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9 공략전
1.
부대원들이 없는 탓일까.
적막한 분위기의 부대 식당 안.
아까부터 단둘이 있자니 세레스는 식사하는 내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다른 부대원들과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세레스는 그다지 말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단지 부대원들이 말을 걸면 친절하게 대답해줄 뿐.
네토루도 식사 도중에는 그다지 말을 꺼내는 편이 아니었기에 미지근한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이윽고 그렇게 서로 비슷한 타이밍에 식사를 끝냈을 때였다.
“···그리고 보니 이걸 안 물어봤네요.”
세레스가 식판을 정리하더니 말을 꺼냈다.
“저희 커플링 파장 검사는 어떻게 됐나요? 저번보다 일치율 좀 올랐나요?”
“아쉽지만, 큰 변화는 없었어.”
“···네? 변화가 없었다고요?”
순간 세레스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입도 멍하니 벌어지는 것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거, 거짓말 마요. 그럴 리가···.”
“미안. 방금 건 농담이고, 많이 올랐어.”
“······”
조금 장난 좀 쳐볼까 했지만, 세레스의 반응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네토루는 곧바로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네토루를 차갑게 노려보던 세레스는 아랫입술을 꾹 짓씹더니 말했다.
“하아···. 정말···. 그래서 결국 얼마나 올랐어요?”
“38.5963%”
“······”
또다시 세레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고는 은연히 목소리에 분노를 담고는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 이번에는 정말 화날 거 같으니까.”
“아니,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인데.”
“농담이 아니라 방금 그 수치가 진짜라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당신 말이 맞다면 지금 일치율이 한 번에 10% 정도 올랐다는 건데.”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던가.”
네토루는 아스나에게 받아두었던 파장 검사지를 세레스에게 내밀었다. 세레스는 그 순간까지 미심쩍은 눈을 하고는 받은 종이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응? 자, 잠시만···. 마, 말도 안 돼···.”
그러자 곧 방금과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로 세레스의 눈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놀람과 경악.
“겨우 한 번뿐이었는데···?”
그리고 약간의 부끄러움.
방금 무엇을 떠올린 건지 세레스는 얼굴을 붉히고는 중얼거렸다.
“과, 과연. 확실히 밤에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농담이 아니라는 게 확인되자 세레스는 헛기침하더니 네토루의 시선을 피했다. 잘 보면 식탁 아래로 손이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좋은 결과지만, 너무 높았던 게 문제인 걸까.
세레스는 기뻐하기보다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거, 원래 이래요?”
“뭐가?”
“아니, 그러니까···. 그, 뭐냐···. 그거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네토루는 태평하게 턱을 괸 채 말을 빙빙 돌리는 세레스를 구경하였다. 이미 한 차례 몸을 뒤섞으면서 그거 하나 말하는 게 힘든 걸까.
끝내 세레스가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말했다.
“···섹스하면 원래 이렇게 많이 오르냐고요. 당신은 경험 많으니까 뭔가 알 거 아니에요?”
“아니, 보통은 이렇게 많이 안 오르지.”
“그런데···. 저희는 왜 이런 거죠?”
“정말 짐작 가는 게 없는 거야?”
“······”
입을 꾹 다문 세레스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런 세레스의 대답에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모르는 건가. 혹시 그동안 성관계에 아예 신경을 끄고 살아서 그런 걸까?
“세레스. 기사단에서는 몇 살 때 나온 거야?”
“···그건 알아서 뭐하게요?”
“투덜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읏.”
중요한 이야기다. 그래서 강하게 나오자 세레스는 시선을 피하고는 중얼거렸다.
“···18살이네요.”
···과연. 이래서 처녀였나.
성인이 되기 전에 쫓겨났으니 남자 경험이 없을 수밖에. 세레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이쪽으로서는 운이 좋은 일이었다.
“18살이면···. 그래도 보통 성인이 될 때쯤이면 어느정도 알려줄 텐데? 주변에 있는 다른 여기사들이 말 안 해줬어? 첫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못 들어봤는데요.”
“혹시 기사단 안에서 왕따라도 당한 거야?”
“······”
설마 정답인가? 왠지 뾰로롱해진 세레스의 반응을 지켜보던 네토루는 쓴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기사단에 쫓겨날 정도로 큰 사고를 쳤을 테니까, 여기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세레스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왕따는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뭘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간관계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레스의 표정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게다가 또 눈가가 붉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듯하다. 기사단에서 쫓겨날 때 꽤나 큰일이 있었나 보다.
정말이지···. 이제는 내 앞에서 눈물이 많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건가. 이제는 창피함도 못 느낄 정도로 그냥 자연스러워진 걸지도 모른다.
네토루도 그 이상은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답을 알려주었다.
“원래 첫 경험이라는 게 그래. 유독 파장 변화가 큰 편이지. 이번에 일치율이 크게 오른 건 그래서일 거야.”
“···그런가요? 기사단이 성에 대해서는 엄격했던 곳인지라 저는 모르고 있었네요.”
정확히는 알려줄 필요가 없던 게 아니었을까.
어차피 여기사가 처녀를 바칠 상대는 정해져 있으니까.
