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 성병기
────슈우웅!
어디선가 날아온 중기관총탄이 성기병의 몸체를 때렸으나, 곧바로 튕겨 나갔다. 도탄이었다. 역시 여기사의 성기병답게 방어력 하나는 믿음직스럽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다. 이러한 행운을 계속 바라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
그래도 포탄을 쏘지 않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차마 데스 웜의 몸에 올라탄 성기병을 상대로 포탄을 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주변의 스파이더들은 주춤하고 있었다. 무작정 쐈다가는 되려 데스 웜이 먼저 포탄에 뚜드려맞고 폭사할 수가 있었다.
과연···.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네토루라고 무식하게 데스 웜을 향해 돌진한 건 아니었다. 이건 모두 계획한 일이었다.
수십 마리의 버그들에게 둘러싸여도 데스 웜과의 전투에 집중하기 위한.
아니, 솔직히 말해서 데스 웜 따위 개의치 않고 포성이 울리면 더 좋은 일이었다.
비록 데스 웜이 총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튕겨낼 정도로 단단한 몸을 지녔다고 해도, 포탄마저 견뎌낼 수는 없을 테니까.
───키에에에엑!
계속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대검을 내려찍은 탓일까. 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데스 웜이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친다.
총성과 포성 따위에 익숙해진 청각이었지만,
커다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성량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성기병 안에 있지만, 녀석의 비명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그 거대한 몸이 요동칠 때마다 세상이 흔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네토루는 괴물의 몸체에 대검을 박아 넣은 그대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균형감각이 좋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가히 묘기라고 해도 좋을 재주였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을 지켜보던 세레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읏···! 이건 너무 무모해요! 전부 계획이 있으니까 걱정 말고 자기만 믿으라고 하더니, 이게 무슨···!”
“그래도 버그들을 멈춰 세우는 건 성공했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래도 네토루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버그들의 진군은 현재 멈춘 상태였다. 데스 웜의 몸에 올라탄 네토루를 어떻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도 그런 뻔뻔한 소리를 하면 가만히···. 흐앙···! 으윽!”
숨을 허덕이며 투덜거리면서도 세레스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 증거로 세레스의 자궁구에 있는 마력 신경계는 네토루가 삽입하는 마력을 있는 그대로 전부 받아주고 있었다.
네토루는 그런 그녀의 변화에 내심 감탄했다.
감도도, 마력 연소율도, 모두 엄청나게 성장했다.
일치율이 높아진 탓인지 예전보다는 확실히 눈에 띄게 출력의 한계치가 올라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크에에에엑!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지, 데스 웜에게 그럴듯한 데미지는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달라붙은 벌레를 떼어내듯 정신 없이 몸을 흔들어대는 데스 웜의 몸부림에 이제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대로 떨어질 수는 없다.
데스 웜의 몸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대로 녀석의 압도적인 질량에 성기병과 함께 깔려 죽거나,
버그들에게 일제 사격으로 폭사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버텨낸다.
‘단단하군.’
이를 악물며 대검을 박아 넣어보지만, 간신히 살갗을 뚫고 들어간 검날은 그 이상 깊숙이 나아가지 못하고 막힌 상태였다. 터무니없는 단단함이다.
데스 웜의 몸은 마치 살아있는 강철같았다.
전력을 다해 내려찍지 않으면 몸에 제대로 대검이 박히지 않을 정도였다.
평범한 검도 아니고 무려 성병기다. 아무리 버그라고 하지만 이렇게 단단할 수 있는 것인가.
네토루는 어떻게든 더 깊게 대검을 박아넣기 위해 애쓰면서도 입술을 바득 깨물었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이 이상 출력을 높이는 건 무리다.
역시 평범한 수단으로는 이 녀석을 죽일 수 없다.
네토루는 이제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녀석을 죽이기 위해서는 성병기─알슈트페론을 사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상태로 성병기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용하려면 의식을 집중해야 하는데 간신히 몸에 올라탄 상태로 어떻게 의식을 집중하는가.
그러한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네토루는 보았다.
“···이 녀석들.”
데스 웜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공격의 기회만을 엿보던 스파이더 무리가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을 시작하는 걸 말이다.
당연히 그 방향은 도시가 있는 곳이었다.
이 녀석들 설마, 이대로 데스 웜을 놔두고 갈 생각인가? 어쩌면 성기병 하나로는 데스 웜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걸지도 모른다.
────키에에엑!
그러나 그러한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네토루를 떨쳐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데스 웜이 아예 몸을 뒤집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네토루는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걸 느끼며 전력을 다해 세레스의 조정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우우우웅!
