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2 NTO
“···뭐, 사내놈이 실수할 수도 있지.”
나츠오는 아연해졌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숨이 콱 막혀왔다.
그럴 수밖에. 나츠오는 분명 그가 꾸짖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이게 무엇인가.
“그래도 센티페드를 상대로 사람들을 대피시킬 때는 멋지던걸. 그거, 보통 용기로는 안 되는 일인데. 대단했어.”
“······”
머리가 점점 헝클어진다. 담백한 어조로 그리 말한 금발 사내는 어린 애를 칭찬이라도 하듯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츠오는 굳은 몸 그대로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황량한 느낌의 건조한 색의 눈동자.
가만히 보면 그 안에는 조금의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를 위로하듯, 칭찬하듯, 격려하는 듯한···. 어른의 눈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보니 예전에 종종 있었다.
지금은 모두 죽거나 은퇴했지만···.
전투 중에 실수해도 다그치기보다는 힘내라고 응원해주었던 형들이 말이다.
덕분에 떠오르는 오랜 추억과 함께 가슴 안쪽에서 울렁이는 감정을 느끼며 나츠오는 강한 무력감을 느꼈다.
실력으로나,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으로나,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없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가 앞에 있다.
2.
네토루가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심 카렌은 조마조마했었다.
그가 나츠오를 너무 꾸짖으면 어떻게 하지.
···정말 진심으로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바보 같은 걱정이었나보다.
출격하기 전.
카렌은 네토루와 잠시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현재 복도를 걷는 건 두 사람뿐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카렌이 네토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따로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왠지 쉽게 말문을 여기가 어렵다.
미묘하게 어색한 분위기.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냥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 어색함.
그래서 계속 몰래 흘겨보기만 하던 그때였다.
문득 네토루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주자 카렌은 흠칫하고는 다급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아, 아니···. 그냥. 정말 괜찮은 건가 싶어서. 혹시 네가 괜히 또 무리하는 거면 곤란하니까···.”
“뭐, 아까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괜찮아.”
“읏···.”
또다시 네토루가 손을 뻗더니 머리를 꾹 눌러댔다. 카렌은 그 손길에 얼굴을 붉혔다. 이 녀석 또 나를 애 취급하고 있다.
그 사실에 불만을 느낀 카렌은 눈을 살짝 가늘게 늘어뜨리고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카렌의 사고가 잠시 멈추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
체격 탓일까.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의 모습이 묘하게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원래 네토루가 어른스럽기는 했는데···.
예전부터 알게 모르게 사람을 배려하는 것도 그렇고, 전투 중에 리드해주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오늘 또 다시 그의 새로운 일면을 본 것 같아서, 카렌은 다시 한 번 네토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에도 위축되어 있던 나츠오를 격려하고, 칭찬하던 네토루의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다.
···만약 나라면 그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던 그때였다.
아까부터 카렌의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던 네토루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카렌, 너는 괜찮은 거야?”
“···응? 뭐가?”
“아직 마력 신경계가 완전히 진정된 게 아닐 텐데. 그리고 나 때문에 바뀐 마력 신경계도 아직 적응 못 했을 테고.”
“적응? 아···. 맞다···.”
뒤늦게 무언가 깨달은 듯 카렌이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그제야 자기 머리 위에 올라와있던 네토루의 손을 쓰윽 치워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 그때 내 몸에 뭔 짓을 한 거야?”
말을 하면서도 카렌은 자신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그곳에는 네토루 때문에 구조가 바뀌어버린 카렌의 마력 신경계가 있었다. 성장이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말 그대로 구조 자체가 일부 바뀌어버린 상태였다.
카렌의 물음에 네토루는 여느 때처럼 뻔뻔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나쁜 짓은 안 했어.”
“아니, 걱정 말라고 해도···. 내 몸이니까 그래도 뭔 일이 있던 거지 정확히 알아야지.”
“···음. 그런가? 뭐, 굳이 말하면 네 마력 신경계의 설계를 내가 인위적으로 조작했다고 하는 게 그럴듯하려나.”
“···조작했다고?”
녀석의 입 밖으로 뭔가 상상도 못 한 말이 나오자 카렌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지금 이 녀석은 설마 다른 사람의 마력 신경계를 자기가 인위적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건가.
‘이게 가능한 건가?’
아무리 이 녀석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이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마력 신경계를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엄청난 뜻을 의미하고 있으니까.
덕분에 카렌은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하지만 그때 네토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카렌. 그것보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랑 이렇게 너무 시간을 질질 끌면, 아스나가 곤란해할 텐데.”
“···아.”
네토루의 말에 카렌은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태평하게 떠들 여유는 없었다. 원래 말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그러니 조작된 마력 신경계에 대해서 묻는 건 복귀한 후에 하도록 하자.
