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4 NTO
성기병이 넘어지면서 순간 조종석에 머리를 박은 탓일까. 머리가 아프다. 카렌은 멍이 들었을지 모를 이마를 살살 매만지며 말했다.
“혹시 마력 탈진이 문제야? 확실히 방금 실수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출력이 낮았는데···.”
“···출력이 낮았다고?”
“그래, 너, 지금 너무 출력이 너무 낮아.”
“그럴 리가!”
불쾌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나츠오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읏!?”
그 갑작스러운 소리높임에 카렌은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나츠오는 그런 카렌의 모습을 보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몸을 들썩였다.
“나는 지금 예전에 너랑 커플링 했을 때처럼 평범하게 출력을 높였을 뿐이야! 지금 문제가 있는 건, 오히려 너라고!”
“···뭐? 나?”
나츠오의 이야기에 카렌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심상치 않은 나츠오의 분위기에 카렌도 곧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츠오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나츠오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실수를 떠넘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녀석도 아니었고.
···정말 문제가 나한테 있는 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렌은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설마.’
지난 한 달간 카렌은 네토루와 계속 커플링을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의 마력 신경계를 성장시켰다. 그래야지 그의 역량을 감당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러한 노력이 어쩌면 지금 오히려 독이 된 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카렌은 자신의 몸 안에 흘러들어오는 나츠오의 마력을 느끼며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뭔가 나츠오의 마력이 낯설어졌다고.
그럴 수밖에. 그동안 카렌이 상대해왔던 네토루의 마력은 난폭했다. 어떻게 종잡을 수 없는 망아지처럼 제멋대로였다. 그야말로 녀석다운 마력이었다.
하지만 반면에 나츠오의 것은 어딘가 순한 느낌이 있었다. 분명 활력이 넘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솔직히 비교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
거기서 카렌은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네토루에게 물들어가고 있던 것인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던가. 어느새 몸이 그의 마력에 적응하고 말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몸의 체질이 바뀌는 중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
그 사실에 카렌은 입을 살짝 벌리며 경악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는데.’
사실 이러한 체질 변화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커플링 파트너를 바꾸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성기병 파일럿들이 기존의 커플링 파트너를 고집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변화가 크잖아.
물론 단순히 마력 신경계가 바뀐 탓에 나츠오가 성기병의 출력을 잘못 높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분명 나츠오의 몸 상태에도 문제가 있다. 마력 탈진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탓에 마력 출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결론에 도달한 카렌이 나직이 말했다.
“···나츠오. 아무래도 우리 이 상태로 출격은 무리인 거 같아. 일단 좀 더 휴식을 취하고···.”
“아니야. 할 수 있어.”
“으응? 나, 나츠오?”
“···출력이 부족할 뿐이야. 기다려봐. 그냥 출력만 높이면 그만이잖아?”
“아니···. 여기서 무리했다가는 또 몸이···. 윽!?”
설득할 겨를도 없었다. 나츠오는 별안간 조종간을 강하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력 패스를 통해 나츠오의 마력이 밀려 들어왔다.
난폭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네토루의 마력과 느낌이 비슷하다는 건 아니었다.
마력의 성질이 아니라, 흐름이 난폭했다.
마력 패스를 통해 일정하지 않고 흐름이 툭툭 끊기는 마력이 뭉텅이째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나츠오가 어떻게든 마력을 쥐어 짜내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하아···. 하아···.”
“···나츠오.”
어느새인가 나츠오에게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조정간을 쥐고 있는 손이 안타까울 정도로 떨리고 있다.
마력 탈진의 초기 증세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마력을 밀어 넣어도 나츠오가 성기병의 출력을 높이는 건 불가능했다. 카렌은 점차 서로 간의 마력 패스가 닫히고 있는 걸 느꼈다.
이건···.
커플링 파장이 맞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세였다.
2.
“···잘 했어요.”
카렌이 콕피트 안으로 들어가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세레스의 말에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방금 나츠오를 격려해준 거요. 뭔가 되게 어른스럽고 보기 좋았어요.”
세레스는 은은한 눈웃음을 지으며 귀에 걸려있던 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네토루는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지금까지 봤던 세레스의 미소 중에서 제일 자연스럽고 따스한 미소였다. 봄날의 꽃이 한 송이 피어오르는 듯한 온화함과 기품이 있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던 세레스는 등을 돌리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도 이제 슬슬 돌아가 보죠. 안 그래도 저는 밤에 한숨도 못 잔 덕분에 많이 피곤하네요. 가서 한숨 자야겠어요.”
“밤에 한숨도 못 잤다고?”
