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6 프라시온
─────!
아무리 강철 같은 몸이라고 해도 성병기의 일격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어진 빛의 칼날은 그대로 달려오던 데스 웜의 육체를 두 개로 잘라냈다.
그 일격에 몸 안에 내장되어 있던 무수한 기계들이 박살나며 스파크와 함께 폭발했고, 육신을 이루던 피와 살점이 그 여파로 사방으로 튀었다.
이윽고 전투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숲에 남은 것은 데스 웜의 몸을 이루던 구역질 나는 살점과 강처럼 흐르는 대량의 피, 그 외 정체모를 기계들과.
날카롭게 벼려진 빛줄기가 가로지르며, 수십 미터 길이로 지상 위에 새겨진 깊고 깊은 상흔뿐이었다.
영웅 페리온이 용을 베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네토루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 풍경을 잠시 멍하니 구경하고는 세레스의 조정간에서 손을 놓았다.
조종석에 몸을 기대고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역시 성병기를 사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세레스랑 일치율을 올려두지 않았다면 중간에 의식이 나갈뻔 했을지도 모른다.
무리한 마력의 운용의 여파인 것일까. 그 순간 칼날 같은 깊은 현기증이 두개골을 열고 뇌를 콕콕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이 흐려지며 온몸에 무거운 탈력감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네토루에게는 그러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서 그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자신의 커플링 파트너부터 챙겼다.
그는 괜찮지만, 그의 파트너는 그렇지 않았으니.
“하아···. 하아···.”
괴로워 보인다. 세레스는 조종석에서 쓰러진 채 바쁘게 숨만 허덕이고 있었다. 어느새 커넥팅도 완전히 끊겨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성기병 역시 동력이 완전히 사라진 채 기동이 멈추었다.
“으윽···. 으아하···.”
한계 이상의 마력을 몸 안에 받아들인 탓일까. 커플링이 끊긴 지금도 세레스는 몸 안에 잔류하는 마력을 소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역시 오버 히트인가.
붉게 달아오른 뺨과 새하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땀 줄기. 세레스의 숨소리 안에는 괴로움을 호소하는 소리 없는 비명이 공존하고 있었다.
네토루는 바쁘게 숨을 몰아쉬는 세레스에게 사과하듯 그녀의 자색 머리카락을 쓸어만졌다. 어느새인가 습관이 된 버릇이었다.
“세레스. 몸은 어때?”
“······. 솔직히 죽을 것 같아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으읏···.”
세레스가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강하게 누르고는 그리 말했다. 그런 그녀의 예쁜 자색 눈동자에는 눈물도 글썽글썽하다.
정말이지, 또 우는 건가. 세레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네토루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몸을 자신의 조종석 안쪽으로 끌어안았다.
축 늘어진 인형처럼 세레스는 아무런 저항 없이 품속에 안기었다. 단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혹시 저번에 했던, 그걸 할 생각인가요?”
이 상태로 놔두면 세레스의 몸에 큰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왜? 싫어?”
“······”
대답은 없다. 단지 세레스를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싫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세레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미 저번에 한 번 해봤던 탓일까.
세레스는 마력 패스를 만드는 걸 자연스레 호응해주고는 먼저 혀를 낼름 입술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네토루보다 한발 빠른 딥키스였다. 덕분에 네토루는 살짝 눈을 치켜뜨고는 세레스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의도한 건 아닌 듯하다.
얼굴을 보니 세레스는 그저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성 보다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든 안정시키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
이윽고 네토루에게 안겨 있던 세레스는 반대로 네토루의 몸을 끌어안으며 자신의 품속으로 당기더니 자세를 바꾸었다. 덕분에 형세가 바뀌었다.
세레스는 불편한 자세를 고쳐잡으며 네토루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깔고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곧 호리호리한 몸과 달리 세레스의 크고 부드러운 가슴이 강하게 밀착하며, 서로 뜨거운 숨결을 교환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서로 키스에 얼마나 몰두했을까. 네토루가 세레스의 마력 신경계를 모두 진정시킬 때쯤 되어서야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오버 히트 때문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부끄러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반쯤 공주안기 비슷무리한 자세로 천천히 얼굴을 붉힌 세레스가 말했다.
“이 자세 뭔가 많이 부끄러운데요···.”
“그렇지만 이 자세는 네가 한 건데.”
“읏···. 그건 맞는데···. 어, 어쨌든! 이제 자리로 돌아가게 허리에 감고 있는 손 좀 풀어줘요.”
네토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던 그녀의 허리를 얌전히 풀어주었다. 그러자 세레스는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있던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곧바로 자신의 조종석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제법 괜찮아진 걸까.
세레스는 방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아랫배에 있는 마력 신경계를 매만지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보다 이거 원리가 뭔가요? 저는 오버 히트를 억눌러주는 능력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글쎄? 뭘 것 같아.”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잖아요.”
“그냥 비밀이라고 생각해둬.”
답을 알고 싶었는지 세레스가 불만스레 흘겨보았지만, 네토루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닫고 있던 음성 채널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리엔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네토루! 세레스! 괜찮습니까!?
다급한 음성이었다.
