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 라벤더 차
“······”
“······”
어색한 침묵이 목욕탕 안을 맴돌았다.
카렌과 세레스, 두 사람은 욕탕 안에서 몇 분동안이나 아무런 말 없었다. 아직 아침에 있었던 일이 제대로 안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간신히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렌이었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야?”
“예.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세레스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새기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세레스의 미소가 카렌에게는 그저 거짓된 웃음으로 밖에 안 보였다. 어딘가 표정이 경직되어 있는 게 아직 뻔히 보였으니까.
문을 열고 목욕탕 안에 들어왔을 때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세레스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놀랐는가.
얼굴은 붉고, 몸은 희미하게 떨고 있고···.
그것은 딱 봐도 오버 히트였다.
‘···분명 치료 받았을 텐데.’
역시 한 번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당장 카렌만 해도 겨우 억눌렀을 뿐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다. 그러니 세레스도 그런 걸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참지 말고 네토루에게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 카렌이 경험해본 결과 부끄럽다고 참아봤자 좋을 건 없었다.
그런데 그걸 세레스에게 어떻게 말하지?
아니, 애초에 말을 꺼내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그랬다가는 네토루와의 관계가 들키고 만다.
카렌은 세레스에게 자신도 그 녀석하고 입을 맞춰봤다는 걸 말할 수가 없었다. 제 정신이면 그런 걸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렇지만 세레스를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
그러면 그냥 내가 그 녀석한테 가서 몰래 귓뜸이라도 해줘야 하나···.
어차피 카렌은 씻고 나서 바로 녀석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자기 전에 한 번 더 치료를 받는 게 좋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알려줘야 겠네.’
아무튼, 씻고나서 네토루한테 세레스의 상태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를 해보자.
안 그래도 긴박한 상황이지 않은가.
중요한 전투를 앞둔 지금은 최대한 세레스의 몸상태에 신경 써주는 게 좋았다.
그리고···.
아침에 있던 일도 어서 사과해두는 게 좋겠지.
그 말다툼은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 세레스에게 서운함을 느낀 탓에 충동적인 면이 컸다.
당연하지만 카렌은 겨우 그런 일로 세레스가 싫어진 건 아니다. 여전히 좋아한다. 그러니 계속 이렇게 세레스와 어색한 관계로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데스 웜이라는 괴물이 바로 근처에 있는데, 언제까지 애처럼 꽁해 있을 것인가.
이런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답지도 않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카렌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나직이 세레스의 이름을 불렀다.
“세레스.”
“···네?”
이름이 불리자 세레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렌은 그런 세레스를 지그시 쳐다보고는 말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은 내가 미안했어.”
“······”
“스와핑 관련해서 화를 낸 건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 게. 그때는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기분이 안 좋았거든. 그래서 어쩌다보니 세레스에게 함부로 말했네. 세레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 미안해.”
“···카렌.”
솔직한 사과에 세레스가 놀란 듯 눈을 꿈벅였다. 입도 살짝 벌린 채 입술을 떨었다. 그러다가 곧 그녀는 살풋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꽃이 만개한 듯한 예쁜 웃음이었다.
“아니요···. 낮에 있었던 일은 저도 죄송했습니다. 제가 언니로서 조금 차분해질 필요가 있었는데···.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해버렸네요.”
어쩌면 세레스도 지금 같은 상황을 기다렸던 걸까.
카렌은 세레스에게서 느껴지던 어색한 공기가 점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카렌은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이유 모를 낯간지러움을 느끼며 물에 잠겨 있는 손과 발을 꼼지락거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서 아침에 왜 그렇게 싸운 걸까.
역시 딱딱한 얼굴로 이야기 하는 것보다는, 세레스가 온화하게 웃어주는 모습이 좋다.
그렇게 카렌이 속으로 만족하고 있을 때였다. 세레스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나름 카렌이 왜 네토루랑 커플링을 고집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요.”
“···응? 뭐라고?”
방금 세레스가 뭐라고 한 걸까. 잘 듣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레스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도대체 방금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러는 걸까.
괜히 그게 궁금해진 카렌이지만,
─응? 뭐야, 안에 사람 있나 본데?
─아앗! 린! 옷 좀 가지런히 넣어두면 안 돼? 남자애도 아니고 여자애가 이렇게···.