“네. 당신 때문에······.”
“나 때문에?”
“···읍.”
뭔가 말하려던 세레스가 말을 전부 끝내지도 못하고 중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돌연 한걸음 먼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째 걸음이 빠르다.
“···세레스?”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의미 없었다.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를 쫓아 옆에 섰다. 하지만 그때마다 세레스는 네토루보다 한걸음 먼저 나아갔다. 누가 보더라도 의도적인 거리 두기였다.
결국, 그녀의 등 뒤에서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 채 네토루가 물었다.
“나 때문에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 괜히 신경 쓰이게 중간에 말을 끊는 게 제일 비겁한 거 알아?”
“그러면 저는 그냥 비겁해질게요.”
“······”
어처구니없는 대답이다. 황당해진 네토루는 그저 헛웃음만 흘린 채 세레스의 등을 응시했다.
사뿐사뿐 귀여운 발걸음이다.
그렇지만 정작 자기가 말하면서도 어딘가 부끄러웠는지 세레스의 목덜미에 옅은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도대체 뭘 숨기고 싶었길래.
그러한 의문과 함께 서로 미지근한 침묵 속에서 병원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쿠우우우웅!
““······?””
돌연 등 뒤로 들려온 커다란 소리에 네토루는 물론이고 세레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쭉 뻗어 있는 복도.
그리고 그 끝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격납고에서 새하얀 성기병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카렌의 성기병이었다.
당연하지만 방금 그 소리가 무엇인지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기동 중에 무언가 실수해서 넘어진 듯했다.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보던 세레스가 말했다.
“···혹시 나츠오가 실수라도 한 걸까요.”
“아마 그렇겠지.”
두 사람은 상황을 인지하는 즉시 곧바로 뛰었다. 혹시라도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다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역시 나츠오에게 출격은 무리였나.”
마침 도착한 그곳에는 아스나가 곤란하다는 듯이 넘어진 성기병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토루도 아스나의 옆에 선 채 바닥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카렌의 성기병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조금 불길하기는 했지만 역시나인가.
아무래도 마력 신경계의 구조가 바뀐 카렌을 다루는 건, 생각 이상으로 나츠오에게는 버거운 일인 듯했다.
지금 저기에 있는 카렌은 나츠오가 알던 한 달 전의 카렌이 아니었다. 네토루의 영향을 받아 ‘몸 안의 마력 신경계’가 점점 바뀌고 있던 카렌이었다.
카렌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그녀는 자신도 알게 모르게 네토루를 ‘기준’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력 신경계를 가꾸어 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며칠 전에는 네토루가 직접 카렌의 마력 신경계를 건드리기까지 했다. 마력 방출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일부분을 직접 급격히 확장한 것이다.
그러니 전처럼 카렌을 다루려고 했던 나츠오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겠지.
더욱이 마력 신경계뿐만이 아니다.
카렌의 커플링 파장도 네토루의 것에 점점 맞춰지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 뜻은 그만큼 나츠오의 파장하고 점점 비틀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저렇게 나츠오가 실수를 하는 건 예정된 결과였다.
그래도 그나마 아직까지 나츠오가 카렌과 커플링 할 수 있던 건 겨우 ‘한 달’ 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다면 커플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가 이런 사태를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다만 그가 예상 못 한 건 카렌과 나츠오가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카렌이 나츠오랑 이렇게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 못 했다.
그럴 수밖에.
나츠오의 치료 기간이 대충 반년이라고 했던가.
정확히 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던 거겠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러한 소년의 몸이 완전히 회복을 끝낼 반년 뒤에는.
마침 프랑기아가 무너질 시기였다.
그래서 네토루는 망설임 없이 카렌에게 손을 댔다.
어차피 왕국이 무너질 때까지 복귀하지도 못할 파일럿을 기다리게 할 바에,
이 아이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전력으로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으니까.
왕국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아는 네토루에게,
재능과 의지를 두루 갖춘 소녀를 가만히 놔두라고 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한테 욕을 먹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이제와서 놔주기에는 남은 시간이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즌하모니님, 고운말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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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삽화는 프롤로그에서 네토루랑 카렌이 첫 커플링 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대충 조종 모습이 이런 식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2번째 삽화도 있는데 완성되면 수정해서 올리겠습니다.
음. 드디어 성기병&카렌 표지가 나왔네용.
참고로 센티패드 일러스트도 완성되었는데 이러면 너무 그림이 많아져서. 그냥 버그 일러스트에 올려놨습니다! 심심하면 구경하시길.
아, 그리고 지도 한 번 만들어보고 있는데... 이거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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