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83화 (83/148)

EP.83 프라시온

1.

심장이 아프다. 끊임없이 카렌의 몸 안에 흘러가는 마력의 압박이 심장을 쥐어 짜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네토루는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도 카렌의 조정간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맛이 되려 네토루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혀주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건 익숙하다.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냉철함 뿐.

‘···이 상태로 저걸 전부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피로한 탓일까. 흐릿한 시야 속에서 네토루는 시계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버그들을 노려보았다.

나츠오, 저 꼬맹이를 둘러싼 스파이더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몸 상태가 이래서는 저걸 혼자서 전부 처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 녀석들이 노리는 건 나다.

그러니 만약 무시하고 도망가면 녀석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뻔했다. 가치가 없어진 인질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처분하겠지.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가 그리는 미래의 계획을 생각하면 나츠오는 불편한 존재였다. 어떻게 보면 이대로 없어 주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욕심 때문에 죽음을 방관할 생각은 없다.

나츠오, 저 꼬맹이가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니었으니까.

이건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사람을 구하는데 개인의 욕망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그날 했던 각오가 의미 없게 된다.

그러니 이건 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

그렇기에 네토루는 망설임 없이 나츠오가 있는 곳을 향해 성기병을 움직였다.

적들의 숫자는 많고, 이길 수 없는 상태라면.

여기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츠오 저 녀석만 빠르게 구하고서 전장을 이탈하고, 나머지는 다른 부대원들에게 맡길 수밖에.

다만 그 방법이 문제다.

이미 사격 준비를 끝낸 버그들을 돌파하고 나츠오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카렌. 지금부터 마력 방출을 사용할 거야. 그리고 이대로 단번에 돌파해서 나츠오를 구할 거고.”

“으응? 마력 방출? 자, 잠시만···. 나, 아직 마력 방출 사용 못 해! 내 마력 신경계가 아직 거기까지 완성되지가 않았는데···!?”

“걱정 마. 네 몸을 확인해보니까 마력 방출을 사용할 기반은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는 상태니까.”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다고··· 흐윽!?”

네토루는 카렌의 조정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미안하지만 그녀를 설득할 시간은 없다. 이미 다수의 스파이더들이 이쪽을 향해 포구를 조준하고 있었다.

······의식을 집중한다.

그 순간 뇌리에 그리는 것은 카렌의 몸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마력 신경 다발과 그러한 선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형태를 이루는 마력 신경계였다.

자궁이 위치한, 카렌의 하복부.

그곳에는 수많은 마력 신경들이 엉키고, 설켜 성기병을 움직이기 위한 설계도가 존재했다.

네토루는 그러한 그녀의 설계도에 접속했다.

확실히 카렌의 설계도는 세레스의 것에 비하면 미숙하기 짝이 없다. 완숙한 여인의 것과는 거리가 먼 소녀의 몸.

하지만 마력 방출을 사용하기 위한 기반은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다.

이건 카렌이 평소에 마력 신경계 구축에 매일 같이 힘써왔다는 증거이겠지.

단지 마무리가 부족할 뿐이었다.

“네, 네토루···? 지금 내 몸에 뭘 하고 있는 거야?”

“카렌. 나를 믿고 마력을 받아들여.”

“아니, 믿는데···. 하읏! 지금 네 마력이···. 으읏! 하앙! 이러면···. 으으윽! 커넥팅에 집중할 수가···!”

조종석 위에서 카렌이 비명과 함께 안타까운 몸짓을 그리며 흐트러졌다. 그렇지만 네토루는 그녀와 연결된 마력 패스를 더욱 확장시키며, 그녀의 자궁 안쪽까지 자신의 마력을 새겨넣었다.

그것은 성기병의 출력을 높이기 위한 과정 따위가 아니었다.

마력 패스의 주도권을 빼앗는 걸 넘어, 그녀의 몸 안에 있는 마력 신경계를 점거하는 과정이었다.

카렌이 사용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

부족한 부분은, 내가 메꿔주면 된다.

───끼이익!

그때 스파이더들이 조준을 끝낸 듯 포탑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기다란 포구가 이쪽을 향하더니 짙은 어둠을 품은 채 노려보고 있었다.

거리는 앞으로 대략 50m.

스파이더들의 일제 포격을 피하기에는 이제 너무 가까워진 거리. 그러니 피하기에는 늦었다.

포격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1초도 안 되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네토루는 달리던 카렌의 성기병을 멈추지 않고 올곧게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아앙!

그렇게 조준이 끝난 포구에서 불꽃이 뿜어지고,

그와 동시에 네토루는 접속해 있던 카렌의 마력 신경계를 그가 원하는 형태로 강제로 비틀어 꺾었다.

“······으윽!?”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감각 때문일까. 카렌이 참다못해 온몸을 비틀더니, 고개를 쳐들며 미지의 감각에 저항하듯 소리 없이 울었다.

붉게 물든 목덜미. 뻣뻣해진 허벅지와 다리.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등줄기까지.

그리고 그 순간 카렌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아픔과는 거리가 먼, 쾌락에 잠긴 표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카렌의 마력 신경계는 지금껏 도달한 적 없는 형태를 이루며 완전히 활성화되어 있었다.

