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3 NTO
세상이 기울어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카렌의 성기병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지면과 시야가 가까워지며.
────쿵!
이윽고 앞으로 움직이던 성기병이 넘어지자 엄청난 충격이 콕피트 내부를 흔들었다.
당연하지만 그 충격에 안에 타고 있던 파일럿들이 멀쩡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꺄아앗!?”
조종석에 엎드려 있던 카렌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나츠오는 그녀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간신히 조정간을 놓지 않은 채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하지만 뒤통수가 콕피트 내부와 강하게 부딪치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머리 안의 혈액이 솟구치는 압박이 그를 괴롭혔다.
‘···윽!’
나츠오를 이를 악물며 카렌의 조정간을 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건.
아까부터 나츠오는 카렌의 조정간이 무겁게 느껴졌다. 감도는 물론이고 성기병을 조종하는 감각이 너무나도 낯설다.
카렌과 첫 커플링 할 때도 이러지를 않았다. 카렌의 조정간은 무겁기보다는 가벼운 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정말 지난 한 달 동안 내 몸이 무뎌진 건가?
아니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마력 신경계 때문인가?
···아니. 그게 아니다.
이건 내 문제가 아니야.
나츠오는 마력 패스를 통해 카렌의 마력 신경계에 빨려 들어가는 마력의 흐름에서 비로소 그 답을 알 수가 있었다.
이건 카렌의 마력 신경계가 바뀐 것이다.
마력 용량은 물론이고, 마력 연소율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온몸의 기가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압박이 조정간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나츠오는 마력 탈진으로 손상된 마력 신경계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다. 비록 놈이 회복을 돕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불안전한 상태였다.
그러니 이 이상 마력을 무리하게 사용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 카렌의 조종간을 놓아야 한다. 몸이 본능적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현재 카렌의 마력 신경계는 상당한 수준의 마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으윽.’
하지만 나츠오는 카렌의 조종간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성을 떠나 감정의 영역이었다.
드디어 카렌의 조정간을 손에 쥐었는데···.
이걸 어떻게 손에서 손쉽게 놓아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한 달 동안 카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여성 파일럿의 마력 신경계는 꾸준히 성장한다.
그렇기에 마력 신경계의 변화에 따라 마력 용량이라거나 연비가 달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 정도가 심했다.
······설령 카렌이 지난 한 달 동안 몸 안에 열심히 마력 신경계를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
그러면 이 낮은 감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감도는 커플링 파장의 일치율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건 단순히 카렌의 마력 신경계 때문이라고만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나츠오는 카렌의 마력 신경계가 바뀐 것 보다도, 그녀의 파장 변화가 제일 혼란스러웠다.
안 그래도 기관에서부터 첫 시도 만에 커플링을 성공할 정도로, 카렌하고 파장이 잘 맞던 나츠오였다.
설마 커플링 파장도 달라진 것인가. 인정하기 싫은 사실에 나츠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나츠오는 현실을 부정하듯 생각을 거듭하였다. 혹시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어쩌면 진짜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이럴 리가 없어.’
살펴볼수록 뚜렷하게 느껴지는 카렌의 변화에 나츠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잘 보니까 카렌의 마력 패스조차도 바뀌었다. 원래 이렇게 카렌의 마력 패스가 확장되어 있던가.
아무리 마력을 집어넣어도 카렌의 마력 패스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레 나츠오의 마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부족하다는 것처럼 탐욕스럽다. 나츠오는 오싹함을 느꼈다.
‘···이건 내가 알던 카렌이 아니야.’
마력 신경계도, 커플링 파장도, 마력 패스도,
카렌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렌은 내가 알던 카렌이 아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정말로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그새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건가?
그 의문에 대답하듯.
─멍청아! 지금 네가 상황의 심각성을 잘 모르나 본데 성인이 된 여성 파일럿에게 첫 경험이라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알겠어?
모래알 같은 작은 번뜩임과 함께 병원에서 칼라일이 했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나츠오 날 그렇게 쓰레기처럼 쳐다보지 마.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니까. 아무튼, 내 이야기 잘 들어라. 왜 첫 경험이 중요한지 지금부터 자세하게 설명해줄 테니까.
‘···첫 경험.’
카렌이 이렇게 바뀌려면 무슨 일이 있어야 할까.
그 순간 떠오르는 답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카렌이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 다른 남자의 정액을 자궁 안에 받아들이고, 그 영향으로 마력 신경계와 체질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것이다.
