 기억이다.

한동안 세레스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던 네토루는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만져주고는, 자기고 쓰고 있던 베개를 그녀의 목 밑에 밀어 넣어주며 조심스레 침대에서 나왔다.

아침과 새벽의 경계가 희미한 시간이다.

딱 보아하니 세레스는 이대로 한두 시간은 더 자고 있을 듯했다. 그때까지 옆에서 세레스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겠지만,

네토루는 침대 근처에 돌아다니는 자신의 속옷을 입고서, 세레스의 속옷과 옷까지 마저 정리한 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방에서 나왔다.

2.

5:39

잠에서 깨어나기에는 애매한 시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도 않아 모든 것이 그저 푸르스름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네토루는 부대를 돌아다녔다. 당연하지만 이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침묵에 잠겨있다.

원래는 이러한 시간을 틈타 밤 동안 있었던 정사의 흔적을 씻어내듯 샤워라도 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생각이 바뀌었다. 씻기 전에 좀 더 몸을 움직이고 싶어졌다고 해야 할까.

밤에 그렇게 힘을 써넣고서 뭘 이렇게 아침부터 요란을 떨까 싶은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가슴 한편에서 솟아오르는 초조함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또각또각. 방안에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토루는 자신에게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생각하고는 했다.

미래를 알지만, 그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어 생겨나는 두려움과 답답함. 그것은 지난 수년간 변함없이 네토루의 가슴 안쪽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들을 지울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형을 앞둔 사형수마냥 괴로워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여기서 네토루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였다.

자기 자신을 매일 혹사시키며 어제의 자신보다도 성장하는 것. 지금껏 지겹도록 경험했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버그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좀 더 강해지고, 강해져서···. 중요한 선택지가 눈앞에 주어졌을 때 무언가 바꿀 수 있어야 했다.

이윽고 네토루가 도착한 곳은 부대 내부의 훈련장이었다. 나름 도시 안에 갖춰진 부대라 그런 걸까. 제39구역과 다르게 이곳에는 훈련시설이 제법 그럴듯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구석 벽면을 보면 날 끝이 뭉툭한 냉병기들이 보관된 간의 무기고가 보인다. 그 안에는 검, 창, 대검, 둔기, 온갖 종류의 연습 무기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버그들이 총과 포를 쏘아대는 이 세상에서, 어딘가 시대착오적인 무기들이 아닐까 싶을 수 있겠지만,

전장에서 성기병들이 어떤 무기로 싸우는지 생각하면 그다지 이상할 게 없는 풍경이었다.

네토루는 적당히 창을 집어 들었다. 주로 다루는 무기는 검이지만, 사실 아무 무기나 상관없다.

네토루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쓸 수 있는 건 전부 쓸 수 있도록 훈련하였다. 그것은 오만한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그의 몸뚱이에는 그만한 재능이 존재했다.

성병기 「알슈트페론」

실제로 며칠 전에 대검 형태의 무기를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던 건 이러한 노력과 재능 덕분이었다.

훈련장의 중심에서 창을 쥔 네토루는 적당히 발의 간격을 넓혔다.

그리고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버그들. 상황은 절망적.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

그러한 전장 속에서, 네토루는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채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창날이 날카롭게 베었고, 네토루의 발끝이 어지럽게 훈련장 안을 돌아다녔다.

굳이 성기병을 타고 있지 않아도 좋다.

지금껏 쌓인 무수한 전투 경험이 현실과 망상을 완전히 허물어뜨렸다. 상상 속의 적을 상대로 격렬한 움직임을 반복하자, 호흡은 점점 가파르게 변하며, 등줄기에 뜨거운 땀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만족할 때까지 움직인다.

이윽고 그렇게 팔다리가 무거워질 때쯤이었다.

“부지런한 친구군. 기사단 안에서도 이런 아침부터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적은 데 말이야.”

돌연 남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하지만 기척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놀랄 것 없이 네토루는 이마에 흐르던 땀을 훔친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가 근처에 큼지막한 자상 자국이 있는 회색빛 머리칼 사내가 보였다.

신장은 대략 190센티 전후일까.

나름 키가 크다고 할 수 있는 네토루 조차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중년 남자였다.

게다가 두꺼운 흉판과 넓은 어깨 폭. 비록 폭이 넓은 낡은 옷을 입고 있지만, 그러한 옷 너머로도 알 수 있는, 뚜렷하게 융기한 근육들이 얼핏 보였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육체적인 특징이 아니었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자를 중심으로 일대의 공기가 싸악 바뀌고 있는 듯한 위압감.

딱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저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기사가 분명했다. 그것도 기사 중에서도 특출난 누군가.

그런 존재가 왜 이런 시간에 이곳에 왔을까.

그러한 의문 속에서 네토루가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베를레앙일세.”

당연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네토루의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자네는 제1독립기동부대의 생존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

제1독립기동부대.

그것은 네토루의 시작점과도 같은 곳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으음... 일단 h씬 챕터라 어쩌다보니 삽화에 엄청 힘을 줬네요.

1132 삽화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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