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2 프라시온
전투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계탑 위에서 계속 전장을 내려다보던 나츠오는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인가 하염없이 전투를 구경하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런 걸 보게 되면 기가 꺾이지 않을 수가 없다.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투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 누가 보더라도 나츠오와 비교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카렌의 성기병을 다루는 조종 실력도, 출력도, 상황 판단도,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다.
게다가 카렌의 성기병을 오랫동안 조종했던 나츠오다. 덕분에 지금 저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전투를 하고 있는지 더욱 잘 알 수밖에 없었다.
혹시 소문으로만 듣던 기사 출신인 걸까?
아무튼, 좋다. 나츠오는 복잡한 눈초리로 남자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나츠오는 그의 전투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저것이야말로 자신이 도달하고 싶어 하던 도착지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앞을 헤쳐나갈 수 있는 압도적인 강함.
나츠오는 그런 힘을 원했다. 저 남자처럼 버그들을 압도하는 실력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츠오는 저 남자의 강함이 부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왜 하필 저런 대단한 남자가 카렌과 커플링을 하고 있는 걸까.
경외할만한 실력이지만, 그럴수록 목을 조여오는 것처럼 숨이 탁 막혀왔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녀석이 현재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인가.”
입술에서 피 맛이 난다.
카렌의 성기병이 버그들을 해치울 때마다 그의 가슴 안쪽에 스며드는 것은 초조함과 두려움이었다.
그럴 수밖에.
저런 수준의 파일럿이 있는데 과연 내가 부대에 복귀한다고 다시 원래처럼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
리엔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분명 카렌과 저 남자를 계속 커플로 놔둘 것이다. 그것이 부대 전력에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이건 단순히 감정적으로 다가설 영역이 아니다.
사령관이라면 부대원들을 위해서라도 저 남자를 기용하겠지.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렇게 되면 나는 누구랑 커플링 해야 하는 건가.
설마 이대로 부대에 복귀하면 카렌이 아니라 다른 부대원하고 커플링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그런 건 싫다. 절대로 싫다.
카렌을 다른 남자에게 주기는 싫다. 그 녀석의 커플링 파트너는 오로지 나뿐이다.
나츠오는 그제야 애써 부정하고 있던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기관에서부터 좋아하고 있던 아이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커플링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애초에 카렌이 저 남자를 믿는다고 말한 것도 싫었다.
카렌의 믿음도, 상냥함도, 시선도··· 모두.
오롯이 나한테만···. 향하면 좋을 텐데.
나츠오는 카렌이 계속 자신을 봐주기를 원했다. 언제나 기관에서 함께했던 것처럼 말이다. 옛날부터 그녀의 옆에 있던 건 항상 나츠오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스스로 생각해봐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애 같은 감정들이 서서히 피어오르는 가운데,
이윽고 도시 끝자락에서부터 낯선 형태의 성기병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른 부대의 성기병들이었다.
아무래도 드디어 지원 병력이 도착한 듯하다.
조금 늦었지만, 어쨌든 이걸로 전투는 무사히 끝나겠지. 그 사실에 나츠오는 안도했다.
아니, 정확히는.
오늘은 카렌이 더 이상 저 남자와 커플링해서 버그들과 싸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저 두 사람이 서로 호흡을 맞추며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끼이이익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오싹한 살기에 흠칫 놀란 나츠오는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때마침 갑자기 멀리 있던 스파이더 하나가 몸을 틀고는 이쪽으로 포구를 조준하는 게 보였다.
갑자기 이곳을 어째서?
그러한 의문이 들기 무섭게.
이윽고 스파이더의 포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2.
겁도 없는 인간이었다. 조금만 잘못되어도 그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치에서 한가롭게 전투를 구경하고 있다니. 그게 신기했던 괴물은 이름 모를 소년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하였다.
왠지 모르지만, 소년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지금 도시 안에서 싸우고 있는 새하얀 성기병이 위험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관찰하면 할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초조한 얼굴 뒤편으로 엿보이는 건 인간 특유의 거무칙칙하기 짝이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괴물은 알고 있다. 저것이 무언가를 질투하는 눈과 닮았다는 걸 말이다.