그렇게 카렌은 머릿속에 있던 온갖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네토루에게서 한 발자국 슬며시 물러나며, 인사를 하듯 살짝 몸을 기울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나츠오를 격려해줘서 고맙다고.”
카렌은 네토루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정작 소꿉친구였던 자신도 하지 못했던 일이니까.
3.
···카렌은 언제 오는 걸까. 아무래도 그 남자하고 이야기가 길어지는 듯했다.
오히려 다행이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니.
어두컴컴한 콕피트 내부에서 나츠오는 그저 조용히 숨만 길게 내쉬었다. 감정을 죽이고 의식을 참참이 가라앉혔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다림 끝에 찾아온 건 놈의 목소리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나?
아무래도 생각까지는 읽을 수 없는 듯했다.
놈의 물음에 나츠오는 슬며시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냥. 아무것도.”
─아무것도라니. 지금 자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누가 봐도 ‘무력감’ 같은데. 아니. 질투도 조금 섞여 있군. 혹시 그 남자 때문에 그런 건가?
“···멋대로 내 감정을 읽지 마.”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던 것을 몸 안에 있던 녀석이 정확히 꿰뚫어 보자, 나츠오는 표정을 찡그렸다.
하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강한 수컷한테 암컷을 빼앗기는 건 자연의 순리지.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떤가?
“···포기? 지금 나보고 카렌을 포기하라고?”
─합리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 소녀한테는 그게 더 좋은 결과가 될 수도 있네. 강한 수컷 곁에 있으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더 오래.”
나츠오는 주먹을 쥐었다. 지금 이 녀석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커플링을 하는 순간 여성 파일럿은 남성 파일럿에게 모든 생사를 맡기게 된다. 성기병을 움직이는 건 오롯이 남성 파일럿의 몫이었으니까.
그러니 남성 파일럿의 역량에 따라,
여성 파일럿의 생존율이 달라질 수밖에.
그런 점에서 지금 이놈은 나츠오에게 말하고 있었다. 카렌이 더 오래 살아남는 걸 바란다면 그 사내에게 얌전히 넘기라고.
하지만 그러기는 싫다.
아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그러한 생각 역시 꿰뚫어 보았는지.
─아무래도 소녀를 포기하기 싫은가 보군. 그러면 이건 어떤가.
놈이 태연하면서도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가 사라지는 거지.
“···사라진다고?”
─그래. 자네의 주변에서···. 아니, 소녀의 주변에서 말이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간단한 이야기네. 그러니까···.
놈이 말을 전부 끝내기 채 전이었다.
그때 타이밍 나쁘게.
끼이이익─. 콕피트가 열리더니.
“미안. 오래 기다렸지?”
새하얀 슈트 차림새의 카렌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츠오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를 카렌이 순진하게 조종석에 엎드리며 말했다.
“나츠오, 너랑 커플링하는 건 오랜만이네. 설마 그동안 감이 죽은 건 아니겠지?”
“······”
나츠오는 입술을 떨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카렌이 방금 이야기를 들었을 리는 없겠지만 몸이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지금도 놈은 나츠오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자신의 계획을 말이다.
“···나츠오?”
“아··· 응?”
“뭐야.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나 이제, 화 풀렸으니까 걱정 마. 게다가 네토루하고도 이야기는 잘 풀렸잖아?”
조종석에 엎드려 있던 카렌이 뒤를 돌아보더니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렌의 시선에 나츠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오랜만이라 그런가 봐.”
“···뭐, 한 달 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이윽고 성기병과 커넥팅 작업을 시작한 카렌의 등줄기와 가느다란 양 허리 쪽에서 마법진과 함께 조정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카렌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츠오는 애써 방금 전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흩어냈다.
당연하지만 놈의 말 따위에 귀를 기울일 생각은 없다. 오히려 덕분에 희미하게 허물어지고 있던 경계심이 되살아났다.
···역시 이 녀석은 위험해.
파트너는 무슨. 이놈은 악마가 분명하다.
나츠오는 길게 숨을 내쉬며 눈앞에 있는 카렌의 조정간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마력패스가 연결되고,
나츠오가 카렌의 성기병을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어?”
조정간을 쥐던 나츠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카렌의 감도를 비롯해 카렌의 마력 용량과 연소율이 이상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마치 낯선 성기병을 운용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정말 카렌의 성기병을 움직이고 있는 게 맞는건가?
순간 그러한 의문이 들기 무섭게.
이윽고 앞으로 성큼 나아가던 카렌의 성기병은.
───쿵!
제대로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vers1300님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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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성기병 표지는 내일 공개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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