더욱이 여성 파일럿에게 첫 경험은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면 이런 카렌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카렌은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을 텐데?
카렌은 아직 성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졌을 때였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나츠오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생각들이 서서히 머릿속을 잠식한다.
‘···설마.’
애초에 성기병 파일럿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성관계를 가지는 걸 금지한 것은, 청소년기의 불완전한 마력 신경계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르게 말해서 마력 신경계가 이미 남녀 관계를 맺어도 될 정도로 성숙해진 상태라면······.
굳이 성인이 아니더라도, 한두 달 정도 앞당기는 게 무언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
그래서 카렌은···?
‘······’
이어지는 추측과 생각에.
나츠오는 호흡이 떨리는 걸 느꼈다. 어느새 안색도 파리하게 변하고 있었다. 조정간을 쥐고 있던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그저 멍하니 자신의 앞에서 조종석에 엎드려 있는 카렌의 뒷모습을 보았다.
온몸에 착 달라붙은 슈트 덕분에 드러난 늘씬한 허리와 굴곡진 골반. 자신의 둔부를 드러내듯 살짝 벌어져 있는 두 허벅지가 남자를 유혹하듯 씰룩인다.
그러면서도 흑발 사이로 슬쩍 보일듯 말듯한 하얀 목이, 뭐라 말할 수 없는 여인의 색을 풍기고 있었다.
콕피트 안은 밀폐된 공간이다. 두 남녀 간의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밀착되는 곳. 그러한 비좁은 공간 속에서 나츠오는 카렌에게서 여인의 향을 느꼈다.
그 순간 그에게 카렌은 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닌,
고혹적인 풍취를 풍기는 여인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나츠오는 그런 카렌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온갖 망상들이 들끓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망상 속의 주인공은.
나츠오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
나신을 드러낸 카렌이 침대 위에서 다른 남자와 배를 맞추는 모습을 떠올리며 나츠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열이 올랐다.
“······”
그럴 리가 없다···. 카렌이···. 다른 남자와?
아니야. 그럴 리가···.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제법 흔한 일이야. 복귀했더니 원래 있던 커플링 파트너가 다른 놈이랑 계속 붙어 다니는 경우가 말이지.
칼라일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메아리친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카렌이 남자와 몸을 섞는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침대 위에서 남자의 것을 받아들이고, 기쁘게 웃는 카렌의 모습···.
그동안 나츠오가 망상으로만 상상하고 있던 그것.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부정해도.
이미 눈앞에 결과가 있지 않은가.
마력 신경계도, 커플링 파장도, 마력 패스도···.
모든 게 바뀌어버린 카렌이 말이다.
이게 남자랑 몸을 섞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러면 누구랑?’
카렌은 누구랑 잔 것일까?
누구에게 자신의 처음을 준 걸까.
그 답은 뻔했다. 커플링 파트너였던 그 남자겠지.
‘그래서···. 그렇게 능숙하게 다룬 건가.’
나츠오는 시계탑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 남자의 실력은 분명 대단했다. 그건 나츠오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성기병 파일럿이라면 그 싸움에서 압도당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남자의 실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카렌 역시 남자에게 맞춰줄 수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맞아야 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평범한 방법으로 그렇게 서로에게 맞춰줄 수 있는 걸까. 심지어 마지막에 그 남자는 카렌의 성기병으로 마력 방출까지 사용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나츠오가 사용 할 수 없던, 카렌의 힘.
눈앞이 깜깜해진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카렌은 그새 마력 방출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내가 없는 사이, 그 남자랑 커플링 하는 동안?
“······”
머리가 아프다. 나츠오는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하다. 깊은 현기증이 뜨겁게 달아오른 칼날이 되어 뇌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 조종석에서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카렌이 뒤를 돌아보더니 투덜거렸다.
“으읏···. 아파라···. 뭐하는 거야, 나츠오.”
나츠오는 그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카렌.”
“너, 첫 커플링 때도 이런 실수는 한 적 없잖아.”
“실수···.”
차라리 실수면 좋을 텐데. 나츠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려오는 가슴 때문에 위가 아파오고 있었다.
카렌이 남자랑 몸을 섞었다. 그 사실에 절망하고 있자니, 카렌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마력 탈진이 문제야? 확실히 방금 실수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출력이 낮았는데···.”
“···출력이 낮았다고?”
나츠오는 다른 의미로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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