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98화 (98/148)

EP.98 엘프란디아

햇살이 안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끼면서 네토루는 아침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어제 무리한 탓일까. 몸이 무겁다. 그래서 곧바로 일어나기보다는 한동안 몸을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네토루는 이상함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까부터 누군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니다. 피로감 때문에 눈치채는 게 늦었다. 감각이 둔해진 것이다.

뒤늦게 시선을 깨달은 네토루는 뒤척이던 몸을 뒤집으며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언제 병실 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근처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세레스가 보였다.

밝은 아침 햇살이 병실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가운데, 그 손길은 세레스에게도 닿고 있는지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왜 여기 있을까.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쳐다보았고, 세레스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

기묘한 정적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자색 눈동자로 네토루를 응시하던 세레스가 이윽고 한숨을 쉬며 말을 꺼냈다.

“당신···.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예요. 지금 몇 시인지 알아요?”

“···지금 몇 시인데.”

“벌써 9시가 넘었어요.”

“······”

이건 조금 놀랍군. 세레스의 대답에 네토루는 잠기운을 몰아내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정말 몸이 피곤하기는 했나 보다. 그렇게 오래 잔 것인가.

이러니 세레스가 직접 병실에 온 거겠지. 얼굴을 안 보이니 직접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당연하지만 보통이라면 이렇게 늦게까지 잘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네토루가 마음 편히 늘어지게 늦잠 잘 수 있는 건 지금 부대가 도시 안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네토루는 현재 입원 중이었다.

어떻게 보면 회복이라는 핑계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점에서 피곤한 건 둘째치고 네토루 나름대로 긴장이 풀린 걸지도 모른다.

만약 제39구역에 있었다면 결코 이렇게 흐트러지지는 않았겠지. 그곳이었다면 날이 선 검처럼 항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아침 먹으러 식당에도 안 오고. 환자가 밥을 걸러서 좋을 거 없다는 거 몰라요?”

잠에서 깨어도 네토루가 여전히 느릿하게 움직이자, 세레스는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찾아와서 잔소리라···.

네토루는 피식 웃었다.

미인이 하는 잔소리인지라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 덕분에 잠에서 깨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세레스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개의치 않고 네토루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식당에 가는 건 늦었겠지?”

“당연하죠.”

“그런가.”

네토루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배를 매만졌다.

안 그래도 성기병 파일럿들은 일반인들보다 열량 소모가 컸다. 몸 안에 있는 마력 신경계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침이 되면 배가 고픈 건 당연했다.

“···많이 배고파요?”

“아니, 괜찮아. 뭐, 점심까지 기다리면 되지.”

어차피 갑자기 전투를 나갈 일도 없다. 그러니 배고픔을 참는 게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부스럭

그런데 그때 무언가 소리가 났다. 그게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자 세레스가 오른손으로 슬쩍 종이봉투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식당에서 부탁 해서 얻어온 거예요.”

“나 때문에?”

“···그러면 누구 때문에 가져왔다고 생각해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투덜거린 세레스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가볍게 흔들기 시작했다. 빨리 받으라는 손짓이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네토루는 일단 종이봉투를 받고 보았다.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봉투 안에는 딱 봐도 딱딱해 보이는 큼지막한 빵이 들어 있었다. 이게 아침으로 나온 건가. 하기야 도시 사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빈약한 식량 사정은 어차피 익숙하다. 예전에는 성기병 파일럿용 에너지바만 입에 문 채 몇 날 며칠을 싸운 적도 있었다.

네토루는 질기면서도, 잘 씹히지 않는 빵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르게 아침을 해결하고 있는데 여전히 옆에 있던 세레스가 넌지시 말했다.

“그거 다 먹으면 빨리 씻어요. 이제 곧 사령관님이 부대원들을 소집하고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하니까요.”

소집이라.

어제 들었던 엘프란디아 관련해서인가. 이미 리엔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혼자 빠질 수는 없는 일. 네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2.

그날 밤. 나츠오는 끝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갑자기 찾아왔던 금발 사내의 정체 모를 행동도 그렇고, 그 남자의 방에서 한참 동안 있다가 나온 카렌이 너무 신경 쓰여서였다.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다. 창문을 통해 건너오는 햇살이 반갑기는커녕 눈만 아프게 하고 있었다.

···카렌은 왜 그 시간에 금발 사내를 만나러 온 걸까.

그 답을 알려주듯 놈이 안쪽에서 속삭였다.

─내가 보기에는 둘이 은밀한 관계를 즐긴 것 같은데.

“···시끄러워.”

─잘 생각해보게. 그렇지 않으면 그 시간에 남녀가 왜 만나겠는가?

“···닥쳐.”

─자네는 이미 소녀를 빼앗긴 걸세. 이미 몸도 마음도 그에게 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제발 닥치라고.”

나츠오는 귀를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다행히 이번에는 효과가 있던 걸까. 놈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츠오의 머릿속은 여전히 카렌과 금발 사내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침대 위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이 계속해서 상상되었다.

···차라리 그때 일어나지 말고 그냥 잤어야 했는데.

그 남자가 자신한테 무엇을 했는지 신경 쓰인 탓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츠오는 일어났다. 그 남자를 붙잡아 방금 뭘 한 건지 물어보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뒤늦게 병실에서 나왔을 때 나츠오가 본 것은 남자의 품에 안겨서 사이좋게 병실로 들어가는 카렌의 뒷모습뿐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봤나 싶었다. 이 늦은 시간에 카렌이 갑자기 왜 금발 사내를 찾아온 건가.

하지만 카렌의 뒷모습을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역시 카렌은 또 그 남자와 몸을 섞은 걸까.

