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90화 (90/148)

EP.90 NTO

1.

병실에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니.

세레스는 자기가 말했던 대로 의사를 불러왔다. 그것도 평범한 의사가 아니었다. 치료 마법에 정통한 치료술사였다. 듣자 하니 이 도시에서 파일럿들을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마법사인 듯했다.

393부대원들도 종종 신세를 지는 것 같던데, 도시 병원에 오는 건 처음인지라 네토루가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허어. 이거, 정말 신기한 몸이군. 분명 어제는 반쯤 죽은 상태로 실려 왔는데, 이렇게 빨리 회복한 걸 보면 놀라울 정도야.”

희끄무레한 흰 머리카락이 가득한 노년의 마법사가 탄성을 흘렸다. 아까부터 노인이 하라는 진료는 안 하고 계속 몸을 더듬고만 있자 네토루는 표정을 찡그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입니까?”

“뭐, 어떤가. 어차피 내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끌끌. 그냥 신기해서 그렇네.”

이쯤 되면 진료가 아니라 다른 게 목적이 아닐까 싶어졌다.

그렇지만 나이 지긋하게 먹은 노인이었기에 차마 네토루는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냥 노인이 만족할 때까지 놔두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굳은살 가득한 손이 팔뚝을 꾹꾹 눌러댔을까. 옆에 있던 세레스를 흘겨보던 노인이 새끼손가락을 흔들더니 넌지시 말을 꺼냈다.

“혹시 옆에 있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자네의 그건가?”

“···그거라면?”

“애인 말이네. 안 그래도 어젯밤 계속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데···. 역시 보통 사이가 아닌 거지? 게다가 딱 보니 커플링 파트너인 것 같던데.”

역시 세레스가 밤새 계속 옆에 있던 건가. 아까 물어볼 때는 은연히 대답을 피하더니만,

아무튼. 진료하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 웃지도 못하겠다. 네토루는 힐끔 옆에 있는 세레스를 쳐다보았다.

마침 그녀도 방금 이야기를 들었는지.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세레스가 어색하게 웃더니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그러자 노인이 슬며시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그런가? 그러면 다행이군.”

“네?”

“안 그래도 내 손녀가 이 녀석한테 관심이 있어서 말이야. 마침 이곳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

노인의 능청스러운 이야기에 세레스의 눈매가 묘한 분위기를 띠며 꿈틀거렸다. 입에 맺혀 있던 어설픈 미소도 순간 싸늘해졌다.

하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고 네토루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튼, 깨어나면 자네한테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네. 덕분에 많은 시민들이 살았어. 내 손녀도 자네 덕분에 살았다고 하더군. 자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대피소로 가던 길에 센티페드한테 습격당한 걸, 자네가 구해주었거든. ”

어느새 노인의 두 손이 네토루의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마치 큰 은혜를 입은 것처럼.

센티페드한테 습격당했을 때라면···.

아, 나츠오가 시민들을 데리고 대피소로 향할 때를 말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때 노인의 손녀가 있었나 보다. 이래서 묘하게 살갑게 대해주고 있던 건가. 네토루는 생각지 못한 인연에 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한테 손녀라도 소개해주겠다는 겁니까?”

“끌끌. 뭐, 그런 거지. 이래 봬도 한 미모 한다네. 자네가 궁금하면 당장 이곳에 불러올 수도······.”

“죄송하지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음? 그래도 얼굴이라도 한 번 보는 게···.”

“아니요.”

“···허어.”

망설임 없는 단호한 대답 때문이었을까. 노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매도 살짝 비틀어졌다.

다만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 언짢아하는 것보다는 어딘가 의문에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의문에 네토루는 나직이 대답했다.

“노인장도, 알다시피 저는 성기병 파일럿이니까요.”

“······”

짤막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조한 목소리가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노인은 몇 가닥 안 남은 머리를 건들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손녀분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성기병 파일럿과 짝을 맺어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애초에 노인장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텐데요. 현재 성기병 파일럿들이 대부분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

“그래, 잘 알지. 그렇지만···. 에잉···.”

현 시기에서 성기병 파일럿들의 최후는 버그들에게 죽거나, 폐인이 되어 은퇴하는 것뿐이었다.

버그들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상 성기병 파일럿들이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건 불가능했다.

이 시대에서 성기병 파일럿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똑같은 위치에 있는 성기병 파일럿들 분이었다.

파일럿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던 마법사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

어설픈 인연은 괜히 서로 파탄 낼 뿐이었다.

끝내 말 끝을 흐리던 노인이 작게 혀를 찼다.

“···쯧. 알겠네. 뭐, 나중에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게나. 내 손녀가 자네한테 관심 많은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사람 돌보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르네.”

“전쟁이 끝나면, 그때 다시 한번 생각해보죠.”

“끌끌. 그거, 내가 죽기 전에 볼 수라도 있으면 좋겠군. 이제는 버그 없는 세상이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야.”

노인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얼굴을 흐렸다.

3.

이후 진료는 원활하게 끝났다. 다행히 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단지 혹사시켰던 마력 신경계를 위한 장시간 휴식 기간이 필요할 뿐.

적어도 어디 몸에 장애가 생기지는 않았다.

“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그렇네요.”

옆에서 같이 결과를 들은 탓일까. 세레스가 안심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렇게 네토루는 잠시 벗어두고 있던 상의를 챙겨입고 있던 중일 때였다.

뒤에서 세레스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거 알아요? 방금 그 할아버지 손녀분. 되게 미인이라는 거.”

“미인?”

