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9 NTO
잠시 꿈을 꾸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제대로 된 파일럿이라고 할 수 없던 어수룩한 시절. 아직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
솔직히 말해서 썩 반가운 기억들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흑역사라고 할 수 있었고,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손에 꼽을 최악의 기억이었으니.
그래도 아예 나빴던 기억만 있던 건 아니었다.
절벽 끝에 섰던 것처럼 위태로웠던 그 날,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아이가 있었으니까.
당돌한 아이였다.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고, 난생 처음 보는 낯선 남자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일까.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아쉬웠다.
그때 얼굴이라도 봐두었어야 했는데.
멍청하게도 이름은커녕 차마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헤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은 일이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서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강한 의지가 느껴졌던 소녀의 말이 지금도 가슴안에 선명하다.
그날, 소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크나큰 힘이 되어주었다.
···적어도 이제 쉽게 포기하지는 않게 되었으니까.
벌써 수년도 더 된 이야기.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네토루의 의식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떠도는 해파리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육신에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제일 처음에 살아난 감각은 촉각이었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과 매트리스 특유의 탄력이 등 뒤로 느껴진다.
지금 나는 누워있는 것인가.
그다음에 살아난 감각은 후각이었다.
어디선가 산뜻한 꽃향기가 나는 듯하면서도,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지금 나는 병원에 있는 것인가.
이윽고 청각이 깨났을 때였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들려온 소리는.
“에잇···.”
장난치는 아이 같은 귀여운 목소리다. 덕분에 네토루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꾸욱. 꾸욱. 꾸욱···.
볼을 꾹꾹 찔러대는 세레스의 손장난.
그동안 쌓여 있던 게 많은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자고 있던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니.
그게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는데.
갑자기 세레스가 손장난을 멈추더니,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좀 일어나요. 부탁이니까.”
당혹스럽다. 갑자기 이 아가씨가 왜 우는 걸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네토루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어느새 울먹이는 세레스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너, 매번 느끼는 건데 정말 잘 우네.”
“···읏?”
놀란 걸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세레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눈시울이 붉은 것도 그렇고, 그 모습이 왠지 토끼처럼 보여서 우스웠다.
“설마 나 때문에 우는 거야?”
“······”
넌지시 묻자 세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윽고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당신. 언제 일어났어요?”
“네가 에잇하면서 볼 찌르고 있을 때?”
“···아.”
세레스의 눈동자에 순간 색이 사라졌다. 뭔가 절망하는 듯한 눈이었다. 아까는 일어나면 좋겠다면서 말했으면서, 정작 반응이 이상하다.
그게 재미있던 네토루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덕분에 고민 많이 했어. 이거 일어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러니까···. 그게···.”
더듬더듬 말을 떠는 세레스. 차마 자색 눈동자가 네토루를 쳐다보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하고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글썽이던 눈물이 눈가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원래라면 여기서 끝냈겠지만,
역시 저런 걸 보면 멈출 수가 없다. 게다가 방금까지 하던 손장난도 괘씸했고.
“그런데 세레스, 네가 갑자기 울어버리니까. 나도 뭐,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
“······윽.”
끝내 이번에는 버틸 수가 없던 건지 세레스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2.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서 네토루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마력 신경계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의 기억이 그러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이렇게 멀쩡하게 정신을 차린 걸 보니 다행히 폐인이 된다거나, 그런 건 피한 것 같지만 혹시라도 마력 신경계에 이상이 생겼으면 곤란했다.
아직 여기서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마력 신경계의 점검이 끝나고 네토루는 눈을 떠보았다.
네토루 입장에선 그냥 평소처럼 평범하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현실은 제법 시간이 많이 흐른 듯했다. 덕분에 네토루도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루동안 계속 자고 있었다고?”
“···정확히는 혼수상태였죠.”
어느새인가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레스가 그리 대답했다. 방금까지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어딘가 새침한 표정만 하고 있을 뿐.
아무래도 방금 전에 너무 장난이 심했나 보다. 화났다는 기색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참고 있으라는 건가.
“역시 그때 꽤나 무리하기는 했나 보네.”
네토루는 세레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찌뿌둥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확실히 뭔가 잠을 잔 것치고는 몸이 무겁다 싶었는데 이래서인가.
그렇게 팔을 잡아당기며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니 옆에서 세레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 마력 신경계는 어떤가요?”
“아···. 그거 말이지.”
네토루는 심장 부근의 가슴팍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세레스가 눈가를 떨었다.
“혹시···. 몸에 뭔가 문제라도?”
“아니. 아무 문제 없어.”
“···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을까. 세레스가 멀뚱멀뚱 눈을 깜박였다. 네토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큰 문제는 없다고. 대충 보름 정도 얌전히 있으면 마력 신경계도 괜찮아질 거 같아.”
“보름? 겨우 그거면 정말 괜찮은 거 맞나요? 괜히 이번에도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도···.”
아무래도 세레스는 믿기 어려운 듯했다.
하기야. 보통 피를 토할 정도로 마력 신경계를 혹사하면 최악의 경우 폐인이 되거나, 또는 몇 달간 장시간 요양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네토루가 멀쩡하다고 말해봤자 괜히 허세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하지만 네토루의 경우 조금 달랐다. 남들보다 유독 회복하는 속도가 빠르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지니고 있는 능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회복력 덕분에 네토루는 다른 누구보다도 빠르게 강해질 수가 있었다.
