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84화 (84/148)

EP.84 프라시온

생각 이상으로 전투는 허무하게 끝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려나.

“···이거, 엄청 화려하게 싸워댔구만.”

칼라일은 폐허로 변한 길거리를 보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만 해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던 도시의 전경이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병원에서 보았던 그 평화로운 모습은 이제 없다.

전투가 끝나고 이곳에 남은 것은 무수한 버그들의 시체와 무너진 건물들뿐. 포탄이 얻어맞은 곳에서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씁쓸한 표정으로 도시를 둘러보던 칼라일의 시선은 이윽고 근처에서 기동이 멈춘 새하얀 성기병에서 멈추었다.

네토루라고 했던가.

“···생각 이상으로 괴물 같은 자식이었군.”

세컨드를 두겠다고 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칼라일은 반쯤 질린 듯한 눈으로 움직임을 잃은 성기병을 응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없었다면 이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버그들에게 학살당했겠지.

그나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시민들이 지하에 있는 대피소로 대피할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혼자서 몇 마리나 처리한 것인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길거리에 널려 있던 버그의 시체만 보더라도 얼핏 알 수 있다. 얼마나 혼자서 격렬하게 싸웠는지 말이다. 예전에 몇 번 보았던 그 재수 없는 기사들도 저러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칼라일은 너덜너덜한 상태가 된 새하얀 성기병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카렌의 성기병한테 구해진 나츠오한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뭔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하염없이 새하얀 성기병을 응시하고 있었다.

2.

나츠오를 구하는 즉시 네토루는 곧바로 버그들을 피해 도망쳤다. 다행히 추적은 없었다. 상황을 인식한 다른 성기병들이 곧바로 도와주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도시 전역에서 차츰차츰 버그들이 소탕되고,

전투가 끝나자.

이윽고 성기병의 기동이 멈추었다. 그 순간 커넥팅이 끊기고, 커플링이 강제로 풀렸다. 카렌은 조종석에서 숨을 헐떡이며 몸을 구부렸다.

“흐읏···!”

몸이 이상하다. 뜨겁고 욱신거린다. 저릿한 아랫배의 감각에 카렌은 허벅지를 비비적거리며 쾌락에 잠긴 신음 소리를 흘렸다.

숨을 토해낼 때마다 온몸에 잔류하고 있는 정체 모를 감각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분명 커플링이 풀렸음에도 네토루의 마력이 몸 안에서 선명하게 느껴진다. 마력 신경계가 마치 그의 것에 잠식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활성화된 마력 신경계가 계속해서 네토루의 마력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건 오버히트가 아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

뭐야···. 도대체 네토루가 내 몸에 뭘 한 거지.

카렌은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하지만 기억이 나는 게 없다. 단지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쾌락이 마력 신경계를 째릿 울렸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

“하악···. 하윽···. 이거, 뭐야···.”

아픔은 없지만, 너무 강한 자극 때문에 이제는 되려 괴롭다. 계속해서 몸이 움찔거리던 카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걸 어떻게 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네토루···?”

그러나 네토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쾌락에 잠긴 채 붉은 복숭앗빛을 띠고 있던 카렌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혈색이 사라졌다.

어느새인가 네토루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조종석에 기대고 있는 그의 입가에서 흐르는 선혈이 턱밑을 따라 계속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 모습에 카렌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끼며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저, 정신 차려! 네토루!”

하지만 네토루는 대답이 없었다. 정말로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인지, 몸을 흔들 때마다 입안에서 흐르는 핏물만이 그 양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손이 그의 핏물로 완전히 얼룩지고 나서야 카렌은 그제야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았다.

지금은 이렇게 허둥지둥할 때가 아니다.

심상치 않은 네토루의 상태에 카렌은 곧바로 리엔을 호출했다. 마침 리엔도 관측을 통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 있던 걸까. 리엔의 대응은 신속했다.

─···지금 당장 성기병을 보내 이송 준비를 하겠습니다.

“빠, 빨리! 부탁드립니다! 이, 이녀석···. 정말 이러다가···.”

카렌이 아는 네토루는 언제나 유유자적한 사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반쯤 농담을 하듯이 괜찮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엇인가.

입 밖으로 토해지고 있는 대량의 피도 그렇고,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는 나약한 숨소리도 그렇고···.

“······멍청이. 왜 이렇게 무리를 한 건데.”

끝내 카렌은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내린 눈물이 흐릿하게 시야를 가렸다.

당장이라도 네토루가 눈을 뜨며 늘 그랬던 것처럼 뻔뻔한 얼굴로 괜찮다고 말해주면 좋겠지만,

마력 탈진이라는 건 가볍게 여길 부상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마력 신경계가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며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 수 있는 증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네토루는 마지막까지 무리한 것이다.

이렇게 몸을 혹사했다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그는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자기가 했던 말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정말···. 싫어···. 항상 걱정 말라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낼 때마다 울컥하는 감정이 샘솟았다. 항상 삐딱한 척하면서도 왜 이렇게 사람이 이러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 녀석은 언제나 늘 그랬다. 뻔뻔스럽게 말하고, 항상 자신이 하는 말을 지켰다. 보면 누구보다도 사람을 챙기고 있었다.

덕분에 카렌은 두려워졌다. 이대로 네토루가 정말 어떻게 되는 게 아닐지.

─···카렌. 콕피트 좀 열어주겠어?

그때 외부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챈들러의 목소리였다. 카렌은 곧바로 콕피트를 열고서, 조종석에 누워있는 네토루를 끌어내리며 어깨로 부축했다.