“네. 부대원들한테 엄청 인기가 많아요. 그러니 얼굴이라도 한번 봐두지 그랬어요.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이건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걸까.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아까 노인한테도 말했지만, 내가 일반인을 어떻게 만나.”

“그래도 너무 단호하게 거절한 게 아닐까 싶은데···. 일단 예의상 한 번 정도는···.”

“···뭐 사실 조금 솔깃하기는 했는데.”

당연하지만 손녀를 소개시켜주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나름 매력적이었다. 남자라면 싫어할 수가 없는 제안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네토루는 세레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그러자 세레스가 뭔가 싶어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모습이 재미있던 네토루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이런 여자가 옆에 있는데 굳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까.

그렇기에 네토루는 순간 뇌리에 스치는 문장을 그녀에게 솔직히 말해보았다.

“그렇지만 옆에 있는 누구 덕분에 미인이라고 해도 크게 기대는 안 되던걸.”

“네? 지, 지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 아니···. 방, 방금 뭔가 잔뜩 부끄러운 소리를 했잖아요!”

세레스가 화악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뭘 놀래. 나는 그냥 이 책에 있던 대사를 한 번 따라 해본 건데.”

그 반응을 즐기던 네토루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책을 집어 들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소녀들이 읽을 법한, 풋풋한 느낌의 로맨스 소설이었다.

“말도 안 돼···. 그, 그건 또 언제 읽은 거죠···.”

그걸 보자 세레스의 자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네토루가 말했다.

“네가 의사 불러올 때? 아무튼, 조금 읽어보니까 재미는 있더라.”

“···아.”

세레스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런데 굳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는 걸까.

소설 읽는 게 뭐가 문제라고.

이윽고 세레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해하지 마요. 그거 제가 가져온 거 아니에요.”

“그러면 누군데. 혹시 카렌이야?”

“으읏. 그건···.”

네토루의 물음에 세레스의 눈이 바쁘게 굴러다녔다. 유리구슬 굴러다닌다는 게 저런 느낌일까.

끝내 세레스가 슬쩍 시선을 피하고는 말했다.

“···아니요. 그거 제가 가져온 거 맞아요.”

“흐음.”

차마 카렌을 팔 수는 없던 건가.

그냥 혹시나 해서 변명할 길을 열어주었는데 세레스가 먼저 솔직하게 인정해버렸다. 내심 어설픈 거짓말이라도 하는 걸 기대했는데.

아무튼, 좋다.

네토루는 굳이 깊게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집어 들었던 책을 얌전히 내려놓으며 세레스에게 물었다.

“아, 그리고 보니 카렌은 지금 뭘 하고 있어?”

의식을 잃기 직전, 어렴풋이 남아 있는 카렌의 표정을 떠올려보면, 그 녀석도 많이 놀랐을 텐데.

그러니 빨리 상태를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3.

“···카렌. 어제 일은 미안했어.”

사과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카렌은 나츠오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엣? 자, 잠시만!?”

그래서 카렌은 몸을 밀어내기 위해 바둥거렸다. 하지만 나츠오는 쉽게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단단한 소년의 몸. 이 녀석 역시 남자인지라 여자 힘으로는 떨쳐내기 힘들었다.

아니, 아스나가 바로 옆에 있는데 뭘 하는 건가.

“···호오.”

마침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스나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재미있는 무언가를 본 것처럼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어느새인가 팔짱까지 낀 채 소리 없이 히죽이고 있었다.

카렌은 그 시선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지만, 나츠오는 개의치 않고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카렌. 앞으로 너한테는 거짓말 안 할게.”

“···너.”

“그리고 네토루, 그 사람한테도 진심으로 사과할 테니까·····. 용서 해줘.”

“······”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간절하고 애절한 목소리다.

그렇기에 나츠오의 품속에서 바둥거리던 카렌이 흠칫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심지어 어느새인가 나츠오는 울먹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덕분에 할 말을 잃고서 잠시 카렌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어제 일 때문에 지금 울고 있는 건가?

그걸 깨닫자 카렌은 나츠오를 밀어내던 손에서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어제 일은 많이 화가 났다. 그리고 많이 실망하기도 했다. 사람 한 명이 자기 때문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 앞에서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카렌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나츠오가 우는 모습을 말이다.

나츠오는 항상 씩씩한 척하던 녀석이었다.

반쯤 허세에 가까울지 몰라도, 항상 강한 면만 보이고자 했던 소년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숨김없이 잘못을 빌며 지금 울고 있다.

끝내 카렌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나츠오에게 말했다.

“···나츠오. 네토루가 일어나면 꼭 사과하러 가. 아니, 나랑 같이 가.”

“응.”

“그 녀석, 너 구하려고 엄청 노력했어. 너도 남성 파일럿이니까 알 거 아니야. 그 녀석이 얼마나 무모하게 싸운 건지. ”

“···응. 알고 있어.”

고개를 끄덕인 나츠오에게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떨림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토닥. 토닥.

끝내 카렌은 그런 나츠오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주었다. 오랜 커플링 파트너가 이렇게 울고 있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이러니까 정말 철없는 남동생을 둔 누나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뭔가 나츠오가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하니, 묘하게 안심이 되던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간단한 잔해 치우기니까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괜히 무리하고 있는 거 같은데.

세레스.

그리고 마지막은···. 네토루의 목소리.

“······!”

그 녀석 설마 일어난 건가?

그걸 인지하는 순간 카렌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복도를 쳐다보았다.

아니, 보려던 순간이었다.

꽈아악.

“······나츠오?”

“······”

시선을 돌리려고 하니, 나츠오가 몸을 껴안던 팔에 힘을 더욱 강하게 주었다.

그건 마치 카렌이 시선을 돌리지 않게 막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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