해일처럼 흙더미가 튀어 오르며 주변의 나무들이 그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우수수 박살 났다.
2.
“···네토루, 저 녀석 제정신인가!”
챈들러는 처음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세레스&네토루>
두 사람의 이름이 표시된 푸른점이 거대한 붉은점을 향해 망설임없이 돌진하고 있었으니까.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혼자 100여 마리가 넘는 버그들 사이를 그대로 돌파해서, 데스 웜을 공격한 것이다.
그건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 녀석은 미친 게 분명했다.
챈들러는 입 밖으로 욕설이 흘러나오는 걸 숨기지 못한 채 조정간을 쥐었다. 그렇지만 차마 녀석을 뒤쫓기 위해 출력을 높이지는 못했다.
현재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제각각 기량이 다른 소대원들을 이끄는 중이었기에 섣불리 속도를 높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미 최고 속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 이상 속도를 높이면 네토루를 따라잡기도 채 전에 부대원들이 퍼지게 될 게 뻔했다.
“하아···. 하아···. 저 두 사람 괜찮은 거에요?”
커플링 파트너인 아테네가 바쁘게 숨을 흘리며 묻는다. 챈들러는 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정간을 강하게 쥐었다.
“···모르겠어.”
“네토루, 그 남자···. 은근히 무모하네요.”
“그러게. 나츠오 같은 녀석은 한 명이면 충분한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네토루의 판단은 이해한다. 이대로 버그 무리가 도시에 도착하면 분명 대참사가 일어날 게 뻔했으니까.
이윽고 그렇게 소대원들을 데리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는.
────키에에에엑!
현실감 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은 도시를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드넓은 숲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단 혼자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 자색 성기병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데스 웜.
괴물이 움직일 때마다 숲 일부가 통째로 부서지고 있었다. 수백 년은 되었을 나무가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며, 검은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커다란 언덕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상대로도 네토루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괴물의 살점과 피로 전신을 색칠한 자색 성기병은 마치 신화 속에서나 볼법한 영웅을 보는 듯했다.
“······.”
아연해지는 풍경이다. 제정신이라면 혼자서 저렇게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자칫하면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혼자 저렇게 싸우고 있던 건가.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챈들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소대원들에게 말했다.
“모두 전투 준비해! 이대로 저 녀석을 돕는다!”
이대로 저 녀석 혼자 싸우게 둘 수는 없다. 이미 몇 번 총탄을 허용했던 것인지 세레스의 성기병은 상처투성이였다.
챈들러가 신호를 주자 부대원들은 각자 무기를 장비한 채 출력을 높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네토루가 이쪽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음성 채널로 목소리를 전했다.
─···. 챈들러, 늦었어.
“젠장! 네가 터무니없이 빠른 거야! 아무튼, 기다려! 도와줄 테니까!”
─아니, 그것보다 너희들이 해야 할 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뭐?”
지금 이 녀석 뭔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러한 의문에 네토루 대신 리엔이 대답하였다.
─···챈들러. 당장 소대를 이끌고 도시를 지키러 가세요.
“그러면···. 네토루는 어떻게?”
─지금은 도시가 우선입니다.
리엔의 차분한 음성에 챈들러는 흔들리는 눈으로 맵을 확인했다. 버그 무리가 어느새 도시 코앞까지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그 거리는 1km 조금 안 된다.
저것들이 저곳에 도착하면···.
하지만 그렇다고 네토루를 두고 가라고?
그때 네토루가 챈들러의 고민을 꿰뚫어 보았는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챈들러, 너는 빨리 도시나 지키러 가. 나는 이 녀석을 죽이고 따라갈 테니까.
“···미친놈.”
저걸 정말 죽일 수나 있는 건가?
순간 그러한 의문이 들었지만,
챈들러는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2.
전투가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몇 차례나 데스 웜의 몸에 칼집을 새기고, 튀어오르는 흙무더기를 뒤집어 쓰며 내빼기를 반복했을 때였다.
네토루는 그 순간 생각했다.
과연 챈들러는 도시로 향한 버그들을 제때 따라잡았을까? 당장 맵으로 확인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러한 여유조차 없었다.
데스 웜은 자신을 괴롭힌 성기병을 향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그 거대한 몸을 무기로 말이다. 게다가 입 안쪽에서는 기괴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흉측한 기계 장치들이 계속해서 시선을 자극했다.
당연하지만 저 안에 끌려들어 가면 끝이다.
