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0 엘프란디아
“처, 천박···?”
케레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이런 모욕을 들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겨우 기관 출신의 보잘것없는 파일럿에게 말이다. 여기사인 그녀에게 엄청난 치욕이었다.
네토루라는 사내에게 안겨있던 세레스도 방금 그가 꺼낸 말에 놀란 건지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네토루와 세레스.
두 커플을 눈에 담던 케레네는 아랫입술을 바득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저 남자에게 손바닥이라도 휘둘러주고 싶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가시처럼 돋아나는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른다.
“···천박. 그래, 천박해 보였나 보군요.”
케레네는 입가를 씰룩이며 애써 억지웃음을 만들어내고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넘겼다. 여유를 보여주기 위한 몸짓이었다. 여기사로서 기관 출신의 파일럿에게 여유를 잃을 수는 없었다.
“뭐, 좋아요. 저도 알기 싫다는 사람을 상대로 굳이 알려줄 생각은 없어요.
케레네는 살짝 턱을 당긴 채, 눈을 가늘게 뜨고는 네토루를 쏘아보았다.
“그렇지만 당신···. 후회할지도 몰라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살벌하게 빛나는 붉은 눈을 응시하던 네토루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후회해도 그건 내 책임이지, 네가 걱정할 건 아닌 거 같은데.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으득···.”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투다. 마치 누가 누구를 걱정하냔 듯이 조소 어린 눈빛이 무척이나 거만하다.
이쯤 되니 도저히 기관 출신의 파일럿 같지가 않다. 지금 이 사내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알기는 하는 것인가.
여기사는 특별했다. 그 커플링 파트너들이 전부 귀족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한낮 평민인 기관 출신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가 있었다.
막말로 베개송사로 파트너에게 부탁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여기사들이 커플링 파트너들에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만큼이나, 커플링 파트너들도 여기사들을 아껴주길 마련이니까 말이다.
“이제 그만 해요···. 저는 괜찮으니까···.”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걸 느낀 걸까. 세레스가 뒤늦게 네토루의 옷자락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말렸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레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하지 말라는 몸짓까지 보이면서.
케레네는 그런 세레스가 더욱 가증스러웠다.
“그 잘난 파트너 폐인으로 만들고, 누굴 받들어 사는가 했는데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남자를 만나고 살고 있었네.”
혹시 저 금발 사내는 저런 세레스의 모습에 완전히 넘어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보통 상식으로 이렇게 여기사에게 덤벼들리가 없다. 자고로 사내라는 것은 이성 앞에서 온갖 허세를 떨기 마련이니까.
“그나마 여기서라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세레스. 내가 오해했어. 그동안 애들에게 몸을 팔고 있지는 않았나 보네. 그렇게 남자 한 명을 제대로 붙잡고 있는 걸 보니까.”
네토루를 말리던 세레스가 흠칫 몸을 떨고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케레네를 노려봤다.
“···이제 언니도 그만 해요. 앞으로 며칠 후면 같이 임무도 수행하게 될 텐데, 저희랑 이렇게 계속 싸울 건가요?”
“싸워? 세레스, 착각하지 마. 싸우기는 무슨···. 이건 그냥 우리끼리 가볍게 인사나 나눈 거지 뭐.”
우스웠던 걸까. 케레네는 세레스를 흘겨보며 코웃음 치고는 등을 돌렸다. 마치 이제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또각. 또각.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그 모습을 보고도 세레스는 굳이 잡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케레네와 싸워봤자 좋을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건 자신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굳이 네토루가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더욱 험악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토루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가 어째서 이랬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세레스의 가슴 안쪽에는 네토루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물씬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 남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가면 어쩌지. 케레네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순간 그런 걱정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윽고 케레네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세레스는 그제야 묵혀두고 있던 숨을 몰아쉬듯 길게 한숨을 쉬고는 네토루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약간 꾸짖는 듯하면서도 울 것 같은 눈초리였다.
“···조금만 참지 그랬어요. 당신도 알 거 아니에요. 기사단이랑 척지면 어떻게 되는지.”
귀족들이랑 좋지 않은 일로 엮이면 뭘 어떻게 해결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특히 자신의 파트너인 여기사가 모욕받으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걸 네토루가 모를 리가 없다. 어수룩함하고는 거리가 먼 파일럿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네토루는 케레네가 사라지기 무섭게 싸늘한 표정에서,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아니···. 그때 가서 생각하다니···.”