─에이! 뭐, 어때? 어차피 전부 빨 건데.
시끌벅적한 두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과 란이었다.
그 순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카렌과 세레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목욕탕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린과 란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엉? 뭐야, 안에 있던 사람이 카렌이랑 세레스였네?”
경쾌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온 린이 이쪽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소에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서 그런지, 등줄기로 위로 긴 갈색 머리카락을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린은 한 동안 이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는 무언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입꼬리를 음흉하게 끌어당겼다.
“···흐응. 다행히 둘이 화해했나 보구나?”
“···어? 카렌, 세레스 언니! 정말이야?”
린의 말에 호들갑을 떠는 란의 모습을 보며 카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부대원들을 너무 신경쓰게 만들었나보다.
“도대체 둘이 아침부터 뭐 때문에 싸웠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네. 안 그래도 이제 곧 큰 싸움이 있을 예정인데 둘이 서먹서먹하면 곤란했거든.”
란은 그리 말하며 목욕탕 욕조에 반쯤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그리고는 세레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세레스. 사령관님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그, 뭐냐 성병기로 데스 웜을 죽일 거라며?”
“···예.”
“그런데 가능하겠어? 나야 성병기 같은 거 써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거 어지간히 커플링 파장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쓸 수 없다던데?”
“······해내야죠.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린의 물음에 세레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러면서도 정결하고 올곧은 자색 눈동자에 고요한 색채가 깃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카렌은 보았다.
세레스가 그 어느때보다도 결연한 표정을 짓는 걸 말이다. 뭔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망설임을 전부 흘려보낸 듯한 진지한 얼굴이었다.
‘···세레스.’
그런 세레스를 보며 카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거운 책임감을 껴안고 있음에도 두려움 하나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동화속 기사처럼 고결해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믿음직스러운 언니다.
그때 카렌은 그렇게 생각했다.
2.
목욕을 끝내고 카렌은 적당히 머리를 말리고서 곧바로 방에서 나왔다.
‘역시 다들 모여 있네.’
격납고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393부대의 부대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출격이 없을 때는 각자 자기 방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 채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계속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애초에 부대 안은 무언가 즐길 거리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계속 방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건 보통 정신으로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네토루가 이상한 녀석이었다.
아무튼 그렇다보니 부대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모임의 장소가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바로 성기병 격납고였다.
뭔가 장소가 이상하다 싶을 수 있지만, 사실 성기병 격납고는 모임의 장소로 이상적인 곳이었다.
성기병이 보관되는 곳답게 공간도 넓직했고, 의외로 쾌적했다. 게다가 이곳에 있으면 출격 명령이 떨어질 때 다급하게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 바로 출격을 준비하면 그만이었다.
그걸 알아서인지 정비반장인 아스나도 그렇고, 사령관인 리엔 역시 격납고 안에 부대원들이 모여 쉴 수 있도록 나름 배려해주는 편이었다.
격납고 구석에 부대원들이 모여서 떠들 수 있도록 작은 가구들이 여럿 존재하는 건 그래서였다.
덕분에 격납고 안의 풍경은 성기병과 자잘한 가구들이 뒤섞여 약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나름 인간미 넘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사실 카렌이 격납고 안에서 부대원들의 복귀를 기다리는 건 이래서였다.
이곳이 모임의 장소였으니까.
방 안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격납고 안에서 부대원들을 막연히 기다리는 게 마음 편안 일이었다.
“······분위기는 예상대로인가.”
늦은 저녁 시간. 현재 격납고에 모여 있는 부대원들의 분위기는 딱 봐도 어수선해보였다.
원래라면 여유롭게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하거나, 서로 체스를 두기도 하며, 그림이나 뜨개질 따위로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
그래도 그나마 시간을 죽일 겸 부대원들끼리 사소한 이야기를 떠들며 쉬고 있는 모양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엿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갑자기 그런 괴물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긴장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며칠 전에도 부대원들이 죽은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듣자하니 지금도 계속해서 데스 웜 주변으로 버그들이 나타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번 싸움은 그 어느때보다 위험한 전투가 될 것이다.
덕분에 카렌은 초조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출격 할 수 없을까.”
