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67화 (67/148)

EP.67 조정 작업

“······”

“······”

순간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카렌이 다급히 말했다.

“물, 물론, 농담이야.”

하지만 네토루는 그런 그녀의  어리숙한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방금 그건 분명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렌이다. 이 녀석이 이런 농담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그런 농담도 할 줄 모르는 성실한 녀석이고 말이다.

···그러면 그 정도로 카렌은 서운했던 걸까.

굳이 차별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서 네토루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다음에는 신경 쓸게.”

“······”

그 한 마디에 애써 웃던 카렌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리고는 당혹 어린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애초에 내가 이제 너랑 커플링 할 일도 없잖아?”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카렌의 알 수 없는 소리에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언제 너랑 커플링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가?”

“···그러면 나랑 계속 커플링 하겠다고? 세레스는 어쩌고?”

“애초에 커플링 하자고 한 건 분명 너였을 텐데.”

“······”

이건 오래된 일도 아니다. 네토루에게는 카렌이 했던 말이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했다.

─…네토루. 세레스랑 스와핑 하지 말라고는 안 할게.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

─내 몸 상태가 좋아지면 나랑도 커플링 해.

그것은 분명 보통 각오로 했던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생각이 바뀐다고?

네토루는 그런 카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답을 요구하듯 조용히 쳐다보고 있자,

“······그건.”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도, 카렌은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간신히 하려던 말을 집어삼키는 모양새였다.

분명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습이었지만, 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참 답답하기까지 했다.

이윽고 카렌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그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아. 그, 뭐냐···. 나는 너랑 세레스가 커플링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거든.”

“······”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까 의외로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굳이 이 이상 내가 세레스를 곤란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횡설수설하는 카렌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카렌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정말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이 녀석의 장점은 당차고, 씩씩한 성격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의지를 솔직하게 표현 못 하는 건 너무 카렌답지가 않다.

그렇기에 혹시나 싶던 네토루는,

“카렌.”

“으, 응?”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카렌의 이마는 뜨거웠다. 아니, 조금 체온이 높기는 했는데 오버 히트라고 하기에는 뭔가 애매했다.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오버히트에서 벗어날 때가 됐을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

“···오버 히트야?”

“······”

카렌에게 물어보듯 말을 꺼내자, 그녀는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끝내 결심한 듯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금 전보다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 맞아. 아마, 그런 같아. 그래서 내가 방금 헛소리 좀 했나 봐. 정말···. 내가 오버 히트만 되면 왜 이러는 건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런 카렌의 모습은 때마침 좋은 변명거리를 찾아서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확실히 오버 히트가 될 때마다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뭐든 좋다. 그냥 놔둘 수는 없다. 네토루는 카렌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러면 치료해야지.”

“그, 그렇지만, 굳이 치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딱히 심한 건 아니거든.”

“심한 게 아니라도 일단···.”

“괜찮아! 이 정도면 의무실이면 되니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카렌은 붙잡혀 있던 손목을 빼내더니 황급히 자리를 피하듯 도망쳐버렸다.

차마 쫓지 못하고, 네토루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카렌답지 않은 모습이다.

2.

온몸 구석구석까지 감싸 안는 성기병 활성액의 감촉은 상당히 불쾌하다. 몇 번이나 조정 작업을 반복해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다.

하지만 세레스는 몇 시간 동안이나 꿋꿋하게 참으며 성기병 조정 작업에 몰두했다.

이번에 하는 성기병 조정 작업은 다른 때보다 특별했다. 바뀐 마력 신경계에 맞추어 성기병의 구조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말로만 들었던 걸 직접 경험해보니 왠지 신기했다. 확실히 ‘성교’가 마력 신경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기는 하나 보다.

그 증거로 아침에 일어나보니 하복부에 구축된 마력 신경계의 구조에 작은 변화들이 여럿 있었다. 이런 건 오랜만이었다. 393부대에 오고 나서 마력 신경계의 구조가 바뀌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정말이지. 그 남자를 만나고서 무언가 많이 바뀌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세레스는 이걸 긍정적으로 봐야 할지 부정적으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건 없는 듯헀다. 지금은 그의 존재가 제법 든든했으니까.

어쨌든 평소보다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서서히 조정 작업이 끝나가는 탓인지 점점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가운데,

성기병 활성액···.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거 정말 그 냄새랑 비슷하다.

몇 시간 전에 직접 입안에 머금어보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이러니까 예전에 기사단 선배들이 웃으며 대답을 피했던 거겠지.

나중에 성인이 되면 알게 될 거라고.

견습 기사 시절, 10년 전에 들었던 걸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왠지 그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던 그때였다.

───!

쏴아악, 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세레스는 온몸을 뒤덮고 있던 성기병 활성액이 점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드디어 조정 작업이 끝난 듯했다.

