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 NTO
1.
꽈아악.
나츠오가 몸을 껴안던 팔에 힘을 더하고 있었다.
이건 어째서일까.
문득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지만.
···착각이겠지. 카렌은 가슴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지워내며, 나츠오에게 말했다.
“···나츠오. 이제 놔줘.”
“·····응.”
단호한 목소리가 통한 걸까. 스르륵 몸을 안고 있던 나츠오의 팔에 힘이 풀린다. 그러자 카렌은 슬그머니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고는 거리를 벌렸다.
“···네토루가 일어났나 봐. 이참에 바로 여기서 사과하는 게 어때?”
“그러는 게 좋겠네. 그런데 그 전에···.”
카렌의 말에 나츠오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민망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카렌. 잠시 시간 좀 주면 안 될까? 이런 얼굴로 사과하는 건 그렇잖아.”
카렌은 나츠오의 얼굴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 울고 있던 탓인지 눈가가 붉다. 화장실이라도 가서 몸가짐을 정리하고 오는 게 좋을 듯했다.
“···그래, 갔다 와.”
“응.”
나츠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등을 돌려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지금 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처럼.
그러자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아스나가 말했다.
“나츠오. 뭔가 솔직해졌네? 분위기도 묘하게 바뀌었고. 순간 딴 사람인 줄 알았어.”
“···그러게요.”
아스나의 말대로다.
나츠오가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카렌은 하룻밤 사이에 무언가 바뀌어버린 나츠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렌.”
뒤에서 들려온 네토루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 카렌은 조심스레 등을 돌려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카렌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안도했다.
“···네토루.”
정말 다행이다. 괜찮아 보여서.
2.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걱정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걸까. 과연 솔직하게 사과하면 카렌이 받아줄까. 그날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정말 카렌이 용서해줄까.
그런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녀석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있는데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자리에서 빠져나온 나츠오는 몰래 카렌의 모습을 엿보며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부드럽게 풀린 카렌의 온화한 미소.
어딘가 애틋하기까지 한 그 아름다운 미소에 나츠오는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츠오는 미칠 것만 같았다.
어째서 한 달 사이에 저렇게 바뀐 걸까.
나츠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하였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만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전투 때 무리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게 전부 그동안 서로 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이다.
예전에 칼라일이 말했던가.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길 마련이라고.
그의 말은 옳았다. 겁을 주듯 했던 그의 모든 말이 지금 현실이 되고 있었다.
카렌의 마음이 점점 딴 남자에게 가고 있다.
그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인데.
“···역시 고백을 미루면 안 됐나.”
어설픈 망설임이 이러한 사태를 만들었다.
그 전투 때 용기를 내서라도 서로의 관계를 좀 더 확실하게 끝맺었어야 했는데.
병원에 입원했던 것도 그렇고, 괜히 그녀의 생일을 기다리려고 했던 게 큰 실수가 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카렌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그녀가 선택할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고···.
저 아이는 계속 나만 봐줄 거라고···.
그러한 믿음 때문에 어설픈 관계였어도 개의치 않았다. 카렌이 알게 모르게 남동생 취급하듯 돌봐주는 것도 괜찮았다. 어쨌든 옆에 있는 건 자신이니.
나츠오는 무거운 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그때 ‘파트너’가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저 소녀가 소중한 존재인가?
황당한 질문이다. 나츠오는 미간을 좁혔다.
“···그걸 말이라고 해?”
─어차피 여자는 많은데 왜 그렇게 굳이 한 사람한테 고집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건 네가 인간이 아니니까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 카렌은 나한테 특별해. 다른 여자들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하다···? 신기하군. 그리고 흥미로워.
몸 안에서 느껴지는 울림이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는 있다. 몸 안에 있는 존재가 웃고 있다는 걸.
─그런데 NTL···. 아니, 저 네토루라는 사내가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네가 했던 말이랑 너무 틀리지 않나.
“그건···.”
나츠오는 입술을 떨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많이 놀랐어. 저 남자가 벌써 일어날 줄은 몰랐거든. 게다가 저렇게 멀쩡할 줄이야···.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즉, 이건 저 사내가 특별하다는 건가?
“···그래.”
─흥미롭군. 아주 마음에 들어.
왠지 모르지만 ‘파트너’는 기뻐 보였다.
나츠오는 가슴 안쪽에서 선명히 느껴진 그 감정에 입술을 짓씹었다.
불편한 동거였다.
어느 순간인가 정신을 차려보니 몸 안에 깃들어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
그나마 나츠오가 기억하는 건 어제 카렌과 싸우고서 밖에서 비에 맞다가, 한 ‘여자’를 만났다는 것뿐.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분명 그 ‘여자’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한데, 기억나는 게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위험한 느낌이 없어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놔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은연히 조언을 하기도 했고. 카렌에게 곧바로 사과하라고 강요한 게 바로 이 녀석이었다.
스스로를 ‘파트너’라고 소개한 정체불명의 존재.
나츠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녀석에게 물었다.
“···너는 도대체가 정체가 뭐야? 혹시 악마야?”