몸 상태는 이제 많이 좋아졌다. 조금 무리하면 출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
네토루가 세레스랑 스와핑을 해버린 탓에 현재 카렌에게는 커플링 파트너가 없었다. 그러니 출격하고 싶어도 출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것 때문에 카렌은 오늘 하루종일 부대원들과 스와핑을 시도했다. 부대 안에는 커플링 파트너가 없는 부대원이 아직 2명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카렌은 그중에서 커플링 파장이 일치하는 부대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지만 모두 커플링 파장의 일치율이 생각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아스나에게 결과물을 들었을 때는 카렌조차도 놀랐을 정도였다.
“···하아.”
부대원들의 무거운 분위기. 그걸 느끼던 카렌은 모여 있는 부대원들에게서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남자 숙소로 향했다.
카렌은 자기 직전에 네토루에게 마지막으로 치료를 받을 생각이었다.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지만 혹시 모르니 몸 회복에 신경 써야 했다.
그렇게 네토루의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걸음을 멈춘 카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지 못하게도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세레스?’
네토루의 방문 앞에 있는 건 세레스였다. 뭔가 싶어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니, 세레스는 긴장한 얼굴로 한차례 숨을 내쉬고는 그의 방문을 두들겼다.
그리고는 곧 방문이 열리고 네토루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는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
순간 그날밤 옷장 안에서 보았던 세레스의 울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카렌은 고개를 획획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세레스가 네토루의 방에 찾아갈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역시 치료 때문이겠지.
안 그래도 목욕탕에서도 오버 히트 때문에 몸이 안 좋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치료 받으려고 하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조금 기다려야겠네.”
아무래도 조금 늦은 모양이다. 카렌은 적당히 벽에 기댄 채 세레스가 나오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3.
“설마 이 시간에 나를 또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이야?”
“···오해하지 마세요. 오늘은 저번처럼 수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흠. 그래?”
네토루가 얄밉게 입매를 비틀고는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세레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덕분에 그때의 일이 다시 한번 뇌리에 떠올랐다.
그의 밑에 깔리고, 녹음기를 빼앗기던 그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건데, 만약 다음에도 이런 허튼짓 했다가는 가만히 안 둘 거야.
차갑게 식어 있던 그의 황량한 눈동자는 정말로 많이 무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남자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도 할 수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아마 화가 많이 났던 거겠지.
세레스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저기···. 그때는···.”
“뭐. 굳이 이제 와서 다시 꾸짖을 생각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 네토루는 일부러 말을 끊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방금 막 끓여온 차를 내밀어주었다. 방금까지 세레스가 회상하던 차가운 얼굴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그 모습에 세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내민 찻잔을 받아들였다.
“···응?”
그리고 곧 세레스의 눈이 곧 휘둥그레졌다.
차의 향 때문이었다.
기껏 보급품으로 나오는 걸 내올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걸 가지고 왔다.
혹시나 싶어서 천천히 찻잔에 입을 대어보던 세레스는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설마 싶었는데 이거 라벤더 차네요?”
“음? 알고 있네?”
“···그냥 어쩌다 보니.”
예전에 차를 즐기던 부대원이 있었다.
19살 생일을 앞두고 있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끝내 성인이 되지 못하고 꺾였다.
운이 없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포탄을 피하는 건 어린 파일럿에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이제는 잊고 있던 그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세레스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러자 앞에 그 표정을 보고 있던 네토루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괜히 이걸로 가져왔나? 나름 아끼는 건데.”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기껏 차를 끓여준 방 주인한테 이게 무슨 꼴인가. 그녀는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하듯 그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남자가 방 안에 왜 이런 걸 구비해두고 있어요?”
“왜? 이상하게 보여?”
“···조금은요?”
세레스는 네토루를 빤히 쳐다보았다.
탁해 보이는 금발과 오랫동안 전장을 헤쳐나온 듯한 갈색 피부. 게다가 남성 파일럿답게 잘 단련된 육신은 예리하게 벼려진 검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겉모습만 보면 라벤더 차 같은 걸 방안에 보관하고 있을 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분위기 역시 그러하고 말이다.
“아무튼, 몸에 좋은 차니까 남기지 말고 전부 다 마셔. 특히 라벤더 차는 여성의 마력 신경계 회복에 도움이 되니까.”
“···굳이 그렇게 잔소리하지 않아도 그럴 거예요.”