“콜록···. 콜록···.”

이윽고 콕피트 안을 가득 채우던 활성액이 전부 빠져나가고, 덩그러니 조종석에 남겨진 세레스는 혼자서 괴로운 기침을 반복했다.

입안에 성기병 활성액이 조금 들어와버렸다.

덕분에 혀끝에서 그 남자의 정액과 비슷한 맛이 났다. 아니, 그 남자의 것보다는 좀 더 쓸려나? 아무튼, 좋은 맛은 아니다.

그 남자가 삼켜달라고 부탁했을 때 망설임 없이 거절한 건 역시 이래서였겠지. 그때 무의식적으로 성기병 활성액을 떠올렸던 게 분명했다.

‘그런 걸 어떻게 삼켜.’

책에서는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고 하지만 세레스는 자신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새벽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되새기던 세레스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콕피트를 열기 위해 내부를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콕피트 여는 게 쉽지가 않았다.

평소보다도 긴 조정 작업 때문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팔과 다리가 무겁다.

게다가 운 나쁘게도 끈적끈적한 점성을 지닌 성기병 활성액이 눈꺼풀에 걸린 탓에 눈을 뜨기도 어렵다.

혹시 아스나는 없는 걸까?

만약 그녀가 있었다면 알아서 콕피트를 열어줬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옆에서 조정 작업을 지켜볼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은 듯했다.

하기야···. 오늘 지원 병력이 오는 것도 그렇고, 성병기 관련해서 바쁘게 준비할 게 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내부를 더듬으며, 콕피트를 열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그때 누군가가 먼저 콕피트를 열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외부 공기가 안으로 밀려오자 세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아스나가 와서 열어준 걸까?

그러한 의문이 문득 떠오르던 찰나였다.

“읏!?”

세레스는 돌연 자신의 머리 위를 뒤덮은 무언가에 놀라 당황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손을 뻗어 버둥거리고 있자니 무덤덤한 목소리가 그녀를 말렸다.

“세레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닦기 힘드니까.”

“다, 당신이었어요? 깜짝 놀랐잖아요.”

네토루였던 건가. 세레스는 생각지 못한 그의 등장에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곧 얌전해졌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수건으로 제일 먼저 눈꺼풀에 걸려 있던 점액부터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 세심한 손길을 느끼며, 점액이 사라지자 세레스는 눈을 떠보았다.

“······”

그러자 바로 앞에 네토루가 있었다.

씁쓸한 느낌의 황량한 눈동자,

그리고 햇볕에 태워진 옅은 갈색 피부.

밤이 아니라, 낮에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보니 느낌이 색다르다.

얼굴을 닦아주던 그는 어느새 세레스의 머리에 걸려 있던 점액을 천천히 치워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끔멀끔 쳐다보던 세레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물었다.

“···저기, 아스나는요?”

“엄청 바쁘던데? 아마, 이제 곧 도착하는 지원 병력 때문인 거 같아.”

···역시 아스나는 바쁜 건가.

보통은 조정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아스나가 수건을 건네고는 했지만, 이렇게 네토루가 대신해주고 있으니 왠지 낯설다.

아니, 애초에 굳이 이렇게 직접 닦아줄 필요는 없는데···.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이게 뭘까. 괜스레 부끄러워진 세레스는 그에게서 수건을 빼앗았다.

“이제 제가 닦을게요.”

네토루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바로 수건을 넘겨주었다. 세레스는 받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에 묻은 점액을 마저 닦아내기 시작했다.

“지금 제가 조정 작업을 얼마나 한 거죠?”

“대략 4시간 정도?”

“···그렇게 많이요?”

조금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걸린 시간에 세레스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면 점심시간도 이미 끝났을 것이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세레스는 혹시나 싶어서 네토루에게 물었다.

“···당신, 설마 여기서 조정 작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죠?”

“글쎄? 어떨까.”

네토루는 딱히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다른 의미로 답을 전하듯 그가 나직이 말했다.

“어쨌든 빨리 슈트 갈아입고, 점심 먹을 준비나 해. 부대원들이 식당에 우리 몫은 따로 남겨놨으니까.”

우리 몫이라니···.

역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가.

그래도 밥은 그냥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지.

물론 그가 먹지 않은 이유야 잘 알겠지만···.

“밥 정도는 저 혼자 먹어도 되는데···.”

“그래도 혼자 먹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아. 정말···. 아무튼 빨리 갈아입고 올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그리 말한 세레스가 급히 성기병에서 내려와 탈의실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끼이익

무거운 철문 따위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세레스는 물론이고 네토루도 등을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지원 병력인가.”

네토루가 그리 중얼거리기 무섭게,

눈에 익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성기병들이 격납고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다른 부대의 성기병들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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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스파이더 러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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