비록 그것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네토루의 마력으로 인해 강제로 완성된 형태라고 하지만,

그렇게 처음으로 카렌이 해낸 마력 방출은,

불안전하지만, 차분하면서도 단아한 색이었다.

마력은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준다고 하던가.

성기병을 감싸며 주변을 둘러싸는 마력은 정말로 카렌을 닮은, 아름다운 색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색을 구경할 수 있던 것도 잠시뿐.

무리한 능력의 사용으로 시야가 일그러진다.

아니, 일그러지는 걸 넘어 시각 그 자체가 부서진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시각을 잃어도, 머릿속에 새겨진 풍경만으로도 움직이는 건 문제가 없었으니까.

이윽고 바로 코앞까지 도달했던 무수한 포탄들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벽 따위에 막히며 일그러졌고,

네토루는 그 힘에 의지한 채 땅을 박찼다.

2.

끼이익─ 쿠우우웅!

스파이더 특유의 관절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츠오는 간신히 뭉툭 튀어나온 시계탑의 일부를 붙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추락하면 죽는다. 아무리 단련된 파일럿의 몸이라고 해도 이 정도 높이의 건물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목숨의 위험 속에서.

나츠오는 두려움보다는 혼란을 느꼈다.

“······이 녀석들, 뭐야.”

갑자기 스파이더가 시계탑을 조준했을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포탄이 명중한 곳은 엉뚱하게도 시계탑의 옆면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히 빗맞은 것일까.

아니면 노리고 쏜 것일까.

그 답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츠오는 당장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스파이더들이 시계탑 주변에 밀집하며 방어 진형을 형성하는 게 보였다.

순간 몇 놈들과 눈이 마주쳤지만, 녀석들은 공격하지 않고 빤히 지켜보는 모양새였다. 감시하는 듯한 불그스름한 스파이더들의 눈동자를 보며 나츠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녀석들 설마.

“···나를 미끼로 하고 있는 건가?

버그들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버그들이 이렇게 지능적으로 움직인다고?

그러면 나를 미끼로 해서 무엇을 할 생각인가.

그것 역시 뻔한 답이었다. 버그들은 지금 카렌의 성기병을 노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전투 내내 노골적으로 카렌의 성기병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최악이다. 이건 너무 최악이었다.

‘···나 때문에.’

나츠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카렌의 성기병을 보며 강한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지금 내가 뭐한 거지.

어서 대피소로 향했어야 했는데. 성기병도 타지 않는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아니···.

이런 나를 보고 카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일까.

“···안 돼. 오지마, 카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츠오가 외쳤다. 그는 이런 식으로 카렌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외침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끝내 새하얀 성기병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고.

───키이이익!?

거기서 나츠오는 보았다.

밀집해 있던 여러 스파이더들이 카렌의 성기병을 향해 일제 포격을 날리는 것을 말이다.

───쿠루루룽!

이윽고 폭음이 빗발치고, 건물들이 무너진다. 소리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

폭풍이 휘몰아친다. 검은 연기가 미친 듯이 치솟았고, 무너진 건물 잔해 따위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어디선가 깨진 무수한 유리 조각들이 폭풍에 실리며 허공을 떠돌아 댕겼다.

나츠오는 그 모습을 보고서 눈가를 파르륵 떨었다.

아니야. 나는 이런 걸 원했던 게···.

지상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모퉁이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릴 것만 같다.

호흡이 가팔라지고 맥박이 빨라진다. 이 순간에도 여전히 멈추지 않는 스파이더의 포성에 고막이 아파왔다. 검은 연기 속에서 포탄이 계속 처박힐 때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눈이 침침해지는 듯한 분노가, 머릿속을 시꺼멓게 빈틈없이 칠해간다. 그것은 뼈 깊숙이 스며드는 죄책감과 자괴감에서 비롯된 분노였다.

“아니야.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몇 번이나 반복하던 중얼거림.

하지만 무의미한 넋두리였다.

이런다고 내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윽고 스파이더의 포성이 멈추자 쿵쾅쿵쾅 뛰던 나츠오의 심장이 멎고, 몸에 흐르던 떨림도 사그라졌다.

마치 속 빈 인형처럼 나츠오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했고,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완전히 타버린 재와 같은 텅 빈 얼굴뿐이었다.

지금 나 때문에 카렌이··. 죽은 건가?

내가 지켜줘야 할 아이가, 나 때문에 무리하다가···.

이런 건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럴 바에 깔끔하게 스파이더의 포격에 맞고 죽는 게 낫다.

그 사실에 절망한 나츠오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건물 모퉁이를 손에서 놓은 채 중력에 몸을 맡기었다.

바람이 온몸을 껴안고, 하늘이 빠르게 멀어진다.

마침 그와 동시에 위태롭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시계탑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자신의 죽음을 환영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꼬맹이가, 마지막까지 귀찮게 하고 있어.

믿기 어렵게도,

검은 연기 속에서 너덜너덜한 상태의 새하얀 성기병이 몸을 꺼내며 나츠오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착각일까.

나츠오는 성기병 안에서 피를 토하며 피식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건 마치 구할 수 있어서 안도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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