자기 자신을 혹사할수록, 사선을 넘을수록,
남들이 버티지 못하고 꺾일 때 꿋꿋하게 혼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너무 걱정 마.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그거 알아요?”
말끝을 흐리던 세레스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나쁜 기억이라도 떠올린 것처럼.
“당신이 걱정하지 말라고 할 때마다 저는 항상 결과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거.”
“마음에 안 들었다고? 무슨 일 있었나?”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에 세레스는 낮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당신, 데스 웜 막으러 갈 때도 자신한테는 전부 계획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던 거, 기억 나요?”
“아. 그거 말인가.”
확실히 그때 세레스가 기겁하기는 했다. 안심시켜놓고 정작 보여준 방법이 단순무식하게 돌진해서 앞을 막은 거였으니.
“···그리고 데스 웜 죽이고, 카렌이랑 커플링하러 갈 때도 걱정 말라고 했지만, 결과는 이랬죠.”
샐쭉이 노려보는 세레스의 날카로운 시선에 네토루는 무심코 쓴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쯤 되니 세레스에게는 별로 신뢰가 안 갈 만했다. 카렌과 달리 걱정 말라고 해놓고서 대부분 좋지 않은 기억만 새겨준 것이다.
이거, 확실히 미안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네토루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해.”
“······.”
그런 네토루의 사과에 흠칫하던 세레스는 자신의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놨던 두 손을 꼬옥 쥐더니,
끝내 얕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당신. 깨어났다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어 봐요. 제가 의사 선생님 불러올 테니까요.”
“그래. 부탁할게.”
등을 돌린 세레스가 빠른 걸음으로 병실에서 나갔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계속 쳐다보던 네토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 근처의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책이 쌓여 있었다. 아마 세레스, 본인이 읽기 위해 가져온 거겠지.
“···계속 옆에 있어 준 건가?”
네토루는 호기심에 그녀가 가져온 책을 하나 집어 들어보았다. 뭘 읽나 싶어서였다.
···그래서 잠시 읽어보니.
“······흠.”
흥미롭게도 소녀들이 읽을 법한 풋풋한 느낌의 로맨스 소설이었다.
세레스는 이런 걸 어디서 가져온 걸까?
다 큰 아가씨가 말이다.
2.
“카렌. 몸은 어때?”
프라시온의 도심 어딘가.
393부대의 주둔을 위해 임시로 개조해서 사용 중인 성기병 격납고에서 아스나가 묻자, 카렌은 잠시 자신의 아랫배를 쓸어 만져보고는 대답했다.
“···전투까지는 무리여도, 다른 부대원들처럼 건물 잔해 치우는 건 가능할 거 같아요.”
생각 이상으로 카렌의 마력 신경계는 빠르게 안정된 상태였다. 하복부의 욱신거림도 어느새인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날 무리했던 건 네토루 뿐만이 아니었다.
카렌 역시 격렬한 전투로 인해 마력 신경계에 어느 정도 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그 후유증이 적었다.
···역시 이건 그 전투에서 녀석이 손을 쓴 걸까.
솔직히 말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츠오를 구할 때, 네토루가 마력 방출을 사용하기 위해 몸 안에 있던 마력 신경계를 건든 듯했다.
도대체 뭔 방법을 사용한 건지 모르겠지만 카렌은 그 녀석의 손길이 닿아 있는 마력 신경계를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남의 몸에 이렇게 허락도 없이 맘대로 손을 대는 것도 녀석답다···.
그런 점에서 카렌에게 오버 히트보다도 제일 큰 문제는 갑자기 구조가 바뀌어버린 마력 신경계의 설계였다. 덕분에 하룻밤 동안 갑자기 바뀐 자신의 마력 신경계를 관조하느라 꽤나 고생해야만 했다.
“아무튼,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네.”
“일손이 많이 모자라기는 한가 보네요?”
“뭐···. 사실 급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성기병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으니까. 그런데 너, 혹시 아직도 나츠오랑 화해 안 한 거야?”
“음···. 그게 말이죠···.”
카렌은 아스나의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서먹서먹한 상태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인간관계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시민들을 돕는 걸 꺼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답하기 뭐 했던 카렌은 애써 이야기를 바꾸었다.
“그런데 나츠오는 괜찮대요? 그 녀석도 아직 몸 상태가 좋지는 않을 텐데···.”
비록 지금은 잠시 서먹서먹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괜히 나츠오가 무리해서 몸을 다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아. 그건···.”
“걱정 마. 나는 괜찮으니까.”
그런데 그때 그 의문에 답한 건 아스나가 아니었다. 어느새인가 타이밍 좋게 나타난 나츠오가 자신감 있게 대답하였다.
카렌은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깜박이며 멈칫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하룻 밤사이에 나츠오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는 건 착각일까.
그러한 의문 속에서.
“···카렌. 어제 일은 미안했어.”
“엣? 자, 잠시만!?”
갑자기 나츠오는 카렌의 몸을 껴안으며 말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민트람쥐님, 커피님, Newby님 후원 감사합니다.
삽화 후원자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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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흐. 드디어 린과 란의 일러가 진행될 거 같습니다.
이번 삽화는 13화에서 세레스가 몸 푸는 장면입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