축 늘어지며 몸을 맡겨오는 그의 무게감에 카렌은 온몸이 떨려왔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몸이 유독 차갑고 딱딱한 것만 같았다.

이건 마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카렌은 애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며 콕피트 밖으로 나왔다.

이윽고 그렇게 밖에서 대기하던 챈들러의 파트너, 아카네의 성기병이 내밀고 있는 손 위에 올라탈 때였다.

그 순간 카렌의 발목을 붙잡는 소년의 목소리가 있었다.

“···카렌.”

“······”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카렌은 잠시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힘없는 얼굴로 나츠오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걱정 어린 눈이었다. 그리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언제나 열정 넘치고, 자신감 넘치던 소년의 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츠오를 보며 카렌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 순간 온갖 감정이 들꿇었다.

그것은 원망과 한심함이었다.

“······나츠오.”

카렌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게 말하고 싶은 건 많다. 꾸짖고, 왕창 화를 내고 싶었다.

왜 대피소로 가지 않고 하필 그때 시계탑 위에서 그렇게 멍청히 서 있었단 말인가.

왜 이렇게 네토루를 무리를 하게 만든 걸까.

안 그래도 오늘 누구보다도 제일 많이 고생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헌신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네토루가 아니었으면 시민들은 대피소로 가기도 채 전에 버그들에게 짓밟혔을 것이다.

그런 그의 노력을 나츠오는 과연 알고 있을까.

소리 없는 시선의 교환 속에서.

끝내 나츠오가 먼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카렌···. 그러니까···. 나는···!”

“시끄러워···. 지금 네가 나한테 어떤 변명을 해도 화를 참지 못할 거 같으니까.”

감정을 떠나 카렌에게는 나츠오의 변명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 급한 것은 사고를 일으킨 나츠오가 아닌, 의식을 잃은 네토루였다.

그렇기에 카렌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츠오를 흘겨보고는 아카네의 성기병에 올라탔다.

그 순간 나츠오가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지만,

카렌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3.

언제였을까. 그것은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인.

이제는 흐릿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예전에 그는 삼촌을 따라 애니메이션을 하나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제목은 까먹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머리한 쪽으로 깊숙하게 남아 있다.

흔하기 흔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파일럿으로 선택받아,

자신이 살던 도시에서 커다란 로봇을 타고 웬 정체 모를 괴물들과 싸우는 내용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재밌는 내용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는커녕 답답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흔히 고구마가 잔뜩 낀 내용이었다.

개연성을 위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파일럿이 된 주인공은 흔한 고등학생답게 평범했고, 미숙했다. 게다가 사춘기 소년의 그것처럼 감정적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것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선명한 건, 아마 그때 느꼈던 답답함이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대충 이해는 된다.

그때 보았던 주인공처럼 어느 날 갑자기 뭣도 모른 채 병기를 타고 싸우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그리고 그 결과가 만들어낸 참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말이다.

“······”

그날, 나는 지옥을 보았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지옥을 말이다.

시선을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뿐. 잠시나마 버그들에게 점령당했던 도시의 풍경은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어서, 지독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 사람도 실수하면 안 되는 중요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커다란 실수를 해버렸다.

무서워서, 죽기 싫어서 주저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내 미숙함이 만들어낸 지옥.

비록 어느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미숙해도, 운 좋게 일이 끝날지 몰라도 내가 있는 곳은 포탄과 총탄이 날아다니는 진짜 전쟁터였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미숙함 곧 죄악인 곳.

그러한 내 죄를 확인하듯 나는 도시 안을 돌아다녔다. 원망 어린 부대원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처참하게 변한 도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이 닿는 모든 곳에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의 상처들은 계속해서 도시 곳곳에 불길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디를 가도 사람과 버그들이 타는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찌르고 들어왔다.

구역질이 난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끝없이 세력을 넓혀가는 불길이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도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죄를 확인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사실 이대로 불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죄가 이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확인할수록 가슴이 짓뭉개지는 아픔이 있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손과 다리가 떨린다.

이윽고 그러한 떨림은 곧 목구멍까지 이어져 숨을 쉬는 것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쌓은 죄에 억눌려 이대로 질식할 것만 같다.

사람인지, 버그인지 주인을 알 수 없는 핏물이 흘러 다니는 길가도, 점점 도시 전역에서 넓게 퍼지는 거대한 불길도,

그 순간은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저주하는 것처럼 시야를 붉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나를 꾸짖는 듯한 기분 나쁜 붉은색뿐이다.

그러다가 끝내 그 새빨간 색에 지쳐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뚝. 하고 볼 옆으로 스치는 차가움이 있었으니까.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이 보였다.

그렇게 시선이 닿기 무섭게 하늘에서는 빗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다행이었다. 비라도 내리면 도시를 태우고 있는 불길이 그나마 잠잠해질 테니까. 그러면 나를 꾸짖는 듯한 이 새빨간 풍경도 사라지겠지.

그 사실에 안도하듯,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저벅저벅

어디선가 작은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돌연 우산으로 뿌옇던 하늘을 가려주었다. 이윽고 뒤에서 누군가 넌지시 물었다.

“···오빠. 울어요?”

그것은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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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백수 일러레님한테 일러 2장 외주 부탁했습니다!

H씬 부탁드렸는데, 흐음. 조금 일이 밀리셔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하네요!

원래 기존에 있던 일러레님한테 부탁하려 했는데, 노골적인 성관계 그림은 잘 못그리신다고 하네요!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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