세레스는 천천히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진한 라벤더 향도 그렇고, 온몸에 스며드는 듯한 차의 맛이 썩 나쁘진 않았다.
아무래도 한두 번 끓여본 건 아닌 듯했다.
그 사실에 세레스는 살포시 웃고 말았다.
네토루가 차를 끓이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안 된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이미지에 안 맞는다고 해야 할까.
‘이 사람···. 설마 오버 히트 때문에 일부러 나한테 라벤더 차를 끓여 준 건가.’
조용히 차 맛을 즐기며 세레스는 네토루를 몰래 힐끔 쳐다보았다.
이쪽에는 정성스레 라벤더 차를 끓여 주었으면서, 정작 본인은 커피를 즐기는 중이었다. 게다가 딱 보니 보급용으로 나오는 싸구려였다.
누가 봐도 이건 세레스를 신경 써준 모습이었다.
방금 네토루가 말했다시피, 라벤더 차는 여성의 마력 신경계를 안정화 시키는데 도움이 되니까. 즉 오버 히트 상태에서 회복하는데도 좋다는 소리였다.
이건 사소하지만, 그렇기에 생각이 깊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배려였다.
이런 네토루의 섬세한 면은 많이 놀랍지만,
“······”
그런데 이거 제법 비싼 물건일 텐데···.
현재 왕국은 버그들과 전쟁 중이었다. 식량 여유도 없는데 국내에 찻잎 같은 게 넉넉할 리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그 값어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라벤더 찻잎을 준비해두고 있는 건, 단순히 차 끓이는 게 취미라서 그런 건 아닐 터.
얼핏 봐도 이건 여성을 위해 평상시에도 준비해두고 있던 게 분명했다. 라벤더 차는 여성 파일럿에게나 좋지 남자에게 별다른 효능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걸 보면 평소에도 꽤나 커플링 파트너를 신경 써주는 거 같기는 한데···.
정말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남자다.
사실 세레스는 네토루가 조금이라도 나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했다. 뭔가 실망할 수 있도록, 뭔가 후회할 수 있도록, 그런 걸 원했다.
그런데 이러면···. 물러설 수가 없다.
한동안 네토루를 지그시 관찰하던 세레스가 찻잔을 내려두고는 한숨 쉬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당신, 정말로 이상하다는 거.”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글쎄요. 어떻게 보면 둘 다죠.”
무슨 의미인지 모를 네토루가 눈매를 찡그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왠지 그 모습이 수수께끼를 고민하는 커다란 아이처럼 보여서 무섭기보다는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이렇게 사람의 인상이 쉽게 바뀔 수 있는 걸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을 느낀 채 세레스는 계속해서 네토루의 얼굴을 보며 고민했다.
만약 눈앞에 있는 사람이 네토루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나는 무슨 선택을 했을까.
그때도 이런 저녁에 몸을 정갈하게 씻고서 혼자 남자의 방에 왔을까.
그때도 남자가 좋아할 법한 새하얀 원피스를 꾸려 입은 채 이렇게 태평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세레스는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선택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그래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지금 자신의 선택에 흔들림 없다는 것이다.
뭔가 눈앞에 두고 이야기하면 망설임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가슴 안은 고요했다.
어쩌면 네토루가 끓여준 라벤더 차가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몸 안에 스며드는 듯한 따스함이 긴장감을 없애준다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세레스는 태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신, 저한테 언제쯤 물어볼 거예요?”
“뭘.”
“제가 당신의 방에 찾아온 이유요.”
“······”
눈치가 빠른 사내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겠지.
정갈하게 씻고서, 남자가 좋아할 법한 차림새를 해왔다. 이 의미를 네토루가 과연 모를까.
“걱정 마세요. 오늘은 녹음기 같은 거 없으니까.”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스르륵
세레스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정숙하게 차려입고 있던 새하얀 원피스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세레스는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이런 연기는 익숙하지가 않다고.
나름 최대한 의연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해봤지만, 세레스는 곧바로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어젯밤,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이 글러 먹었다는 네토루의 말은 역시 숨길 수 없는 사실인 듯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의외로 그 나이 될 때까지 남자 경험은 많이 없나 봐?
정말로 경험이 없는 걸.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미여정돌아와님 후원 감사합니다!
린과 란 일러스트 후원자 명단
(에어프라이님 NeoGGM 광휘
미여정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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