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NTO
“늦은 시간에 불러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벌써 자정을 앞둔 시간이었다. 사령관도 이제는 잠자리에 들 시간.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보통 내일 낮에 부르는 게 나을 터.
집무실 책상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던 리엔은 오랫동안 네토루를 응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네토루.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마 1주일 정도 쉬어주면 다시 출격할 수 있을 겁니다.”
“···1주일.”
리엔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런 상태로 뭔가 생각에 잠기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걸로 괜찮은 겁니까? 혹시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1주일은···.”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가요.”
리엔의 입가에 안도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튼, 괜찮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군요.”
“그래서 저를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건···. 나츠오와 카렌의 커플링에 관해서 이야기할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낮에 당신도 현장에 있었다고 하니, 대충 상황은 파악하고 있겠지만.”
말을 하던 리엔이 집무실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종이 한 장을 쓰윽 내밀었다.
“오늘 아스나가 보고한 카렌과 나츠오의 커플링 일치율입니다. 먼저 한 번 살펴보시겠습니까?”
네토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엔이 내민 종이를 손에 쥐었다. 안에는 카렌과 나츠오의 커플링 파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서로 파장은 꽤나 틀어진 상태였다.
─70.3434%
···이건 내가 만든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별로 놀랄 것도 없이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였다. 그는 그렇게 내용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다시 리엔을 바라보았다.
리엔을 바라보는 네토루의 눈빛에는 이걸 갑자기 왜 자신한테 보여주냐는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도 그런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네토루. 당신도 알겠지만 원래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는 나츠오입니다. 나츠오가 복귀하면 다시 스와핑하는게 본래 예정된 일이죠.”
“예. 알고 있습니다.”
리엔의 말대로다.
처음부터 네토루가 카렌과 커플링했던 것은 임시적인 일이었다. 네토루는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였던 나츠오가 복귀하기 전까지 잠시 그 위치를 대체했을 뿐.
그렇지만 네토루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츠오가 복귀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카렌의 커플핑 파장을 자신에게 맞추게 하는 건 물론이고,
카렌이 정식으로 성인이 되면, 네토루는 본격적으로 그녀를 자신의 역량을 감당할 수 있도록 조교 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연구했던 다른 여성 파일럿들의 마력 신경계와 세레스의 마력 신경계를 참고해서 말이다.
카렌이 기관 출신의 파일럿으로서 지닌 마력 신경계의 한계를, 그 근본부터 뜯어고쳐서 기사의 것에 가깝게 만드는 게 본래 네토루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결국 결론만 말하자면 그러한 계획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대로 나츠오가 근처에 있게 되면 네토루의 위치가 애매해진다.
비틀어진 커플링 파장은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커플링 파트너끼리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했고,
게다가 현재 네토루에게는 이미 커플링 파트너로서 세레스가 존재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사령관이 볼때 굳이 네토루를 계속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로 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혹시 네토루, 당신은 카렌을 계속 세컨드로 유지할 생각이 있습니까?”
“카렌을 세컨드로 말입니까?”
“예. 원래라면 나츠오의 커플링 파트너로 돌아가야겠지만, 현재 그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리엔의 제안에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피로가 짙게 깔린 푸른 눈과 금발.
매번 느끼는 건데 잠을 제대로 자기는 하는 건지 창백한 피부도 그렇고,
눈 밑에 처연하게 깔린 그늘도 참 안타깝다.
사령관으로서 많은 짐을 껴안고 있는 탓에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도 아니겠지. 적어도 20대 초반의 여인이 쉽사리 감당할 업이 아니었다.
“···역시 힘들까요?”
대답이 없자 네토루를 올려다보며 넌지시 물어보는 리엔의 태도는 사뭇 조심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세레스가 있는데도 카렌을 계속 세컨드를 두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남들보다 더 많은 전투를 하라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요구였다.
몸을 혹사시켜야 하고, 목숨의 위험도 배가 된다.
비록 저번에는 데스 웜을 죽이기 위해 네토루가 카렌을 세컨드로 달라고 요구했었지만, 본래라면 아무리 사령관이라도 쉽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네토루로서는 정말 반가운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나츠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으니까. 이렇게 되면 ‘정당한 방법’으로 카렌을 계속 커플링 파트너로 데리고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그전에 궁금한 게 생겼다. 네토루는 손에 들고 있던 카렌과 나츠오의 커플링 파장 기록지를 책상 위에 돌려놓고는 리엔에게 물었다.
“사령관님.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만.”
네토루의 차분한 질문에 리엔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거든요.”
“시간이 없다는 건···?”
“앞으로 대략 1주일 후면 저희 부대에 엘프란디아를 탐색하는 임무가 내려올 겁니다.”
“······”
엘프란디아 탐색 임무인가. 하기야 언제까지고 그쪽 사정을 무시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어떻게든 빨리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냥 시간을 질질 끄는 건 좋지 않은 판단이다.
게다가 성기병 부대가 지금처럼 계속 도시 안에 주둔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부대 하나가 뒤로 빠져 있으면 다른 이들이 그걸 메꿔야 하니까.