“······”
그 소리에 놀란 듯 조종석에 앉아 있던 세레스가 눈을 꿈벅였다. 그러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식했는지 입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돌려 네토루를 응시했다.
“···혹시 일부러 음성 채널 계속 닫아놓은 건가요?”
“그야, 키스하는데 방해가 되니까.”
“······당신. 아무리 그래도.”
세레스의 고운 이마가 살포시 찌푸려진다. 그러나 방금 상황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건지,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리엔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갑자기 신호가 끊겨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죄송합니다. 그, 잠시 뭔가 일이 있어서···.”
─현재 두 사람의 상태는 어떤가요? 전투 속행이 가능할 것 같나요?
“···그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현재 세레스는 오버 히트 상태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세레스가 대답을 망설이자 네토루가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비록 지금은 네토루가 세레스의 마력 신경계를 안정시켜놨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못해도 열흘 정도는 푹 쉬어줘야 한다.
세레스도 끝내 그러한 사실을 인정한 것인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리엔에게 말했다.
“···네토루가 말한 대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네토루는 어떤가요?
거기서 세레스가 힐끔 네토루를 쳐다보더니 그의 얼굴과 몸을 세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런 상태에 도달했는데 네토루가 정말 멀쩡할까 걱정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리엔에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예정대로 카렌과 커플링하고 다시 출격하겠습니다.”
2.
전술 마법탄이 성공적으로 버그 무리를 괴멸시키고, 버그들의 방어 진형이 무너졌을 때 카렌은 이번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데스 웜을 비롯해 상당한 숫자의 버그들이 후방에서 나타났을 때는,
멀리서 지켜보는 카렌도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버그들이 왜 도시로 진격하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무엇보다 도시에는 방어 병력이 없었다. 버그들이 들이닥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민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할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카렌은 두 손을 꼬옥 쥐며 간절히 빌었다.
그녀는 버그들이 도시의 시민들을 학살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한 악몽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걸로 충분하다.
이제는 사라진 도시, 카렌의 고향─바르베르크.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일이 선명히 떠오른다.
방어선이 뚫리고, 버그들이 도시를 습격했던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버그들의 시선을 끌며 미끼가 되었던 참혹했던 하루.
그 동안 애써 잊으려고 했던, 카렌은 그러한 악몽이 이곳에서 되풀이되는 걸 보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저걸 도대체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이미 버그들은 도시의 코앞까지 진격한 상태였고, 성기병들은 남아있는 버그들과 전투 중이다. 이제 와서 저걸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 일반적으로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어?”
그 순간, 카렌은 보았다.
갑자기 부대원들 사이에서 혼자 튀어나와 빠르게 버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 푸른점을 말이다.
그것은 세레스의 성기병을 탄 네토루였다.
그걸 보았을 때 카렌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네토루 그 녀석이 데스 웜과 수십 마리의 스파이더들이 있는 곳을 혼자서 망설임 없이 향하고 있었으니까.
무모하다. 저건 너무 무모했다.
속으로 몇 번이나 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끝내 혼자서 버그들의 전진을 틀어막자 카렌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건 맵 안의 점들뿐이었지만 네토루가 지금 얼마나 무리한 짓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순간 카렌은 네토루가 무사히 살아남는 것만을 빌었다. 도시의 시민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저 녀석이 대신 죽는 걸 원하지는 않았으니까.
이기적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얼굴 모르는 시민의 죽음보다는 저 녀석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다행히 그러한 간절한 기도가 통한 걸까.
끝내 녀석은 성공하였고,
무사히 데스 웜을 죽이는 것도 성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예정대로 카렌과 커플링하고 다시 출격하겠습니다.
“···하아. 저 녀석, 또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카렌은 그리 투덜거리며 안도 어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아스나가 들려주는 네토루의 목소리에 카렌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옆에서 그런 카렌을 미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아스나가 말했다.
“···그러다가 울겠다. 너.”
“엣···. 울, 울긴 누가 울어요!”
“아무튼, 네 차례가 온 것 같네. 방금 들었지? 세레스가 오버히트 상태가 된 거.”
“네. 들었어요.”
“몸은 괜찮겠어? 네토루한테 도착하면 바로 도시로 출격해야 할 텐데.”
“···해야죠. 어떻게든.”
네토루가 있는 곳으로 수송 차량을 움직이는 아스나에게 그리 말하며 카렌은 주먹을 쥐었다.
다행히 네토루가 데스 웜을 처리하는 건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챈들러 일행이 도시 안쪽으로 버그들이 침범하는 건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현재 도시 안에서는 버그들과 성기병의 격렬한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카렌이 타고 있는 차량 안에서도 저 멀리 도시 쪽에서 어렴풋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게 보일 정도였다.
그걸 조마조마한 눈으로 쳐다보던 카렌은 이윽고 데스 웜의 커다란 시체 앞에 그대로 멈춰서 있는 성기병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나 격렬한 전투였는지 세레스의 성기병은 전신이 상처투성이었다. 멋스럽던 갑옷도 반쯤 부서진 채 그 안에서 끊임없이 성혈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 저쪽도 이쪽을 발견한 걸까. 타이밍 좋게 성기병의 콕피트가 열리더니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멀쩡해서 다행이었다.
카렌은 순간 네토루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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