나츠오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아무리 상상해도 거기만큼은 알 수가 없었다. 그 당돌한 아이가 남자의 밑에 깔려 있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안 되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다른 남자의 밑에서 교성을 지르는 카렌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자신이 좋아하던 아이가 다른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은···.

그때 또다시 놈이 속삭였다. 이번에는 드물게도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자네. 그것보다 몸 상태는 어떤가? 내가 보기에도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최악이야···.”

나츠오는 현기증마저 느끼며 우울한 눈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이겠지. 그런데 놈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역시 그런가. 안 그래도 자네의 마력 신경계에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문제가 생겼다고?”

─그렇네. 어제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졌어. 지금 내가 노력해보고 있지만,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군. 아무래도 어제 그 남자 때문인 것 같네.

“······”

그 남자 때문이라니. 지금 이 녀석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설마 어제 그 금발 사내가 내 몸에 나쁜 짓이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나츠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너 지금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음? 정말 모르겠는가? 밤에 그 남자가 자네의 마력 신경계를 망가뜨리려고 한걸?

“···망가뜨려?”

그런 게 가능하다고? 확실히 그 남자가 어제 뭔 짓을 한 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쁜 짓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 정도 눈치는 존재했다.

애초에 이 녀석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걱정 말게. 내가 자네의 몸을 어떻게든 회복시켜줄 테니까.

“···어제 네 말을 믿었다가 그 꼴을 당했는데, 지금 그걸 믿으라고? 정말 도움이 되긴 하는 거야?”

─그렇지만 상태가 호전된 건 분명하지 않은가? 설마 어제 일을 내 탓으로 돌리고 싶은 건가?

“···그건.”

“나츠오. 안에 있어?”

“······!”

그때 갑자기 들려온 카렌의 목소리에 나츠오는 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인가 열린 문 틈새로 카렌이 얼굴을 빼꼼 내민 게 보였다.

나츠오는 그런 카렌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하던 혼잣말을 혹시 들었을까? 순간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계속 얼굴을 보고만 있자 카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그렇게 놀래?”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남자의 품에 안겨서 같이 병실에 들어가던 그 모습이 말이다.

어제 카렌은 뭘 했을까. 정말 그에게 안겼을까. 그의 밑에서 사랑스러운 여인을 연기하듯 교태라도 부렸을까.

망상이 미쳐 날뛰는 가운데, 나츠오는 달싹이던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카렌···. 어제···.”

“어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나츠오는 차마 그녀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제 네토루, 그 사내랑 뭘 했냐고 말이다.

“뭐야···. 괜히 찝찝하게. 아무튼, 소집 전에 리엔 사령관님이 우리 둘한테 먼저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하는데, 빨리 준비해.”

“···우리 둘한테?”

“응. 우리 둘이랑 면담 좀 하고 싶데. 이번에 새로 내려오는 임무랑 관련된 거라면서.”

사령관이 갑자기 면담이라면···.

나츠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3.

어젯밤 리엔에게 듣기를.

엘프란디아 탐색을 위해 데스 웜 때문에 제47구역에서 철수했던 부대가 제39구역에 오는 듯했다. 그 숫자가 제법 많다고 하던가.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일부 기사단 병력이 제39구역에 온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정도로 엘프란디아가 신경 쓰이는 거겠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탓에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지만, 전 인류가 버그들과 전쟁하고 있는 현시점에서는 과거의 악연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니 혹시라도 옆 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쪽에 있던 버그들이 이쪽으로 흘러들어오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사령부의 진실된 걱정일 것이다.

···뭐, 아무튼.

세레스 덕분에 적당히 아침을 해결한 네토루가 세면을 하기 위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돌연 네토루의 걸음이 멈추었다. 복도 근처에서 들려오는 일련의 목소리들 때문이었다.

“···지원 온다는 기사들 중에서 설마 케레네 언니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나도 놀랐어. 설마 너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거든. 기사단에서 퇴출된 뒤로 어디 창관에 버려질 줄 알았는데 설마 제39구역 같은 곳에 와 있었다니. 이거, 다른 애들이 알면 꽤나 놀라겠어?”

“···언니들은 아직도 저를 미워하시는 건가요?”

“어머. 그러면 좋아하고 있을 줄 알았니? 기사단에서 그 난리를 쳐놓고 말이야. 그냥 한 번 대주면 될 걸, 제 몸이 얼마나 비싸다고 파트너를 폐인으로 만든 폐급년이.”

“언니···! 그때 저는 어쩔 수가······!”

“변명하지 말고 닥쳐 이년아.”

“···윽.”

욕설이 섞인 고성에 세레스가 두려운듯 눈을 내리깔았다. 저항할 의지는 느낄 수가 없다. 그저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건 마치 육식 동물 앞에 놓여진 초식 동물을 보는 듯했다.

“아, 맞다. 그리고 방금 재미있는 걸 봤어.”

그런 세레스를 내려다보며 붉은 머리카락 여인이 입가를 더욱 비틀었다. 조소 어린 미소였다.

“남자 무서워하던 반푼이가 그래도 꼬맹이들 사이에서는 제법 든든한 언니 노릇 좀 하고 있던데···. 그나마 어린애들 좆맛은 좀 나은가 봐?”

“아, 아니요···. 저랑 애들은 그런 관계가···.”

모욕적인 언행에도 세레스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대꾸라도 하면 좋겠는데, 참다못한 네토루는 한숨을 쉬며 나섰다.

내 커플링 파트너다. 그러니 내가 챙겨야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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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0 나츠오 대사 일부 수정

언제 완성될지 모를 일러 러프 한 장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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