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8 프라시온
새하얀 성기병이 숲을 가로지르며 매섭게 달렸다. 주변의 배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네토루는 카렌의 조정간을 강하게 쥐고서 출력을 높였다.
그러자 성기병이 땅을 박차기 무섭게 카렌이 신음을 흘리며 표정을 찡그렸다.
“···읏! 네토루, 급한 건 알지만 조금만 살살해. 이렇게 마력 패스를 넓히면 내가 못 버틴다고.”
“아···. 미안.”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설마 지금 세레스랑 나랑 착각한 건 아니지?”
“···물론, 아니지.”
역시 눈치가 빠른 아이다. 날카로운 카렌의 지적에 네토루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카렌의 생각은 맞았다.
하도 두 사람의 마력 용량과 마력 연소율이 차이 나다 보니 조금 실수하고 말았다.
···역시 여기사랑 평범한 기관 출신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며칠간 세레스하고만 커플링을 했더니 확실히 기량의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이제 카렌의 마력 신경계는 이미 거의 다 분석이 끝난 상태다. 그러니 그녀의 마력 신경계를 네토루의 입맛대로 조교하면 그만이었다. 카렌의 색과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점에서 네토루의 현재 목표는 하나였다.
···카렌의 마력 신경계를 기사의 것에 가깝게 탈바꿈시키는 것. 이건 네토루가 세레스의 마력 신경계를 분석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미래의 계획일 뿐. 네토루는 일단 지금 눈앞에 있는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네토루는 무의식적으로 무리하게 확장했던 카렌의 마력 패스를 서서히 줄이기 시작했다.
카렌을 세레스의 수준에 맞춰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그녀의 마력 패스가 삽입되는 마력량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질 터.
그래도 다행히 카렌의 마력 신경계에 밀어 넣는 마력량이 줄었음에도, 성기병의 기동 능력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카렌. 매번 생각하는 건데 너, 가볍네.”
“흐윽···. 으응···? 지금, 그거 칭찬이야?”
“물론, 칭찬이야.”
카렌은 세레스의 성기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렵했다. 그 덕분에 몸의 부담이 덜할 정도였다. 네토루한테는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몸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역시 너무 무리했나.’
카렌에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네토루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손 따위가 심장을 강하게 조이는 듯한 아픔이 아까부터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건 무리하게 성병기를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역시 그런 낮은 일치율로 성병기를 사용하는 건 꽤나 몸에 부담이 많이 되는 듯했다. 마력도 생각 이상으로 많이 사용해버렸다.
이 순간에도 과도한 마력 사용의 여파로 마력 신경계가 찌릿하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성병기를 사용할 때 세레스와 일치율이 낮았던 탓에, 그 부족함을 마력으로 커버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아직 싸울 수 있다.
점점 도시가 가까워진다. 네토루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런 걸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는 건 무리였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자신의 미숙함이 만들어낸 대참사.
아마 그날의 일을 잊는 건 불가능하겠지.
“···바르베르크.”
무력했던 자신을 체감할 수 있던 도시이며, 자신의 미숙함을 처음으로 저주하게 된 곳.
오래전에 버그들에게 멸망당한 도시의 풍경이 지금 눈앞에 있는 도시에 투영되며 아른거렸다.
폐허가 된 도시, 무수한 시체들.
부모를 잃어 울부짖던 아이들.
절망과 자괴감만을 안겨주었던 그 지옥 같던 풍경.
그렇지만 적어도 그때처럼 뭣도 모른 채 싸우던 시절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방금 했던 중얼거림이 들렸던 걸까. 카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토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아무것도.”
그리고 마침 그 순간 챈들러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토루! 온 건가!?
“늦었네. 미안.”
─···하. 결국, 혼자서 데스 웜을 죽여버린 건가.
“상황은 어때?”
─최악이야.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빨리 도와주면 좋겠어. 우리 정말 위태롭거든?
호쾌한 성격의 챈들러가 이렇게 흐트러져 있다니. 상황이 급하기는 한가보다. 안 그래도 도시 안쪽에서 끊임없이 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이윽고 드디어 도시 안으로 진입하자,
역시 예상대로 도시 내부는 최악이었다. 전쟁터로 변한 도시는 이미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건물 곳곳이 무너져 있고, 포탄에 두들겨 맞은 길바닥에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드문드문 사람의 시체로 예상되는 것들이 보였다.
네토루가 시체를 보면서도 확신하지 못한 건, 포탄에 맞은 탓에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기병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위력이다. 그런 게 인간을 덮친다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심지어 어떤 것은 그대로 버그에게 짓밟힌 것인지 뼈와 살이 한곳에 뭉친채 으깨져 있었다. 피와 내장이 찐득하게 흘러내리는 그 모습은,
차마 제 정신으로 볼법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던 카렌이 새파랗게 지린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째서.”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린다. 검은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그건 무언가 먼 과거를 되새기는 듯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야? 어째서? 네토루. 도대체 버그들이 우리한테 이러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왜?”
“···카렌?”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러한 의문이 들던 찰나였다.
“···음?”
그 순간 네토루는 마력 패스의 주도권이 강제로 카렌에게 넘어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네토루의 의지와 상관없이 카렌에게 마력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뭔 일이지.