지하에서 온갖 암석과 광물들을 통째로 으깨 부시던 무시무시한 기계 장치다. 저런 것에 끌려들어 가면 성기병이고 뭐고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녀석의 돌진을 피하기 위해 성기병을 다급히 옆으로 움직였다.
쿠우우우웅─!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녀석의 꼬리가 휘어졌다. 설마 이걸 노린 거였나. 당연하지만 피하기에는 늦었다. 네토루는 그대로 데스 웜의 공격을 허용하였다.
육중한 무게를 지닌 세레스의 성기병은 그렇게 힘없이 허공에 내팽개쳐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윽!”
그 충격에 조종석에 있던 세레스가 비명을 흘렸다. 그렇지만 조종석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그녀는 의연한 얼굴로 성기병과 커넥팅을 유지했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세레스는 네토루에게 아무런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토루는 커플링을 통해 어렴풋이 감정의 편린을 느낄 수 있었다.
세레스의 강한 믿음을 말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언제 이렇게 믿음을 주기 시작한 걸까. 어쨌든 네토루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네토루는 세레스의 조정간을 당기며 넘어져 있던 성기병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방금 전의 충격이 아예 영향이 없던 건 아닌지, 성기병의 기동에 무언가 문제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삐거덕거리는 몸. 흔들거리는 팔과 다리.
어째서일까. 그 순간 네토루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세레스에게 속삭였다.
“···세레스. 복귀하면 성기병 조정 작업 좀 오래 해야겠는데.”
“하읏···. 으윽···. 그때는 당신도 옆에서 기다려요. 저만 고생하는 건 억울하니까.”
“음. 시간 남으면?”
당연하지만 여유로워서 나온 농담은 아니다. 오히려 위급하기에 나오는, 허세에 가까웠다.
몸을 일으켜 세우기 무섭게.
──쿠어어어엉!
데스 웜이 또다시 입을 벌리며 다가온다. 무척이나 커다란 입이었다. 성기병 네다섯은 한꺼번에 집어삼킬 만큼 깊은 어둠이 쩌억 벌려졌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여전히 분쇄기를 연상케 하는 무수한 기계 장치들이 흉측한 형태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소름 돋는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다.
하지만 네토루 그러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것은 공포도, 두려움도, 긴장감도 없는, 그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세레스. 아무래도 네가 격납고에서 했던 제안은 포기해야겠네.”
“···당신, 왜 갑자기 약한 소리를 해요.”
“상황이 이러니까? 아쉽네. 네가 기사 전용 슈트 입는 거 보고 싶었는데.”
“흐응···! 저는 그거 안 입는다고···. 으윽!”
그 순간 세레스의 허리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표정이 찡그려지고, 어여쁜 숨소리가 콕피트를 울린다. 갑자기 네토루가 조정간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네토루는 최대한 그녀를 아껴주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무리였다.
───의식을 집중한다.
이 순간에도 괴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땅이 흔들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네토루는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을 보고도, 흐트러짐 없이 성기병이 쥐고 있던 성병기─알슈트페론을 하늘을 향해 쳐들었다.
네토루는 더 이상 데스 웜의 몸에 올라타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네토루가 무서워했던 것은 스파이더들의 포탄이었지, 무식하게 달려드는 데스 웜의 돌진이 아니었다.
그러니 주변을 위협하던 버그들이 사라진 지금,
오히려 성병기를 사용하기가 쉬워졌다. 이것은 이제 녀석과의 일대일 정면 승부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버그들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마 성병기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때마침 그 순간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슴푸레했던 새벽의 그늘이 점점 밀려나고, 진정한 의미로 아침이 시작되는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밝게 빛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태양이 떠올라서가 아니었다.
높이 들어 올린 알슈트페론의 날을 타고,
지평선 끝까지 베어버릴 듯한 기다란 검기가 끝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내리쬐는 햇빛을 한곳에 가둔 듯한, 아득하고 드높은 빛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영웅-페리온은 일격에 용의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그러한 전설이 이곳에 재현되고 있었다.
용의 목마저 베어버린 빛의 칼날.
이윽고 그것이 세상을 향해 휘둘러지는 순간,
하늘에서 거인의 검이 내려 떨어진 것처럼, 지상이 갈라지더니 온 세상이 두 개로 나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에어프라이님 후원 감사합니다!
린과 란 일러스트 후원자 명단
(에어프라이님─250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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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휘─10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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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엌. solresi 님 팬아트 감사합니다.
너무 잘 생겨서, 저도 반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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