아무튼,
네토루가 사실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그건 아무리 첫 경험이라고 해도 보통은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건 단지 네토루가 특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굳이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세레스가 그런 걸 알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아니, 정확히는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런 속 사정을 모를 세레스가 순진한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뭘?”
“당신···. 이 정도 수치면 데스 웜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겠어요?”
“······”
네토루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멋스럽게 이길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런 허세를 부릴 녀석이 아니었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괴물 놈은 나도 처음 보니까, 일단 직접 상대해봐야지.”
“그러지 말고, 뭐든 좋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봐요. 힘들 것 같다, 가능할 것 같다. 대충 이 정도만.”
세레스의 눈과 표정은 진지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턱을 괴고 있던 네토루도 자세를 고쳐잡고는 고민해볼 수밖에 없었다.
데스 웜. 처음 봤을 때 네토루도 그 순간만큼은 잠시 경직되었을 정도로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버그들이 하나같이 전부 몸이 커다란 괴물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너무 상식을 벗어나 버렸다.
과연 검을 찔러넣으면 티가 나기는 할까?
성기병이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닌데도 녀석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조그맣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괴물은 몸집 자체부터가 흉악한 무기와 같았다.
막말로 녀석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면 네토루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말려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녀석의 무게에 찌부러져 죽겠지.
게다가 무엇보다 적은 데스 웜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버그들 역시 큰 위험 요소다.
네토루는 머릿속에서 여러 조건들을 대입해본 채 그 괴물 놈과의 전투를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그리고 곧 판단을 내렸다.
“···세레스, 너한테 오버 히트가 찾아올거라는 걸 전제로 망설이지 않고 전력을 다하면 대충 확률은 절반 정도 될려나.”
“겨우 그것밖에 안 돼요?”
“이것도 나름 높게 잡은 거야.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추가되면 아마 죽일 수 있을 거야.”
“조건이요? 그게 뭐죠?”
“혹시 싸우다가 네가 기동 불능 상태가 될 경우, 너를 대체해줄 사람이 필요해. 그때도 나는 분명 계속 싸울 수 있을 테니까.”
“대체해줄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구겠어.”
“······당신. 설마.”
세레스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불편한 제안을 받은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세레스는 그 녀석과 커플링 하는 걸 원치 않으니까.
2.
네토루가 393부대에 오기 전이었다.
카렌은 한 달 정도 도시에 있는 병원에서 나츠오랑 같이 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혼자 먼저 퇴원하고 말았지만, 그 기간 동안 다른 부대의 파일럿들이랑 간단하게 안면 정도는 익힐 수 있었다.
아무리 다른 부대라고 하지만 버그들과 목숨 걸고 싸우는 전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서로 말문을 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카렌이 병원에 있던 모두와 친하게 지낸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렇게 사교성 좋은 성격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내 이름은 기억 못 하는 건가? 왠지 섭섭해지려고 하는걸.
얼굴은 얼핏 기억나도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던 웬 붉은 머리칼 사내가 갑자기 친근하게 아는 척하며 말을 걸자, 카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기를 칼라일이라고 소개하며 부대 좀 안내해달라고 했을 때는 더더욱 황당했다.
그렇지만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번 작전을 위해 지원 온 파일럿이었고, 게다가 붉은 머리칼 사내가 나츠오에 대한 이야기도 은근슬쩍 꺼냈기 때문이다.
“···저기. 칼라일 씨?”
“그냥 편하게 칼라일이라고 불러.”
“아, 네.”
“그리고 말도 그냥 편하게 해. 병원에서는 나츠오, 그 녀석하고도 서로 말은 편하게 했으니까.”
···태도를 보아하니 사교성이 좋은 사람인 듯했다. 덕분에 카렌으로서는 꽤나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퇴원하고서 나츠오는 이런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고 있던 건가?
그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아무튼, 카렌은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저기, 나츠오는···. 잘 지내고 있나요?”
“글쎄···.”
“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돌연 칼라일이 심각한 얼굴을 하자 카렌도 덩달아 표정이 굳으며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
칼라일이 말끝을 흐린다. 카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꾸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병원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 방금 건 그냥 농담이야.”
“노, 농담이요?”
“왜? 가슴이 철렁했어? 역시 여자 친구라고 걱정되기는 하나 보네.”
“······”
카렌은 표정을 찡그렸다.
왠지 이 남자···. 네토루, 그 녀석처럼 쓸데없이 사람 놀리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카렌의 표정을 보고도 칼라일은 능글맞게 웃음을 유지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보니 지금 네 파트너는 누구야? 병원에서 나츠오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정작 이름은 못 들어 봤거든.”
“···제 파트너요?”
“그래. 이왕 이번 작전에서 같이 싸우게 되었는데 얼굴도 한번 보고 싶네.”
“······”
칼라일의 말에 카렌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뭔가 착각하는 듯했다. 이제 그 녀석은 내 파트너가 아닌데.
굳이 숨길 이유는 없기에 카렌은 잠시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저한테는 파트너가···.”
“카렌.”
그런데 그때, 카렌이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카렌은 흠칫했다.
“···네토루?”
경직된 몸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자 네토루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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