지금 내가 주도권을 빼앗인 건가?
네토루가 그 사실에 당황할 때였다.
본래 자신의 한계보다도 많은 마력을 받아내면서도 힘든 기색 하나 없던 카렌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네토루에게 고했다.
“···네토루. 빨리 싸우자. 사람들이 더 죽기 전에.”
이건 또 무슨 트라우마일까.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어딘가 스위치라도 올라간 것인가. 아무래도 이 녀석 역시 뭔가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있는 듯하다.
카렌이 도대체 주도권을 어떻게 빼앗아 갔는지 모르겠지만,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조정간을 당겼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야.”
마침 저 멀리 포구에서 불을 뿜어내는 스파이더가 보이고 있었다. 적을 인식한 새하얀 성기병은 망설임 없이 검을 쥐며 땅을 박찼다.
2.
──BDW-007 소멸 확인.
──적성 개체 NTL-001이 파괴한 것으로 예상됨.
이건 조금 예상 밖이었다.
괴물은 BDW-007의 소멸을 확인하고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혼자서 그걸 이렇게 빨리 잡아낼 줄이야.
NTL-001의 전투력을 얕보고 있던 건 아니지만 이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아니, 애초에 혼자서 무리의 전진을 막던 것도 그렇고, 도저히 패턴을 읽을 수가 없다.
평소에는 냉철한 척하면서도, 때로는 말도 안 될 정도로 행동이 막무가내다. 전형적으로 제일 이해하기 힘든 인간의 유형이었다.
괴물은 NTL-001의 정보를 다시 한번 업데이트 하면서도 속으로 탄식했다.
‘이렇게 되면 본래 계획은 폐기할 수밖에 없군.’
너무 시간을 허비했다.
생각보다 도시를 점령하는 게 느리다. 갑자기 나타난 NTL-001이 앞을 막았던 탓도 있지만, 뒤늦게 따라붙은 성기병들이 끈질기게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지금쯤이면 도시를 점령하고 인간들을 전부 포로로 잡았어야 했을 터이다.
하지만 계획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졌다. 그렇기에 괴물은 다른 계획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러한 선택에 미련은 없다.
어차피 다른 군단의 일에 잠시 발을 걸치고 있었을 뿐이니까. 원래 이쪽 구역은 괴물이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다. 단지 협조를 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렇게 괴물이 두 번째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숨겨두고 있던 몸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새로운 적성 개체 확인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던 동족에게서 새로운 보고가 올라왔다. 그 순간 괴물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 받은 정보에 따르면 다른 성기병들이 이곳에 도달하려면 멀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적성 개체라고?
그러한 의문에 괴물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새로 나타난 적성 개체를 확인했다.
‘···저건.’
방금 전에 앞을 막아섰던 자색 성기병이 아니다. 하지만 NTL-001이 종종 타던 새하얀 성기병이었다. 그러니 그 순간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 뿐.
‘설마 파트너를 교체해서 따라온 것인가.’
BDW-007을 상대했으면서 저 인간은 지치지도 않은 것인가. 그러한 의문이 들기 무섭게 새하얀 성기병이 속도를 높이며 땅을 박차 달리기 시작했다.
도심을 달리던 새하얀 성기병은 순식간에 근처에 있던 스파이더들을 베어냈다. 갑자기 나타난 적성 개체한테 반응할 틈새도 없었다. 적을 인식한 순간 동족들은 이미 몸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렇게 1분 채 안 되어 외각을 점령하고 있던 스파이더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걸로 만족 못 하는 것인지 새하얀 성기병이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 그 목표는─.
괴물을 운반해주고 있던 스파이더 쪽이었다.
‘···이쪽인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새하얀 성기병이 오싹한 기운을 풍기며 또 다시 질주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도시 안에 있던 다른 성기병들과는 그 움직임을 비교할 수조차 없다.
뒤늦게 그 움직임에 반응하듯 괴물을 운반하던 스파이더가 새하얀 성기병을 향해 포구를 돌렸다.
이미 거리는 상당히 좁혀진 상태.
하지만 상관없다.
양쪽으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섰고, 그 사이의 도로 위를 올곧게 달리고 있는 성기병을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포탄을 피할 공간이나, 막을 엄폐물 따위는 없다.
그러니 그저 쏘면 그만.
스파이더는 조준이 끝나는 순간 즉시 포구에서 불을 뿜어냈다. 콰르르릉─.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도심의 도로 위를 평행하게 날아갔다.
그러나 새하얀 성기병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속도를 높이며 땅을 달렸다.
그건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맹렬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괴물처럼 보였다.
이윽고 포탄과 거리가 완전히 좁혀진 그 순간.
───서걱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던 포탄을 검으로 비스듬하게 잘라낸채, 두 동강난 포탄을 자신의 등 뒤로 날려보낸 성기병이 더욱 가속하며 검을 찌르고 들어왔다.
어처구니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것에 감탄할 여유도 없이 괴물은 동족의 몸에서 다급히 그 기다란 몸을 꺼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새하얀 성기병이 방금까지 괴물이 ‘기생’하고 있던 스파이더의 몸통에 검을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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