“세레스. 내가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썼다면 제39구역에 왔을 것 같아?”
“···그건.”
네토루의 말에 세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보니 그렇다. 네토루가 실력 없는 파일럿도 아닌데 왜 이런 곳에 왔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다.
“아무튼, 나는 이만 씻으러 가야 하니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 소집 전에 좀 빨리 씻고 싶거든.”
그런데 정작 네토루 본인은 정말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분위기로 복도 저편으로 터벅터벅 사라져버렸다.
세레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남아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부디 아무런 일도 없어야 할 텐데.
2.
“이게 그 녀석인가?”
“예. 맞습니다. 저번에 제47구역에서 팔레인 경을 잡아먹은 것과 같은 종으로······.”
베를레앙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현재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며칠 전에 죽은 버그의 시체였다.
제47구역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마을 하나를 집어삼켰던 존재. 수백 명의 시민이 그 자리에서 별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하지만 정작 멍청한 사령관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당하기만 했다고 하던가.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지,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압도적인 크기였다. 비록 이제 남은 것은 두 동강 난 몸뚱아리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괴물이 지니고 있던 위압감과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치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동산을 보는 것만 같다. 살덩어리 안에는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이 기괴한 형태로 융합되어 있었다.
지하에서 단단한 암반도 단번에 깨부수며 돌아다니는 녀석이다. 그 어마무시한 힘과 질량으로 덤벼들면 어지간한 성기병은 별 저항도 못 하고 압사당할 터.
제47구역에서 있었던 일을 옹호할 생각은 아니지만, 데스 웜을 실제로 보게되니 그래도 아예 이해를 못 할 건 아니었다.
이런 괴물이 나타나면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려웠겠지. 기사가 보더라도 숨이 막혀올 정도인데 평범한 기관 출신들은 어떠할까.
몇 분 동안이나 괴물을 살펴보던 베를레앙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점점 암울해지는 현실 때문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까.”
지난 수년간 버그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프랑기아 전 국토에서 죽은 버그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아무리 못해도 수만 마리를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숫자를 죽였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모른다. 버그들이 정확히 어떤 생태를 꾸리고 있으며, 무슨 목적을 지녔고, 어디서 왔는지 말이다.
녀석들은 그야말로 미지의 적이었다.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이계의 존재들.
차라리 우스갯소리로 오래전에 대륙에 강림했다고 하는 마왕이나 악신들이 더 익숙한 존재들이었다. 적어도 그 존재들은 ‘이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버그들은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없던 형태의 무기들로 무장한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개념의 적들.
마법과 전혀 관련 없는 물건으로 무장하여 수KM 밖에서 엄청난 화력 투사가 가능한 것도 그렇고,
당장 눈앞에 있는 괴물 역시 이해 불가의 존재다.
······데스 웜. 지금껏 없던 새로운 개체.
“···이제 버그들에게서 새로운 종이 태어나고 있는 건가. 정말 최악이군.”
지난 수년간 성기병 파일럿들이 상대했던 버그들의 종류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이제 알았으니까. 적어도 이젠 수KM 밖에서 포탄이 떨어졌다고 덜덜 떨어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데스 웜 같은 터무니 없는 녀석이 새로 나타나게 되면, 간신히 평행선을 이루기 시작한 싸움에 어떤 지장을 줄지 뻔했다.
이러면 지금껏 버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쌓아온 모든 전략 전술을 바꿔야 했다. 설령 그렇게 적응한다고 해도,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데스 웜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개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금껏 정체되어 있던 버그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마치 발버둥 치는 인간들을 비웃듯이 말이다.
그 사실은 가히 충격이었고, 간신히 숨통을 트고 있던 프랑기아 왕국에게 어떤 결과를 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베를레앙은 궁금해졌다. 과연 이걸 누가 잡은 것일까. 비록 성병기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걸 혼자서 잡았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그래, 이걸 죽인 파일럿의 이름이 뭐라고?”
“네토루라고 하더군요.”
“네토루?”
이름을 중얼거려보니 입안에서 묘한 울림이 있었다. 베를레앙은 잠시 미간을 좁히고는 기억을 되새겼다. 어째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면서.
이윽고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토루···. 아···. 들어본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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