그동안 괴물은 자기들끼리 생각과 성향이 맞지 않다면서, 서로 시기하며 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지금 소년은 그러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괴물은 궁금해졌다.
어째서인가.
왜 저 소년은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거지.
저 새하얀 성기병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아쉽게도, 괴물은 거기까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단지 경험을 통해 추론하고 있을 뿐. 인간의 머리는 괴물이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다만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3.
의식이 흐릿하다. 피부와 공기의 경계선이 완전히 무너지며, 이제 곧 허공에 녹아 버릴 것 같은 감각이 카렌을 괴롭혔다.
지금까지 몇 마리나 되는 스파이더를 죽인 걸까?
30? 40?
아니, 그 이상이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많이 죽인 건 분명했다. 사실상 혼자서 소대 두세 개 분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 녀석들···! 정말 우리는 그냥 무시하고 네토루만 노릴 생각인가!
─카렌 언니! 괜찮아요!?
챈들러와 다른 부대원들이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지만, 버그들은 그런 그들을 무시하며 노골적으로 카렌과 네토루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아··· 하읏···.”
숨을 쉬는 게 괴롭다. 계속된 기동에 마력 신경계가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네토루의 마력을 몸 안에 담을 때마다 아랫배가 비명을 지르며 욱신거렸다.
─···방금 지원 병력이 도시 외곽에 도착했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이쪽의 상황을 계속 관측하고 있던 건지 리엔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카렌은 그 소식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없었다.
······정말이지.
버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집중 공격을 당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렌은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주변을 확인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버그들이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동료들의 시체를 망설임 없이 짓밟으며 말이다. 정말 지긋지긋한 녀석들이 아닐 수가 없다.
아무리 죽여도 끝도 없이 밀려오는 녀석들의 공세에 카렌도 이제는 초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제 이쪽은 한계다.
그렇지만 카렌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나약함을 억눌렀다.
이럴 때는 네토루만 믿으면 된다.
그라면 여느 때처럼 이런 위기도 분명 아무렇지 않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한 달간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카렌에게 그러한 믿음을 가지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하아···. 흐윽···. 네토루. 지원 병력이 왔대”
“···아. 방금 들었어.”
“좋아···. 우리······.”
그대로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말하려던 카렌이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말하면서도 무언가 꺼림칙한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며, 두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너.”
네토루의 안색이 좋지 않다. 안 그래도 황량한 그의 눈동자가 더욱 메마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문득 눈이 마주친 그가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렌. 전투에 집중해. 아직 안 끝났으니까.”
“야···. 자, 잠시만···. 으윽!”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신경 쓰지 말라고 꾸짖듯 네토루가 조정간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카렌은 그런 그의 요구에 따라줄 수가 없었다. 방금 그걸 보고도 어떻게 집중하라는 걸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네토루의 입가에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제법 시간이 된 것인지 슈트의 목덜미 부근이 검으면서도 새빨갛다. 피가 굳기 무섭게, 새로운 핏물이 색을 칠하고 있던 것이다.
카렌은 이 증세를 알고 있다. 이건 마력 탈진이다.
그것도 이렇게 피를 토할 정도면···. 적어도 가볍게 여길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 녀석은 지금 얼마나 무리해서 싸우고 있는 거지?
“걱정 마.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는 충분히 버티니까.”
그런데도 이와중에도 이 녀석은 나를 애취급한다.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여느 때처럼 뻔뻔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제야 카렌은 자신이 방금까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 버그들의 전진을 막았고,
엄청난 마력을 잡아먹는 성병기로 데스 웜을 해치웠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스파이더로 구성된 버그 무리와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뻗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투의 연속이었다.
네토루, 이 녀석은 분명 대단한 파일럿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혼자서 다 해치울 수 있는 완벽한 초인은 아니었다.
결국, 이 녀석 역시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네토루는 결코 멈춰서지 않았다.
걱정 말라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계속해서 덤벼드는 버그들과 싸워 물리쳤다.