어쩄든 대충 리엔의 생각은 알았다.
아마 그녀는 오늘 일로 판단한 거겠지. 현재로서는 나츠오의 회복을 기다릴 수가 없다고 말이다. 게다가 카렌과의 커플링에도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사실상 나츠오의 복귀가 불확실해진 상태.
그런 점에서 지금 제일 중요한 건 1주일 뒤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부대 전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1주일은 너무 빠르다.
“···겨우 1주일 가지고는 부대 전력이 온전하게 회복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거 괜찮은 겁니까? 다른 부대원들은 그렇다 쳐도, 당장 세레스만 해도 그때까지 기동 가능할 정도로 몸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확실히 그건 그렇죠···.”
골치 아픈 일을 맞이한 것처럼 리엔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맛살을 찌푸리는 게 고민이 많아 보인다. 사령관인 그녀가 현재 부대 사정을 모를 리가 없다.
특히 핵심 전력인 세레스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한 달간은 푹 쉬어주는 게 좋았다.
“저는 카렌을 세컨드로 둬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세레스가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태라면···. 세컨드의 의미가 퇴색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만약 그때까지도 세레스의 몸이 불안정한 상태라고 생각되면, 이번 임무에서 제외시키는 것도 고려할 예정입니다.”
“···세레스를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레스뿐만이 아닙니다. 전투가 힘들거라고 생각되는 부대원들 모두입니다.”
“······”
리엔의 말에 네토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건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물론 위에서 하라고 하면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만···.
네토루의 표정을 읽은 리엔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이번 임무의 주축은 저희 393부대가 아닙니다. 저희의 역할은 순수하게 엘프란디아를 탐색하는 일입니다. 주된 전투는 아마 지원 오는 기사단과 그 외의 다른 부대가 하게 되겠죠.”
“···그러면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전투를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엘프란디아 내부에 얼마나 많은 버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불완전한 전력으로 몇 차례 버그들과 교전은 일어날 터.
“일단···. 저도 웬만해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사령관의 숫자가 많지 않으니 이번 임무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탐색 임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지형을 탐색할 때 사령관의 관측 능력은 중요하다.
다만 담당하던 구역을 벗어나, 관측을 보조하는 관측탑들의 영역 밖에서 활동하게 되면,
평소에 보여주던 대규모 관측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임무에서 제일 고생하는 건 마법사인 사령관이었다.
2.
네토루는 그 후로도 리엔과 몇 가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아볼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리엔은 묻는 질문마다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임무에서 제외되는 부대원들은 도시에 남게 되는 듯했다. 그나마 가벼운 기동이 가능한 이들은 남아서 시민들의 피난을 도울 거라고 하던가.
······프라시온의 생명은 끝났다.
현재 상급 사령부의 판단은 그러했다. 그렇기에 현재 대규모 피난 계획이 세워진 상태였다.
앞으로 빠른 시일 안에, 프라시온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다른 마을 사람들도 전부 다른 도시로 이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제39구역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문제였지만.
그건 엘프란디아의 상황을 조사하고서 판단할 모양인 듯했다. 만약 저쪽이 상황이 좋지 않다면 높은 확률로 제39구역은 버려질 것이다.
쓸데없이 전선을 늘려놓을 수는 없으니까. 네토루가 봐도 그것은 옳은 판단이다. 다만 그렇게 하나둘씩 포기하다 보면 머지않은 미래에 도달할 결말은 뻔했다.
“···슬슬 때가 오는 건가.”
네토루는 복도를 걸으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미래를 혼자 삭혀두고 있으니 그도 답답할 수밖에.
그리고 그것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더더욱.
이건 혼자서 해결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네토루는 동화 속의 존재들처럼 용사가 아니었다.
그나마 때가 찾아왔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도망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뿐.
물론 그렇다고 그대로 왕국과 함께 죽을 생각은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다면 주변 사람들이라도 챙겨서 ‘주인공’이 있는 국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국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버그들이 차지한 국토를 돌파해야 한다는 거니까. 솔직히 말해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황은 암울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좌절해서 모든 걸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일단 눈앞의 일부터 해결한다.
그래도 다행히 현재 상황이 마냥 나쁘지는 않다. 예상치 못한 리엔의 협력 덕분에 카렌을 세컨드로 둘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세레스인가.”
당연하지만 네토루는 이번 임무에서 세레스를 도시에 놔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여기사의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남은 기간이 겨우 1주일뿐이다. 아무리 네토루가 돕는다고 해도, 그 기간 안에 세레스가 회복하는 걸 기대하는 건 어렵다.
결국, 이러면 방법은 하나뿐.
다만 아무리 한 번 몸을 섞었다고 하지만, 과연 이걸 세레스가 어떻게 납득할지가 문제인데···.
그러한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
문득 네토루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곳은 나츠오가 있는 병실 앞이었다.
현재 소년이 머물고 있는 곳은 네토루가 있는 병실의 근처였다. 덕분에 자연스레 앞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은 짧았다.
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네토루는 조용히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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