─악마? 아···. 너희 인간들이 부르는 그 특수한 존재들 말인가.
말하는 어투로 보아하니 악마는 아닌 듯했다.
그건 정말 다행인데···. 그러면.
“그러면···. 넌 뭐하는 녀석이야?”
─꼭 그걸 알아야 하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설마 이대로 계속 내 몸 안에 있을 생각이야?”
─이쯤 되니 나도 섭섭하군. 그래서 내 나름대로 ‘값’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지금 네 몸을 치료해주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게다가 방금 전에도 자네가 저 소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
섭섭하다고 말하면서도 녀석의 목소리는 정작 무미건조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대체 이 녀석은 정체가 뭐지?
계속 물어도 능글맞게 피하는 녀석의 태도에 나츠오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저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 카렌에게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도,
그녀와 커플링할 수 있도록 몸 상태를 호전시킨 것도,
전부 이 ‘파트너’라는 녀석 때문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그렇기에 녀석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자네를 최대한 도와줄 생각뿐이네. 자네와 나는 이제 서로 파트너지 않은가?
3.
프라시온. 그 안에서 393부대가 주둔하는 곳은 사실상 병원 바로 옆이었다. 혁명기 때 상당수의 성병기 부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는 형태만 유지한 채 버려져 있던 곳이지만.
아무튼, 아무래도 당분간 393부대는 이곳에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듯했다. 좋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네토루 또한 잠시 몸을 안정시켜놓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비록 방금 막 일어났다고 하지만 굳이 병석에서 가만히 요양해야 할 몸은 아니었기에, 네토루는 잠시 동안 머물게 될 부대를 구경하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카렌이 신경 쓰였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 속에서 카렌은 울고 있었다. 뭐, 조종석에서 피를 토하며 기절했으니 놀랄 만도 했겠지.
확실히 그때의 일이 충격이었던 걸까.
“···정말 아픈 곳 없는 거 맞지?”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성큼 다가온 카렌이 몇 번이나 조심스레 몸을 살피더니 그리 물었다.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심각하게 아픈 환자를 대하는 듯한 그 태도에 네토루는 왠지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썩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게다가 그런 카렌이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탓일까. 덕분에 묘하게 귀엽게 느껴진 네토루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고 말았다.
“괜찮으니까, 걱정 마.”
“읏? 자, 잠시만···. 머리는 갑자기 왜 쓰다듬는 건데.”
얼굴을 붉히며 카렌이 말했다. 화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알 수 없는 재미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굳이 머리를 올라간 손을 쳐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카렌의 머릿결은 세레스의 것과는 무언가 느낌이 많이 달랐다. 뭔가 보드랍다고 해야 할까. 아직 어려서 그런가.
한동안 그렇게 카렌을 상대로 장난치고 있자니,
문득 등 뒤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이 있었다. 네토루는 그게 뭔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 나츠오였다.
소년은 불안한 눈초리로 네토루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토루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된 소리 없는 시선 교환 속에서,
이윽고 제일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네토루의 앞에 선 나츠오였다.
“···어제 일은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나츠오는 사과와 동시에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먹을 꽈악 쥐고 있다.
얼마나 강하게 쥔 것인지 손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떨리는 게 보인다. 아니, 주먹뿐만이 아니다. 몸 전체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리고 네토루에게 그런 소년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너무나도 위태롭게 보였다.
안 그래도 세레스에게 얼핏 이야기는 들었다.
카렌하고 어제 싸웠다고 하던가. 세레스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아마 시계탑 일로 카렌이 뭐라고 한 거겠지.
게다가 카렌과 싸우고 난 뒤에 한참 동안 빗물에 흠뻑 젖은 채 병원에 돌아왔다고.
그때 소년은 빗물을 맞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후회했을까. 절망했을까.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네토루에게는 우산을 씌워주며 상냥하게 말을 건네줄 사람이 있었지만,
과연 이 소년에게는 어떠할까.
이제는 오래된 기억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네토루는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뭐, 사내놈이 실수할 수도 있지.”
“···네?”
예상치 못한 말이었을까. 소년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손을 뻗던 네토루는 그런 소년을 위로하듯 ,
방금 카렌에게 했던 것처럼 소년의 머리를 지저분하게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센티페드를 상대로 사람들을 대피시킬 때는 멋지던걸. 그거, 보통 용기로는 안 되는 일인데. 대단했어.”
그것은 분명 ‘나츠오’의 나이 대에서는 쉽게 할 수 없던 행동이었다. 심지어 네토루, 본인 조차도 저 나이 대에서는 무서워서 도망치지 않았는가.
그러니 누군가 한 사람은 칭찬해줄 필요가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Lycoris님, 호더키드님, NeoGGM님, 에어프라이님, Vurgil님 후원 감사합니다!
삽화 후원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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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coris님─50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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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표는 완결까지 꾸준하게 삽화 넣는 겁니다!
이번 삽화는 관측탑에서 네토루가 카렌 구해주었을 때 장면입니다.
그리고 므밍님 팬아트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헤으응...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