그렇게 또다시 버그들의 시체가 쌓여간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성기병의 출력을 전혀 낮추기는커녕 오히려 더 맹렬해졌다.
카렌은 당장 그에게 조금만 몸을 아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커플링을 통해 그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으니까. 그렇기에 이 순간 카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하나였다.
마지막까지 네토루를 믿고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그가 밀어 넣는 마력을 몸 안에 가득 담고, 어떻게든 성기병의 동력으로 이끌어낸다.
그렇게 끝없는 싸움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이윽고.
─···도대체 혼자서 몇 마리나 죽인 거야. 이제부터 우리가 상대할 테니까 뒤로 빠져 있어.
칼칼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거듭해서 덤벼들던 스파이더의 포위망을 뚫고서 성기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다른 부대의 성기병이 이곳에 도착한 곳이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혹시 칼라일, 그 남자인가?
어쨌든, 아무래도 좋다.
네토루도 이제는 한계인지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 무섭게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끈질기게 따라붙던 버그들도 다른 성기병들이 막아서자 더 이상 따라오지를 못했다.
“···이거, 오늘은 꽤나 무리했는 걸.”
“너··· 괜찮은 거야?”
“글쎄···. 솔직히 안 괜찮을지도.”
카렌은 힘없는 네토루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속상했다. 언제 이렇게 이 녀석이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실제로도 카렌은 몸 안에 들어오는 그의 마력이 그 어느 때보다 빈약해진 것을 느꼈다. 하복부를 꽉 채워 누르던 압박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성기병의 출력을 최저로 낮춘 채 서서히 후방으로 빠지고 있을 때였다.
────쾅!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포성이 울렸다.
설마 스파이더가 쫓아온 건가 싶어 카렌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스파이더의 포격이 향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은 제법 먼 거리에 있는 시계탑이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카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까.
버그들이 왜 갑자기 저기를 공격한 거지.
순간 그러한 의문이 들던 찰나였다.
“흐윽!?”
카렌은 갑자기 조정간을 잡아당기는 네토루의 난폭한 조종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 미약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마력이 하복부를 깊숙이 채우기 시작했다.
“네, 네토루···? 가, 갑자기 왜!?”
“···시계탑 위를 봐.”
“······?”
시계탑 위를 보라고?
그의 말에 따라 카렌은 시계탑을 자세히 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곧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나츠오가 왜 저기에 있는 거야?’
반쯤 무너져 내린 시계탑 위로 나츠오가 지상에 떨어지지 않게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나츠오의 주변으로 버그들이 촘촘하게 진을 형성하며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건 누가봐도 나츠오를 인질로 삼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렇기에 카렌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은 지금 도망치려는 네토루를 나츠오를 미끼로 하여 다시 부르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걸 네토루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망설임 없이 나츠오를 향해 달리면서도 그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나직이 말했다.
“저 녀석이 왜 대피소에 안 있고, 저기서 알짱거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가 강하게 조정간을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커플링을 통해 그의 생각과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카렌. 아까 우리 분명 약속했지.”
정작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마치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그 뚜렷한 의지에.
“나츠오, 저 녀석은 내가 어떻게든 지켜주겠다고.”
카렌은 가슴 안쪽으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그것은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두근거리는 무언가였다.
“···응. 믿고 있어.”
카렌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민트람쥐님, 연초님 후원 감사합니다
린과 란 일러스트 후원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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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후원 질문에 대답하자면.
왕국 지도는... 여유 날 때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걸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 하하...
뭔가 사이트부터 찾아봐야겠네요.
그리고 이번 그림은 저번에 네토루 그려주신 분한테 따로 외주를 맡긴 겁니다. 아직 미완성이고요! 매우 기대중입니다. 참고로 이건 세레스, 카렌 성기병이 아닌 예전에 과거에 탔던 다른 성기병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원래 진행하던 카렌& 성기병 표지는 거의 다 완성된 것 같은데, 음. 빠른 시일내에 보이겠습니다.
이게 어서 완성되어야 린&란 일러스트를 진행하는데요 ㅜㅜ
8/08 2340 일러 수정 했습니다~ 아직 미완성이니까 완성되면 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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